27화 폭풍 속으로 (2)
전기충격이 가해지는 순간 젊은 청년이 움찔했다.
준은 다시 청년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 호흡과 심박이 돌아오지 않았다.
손바닥을 다시 가슴에 대고 전격 마법을 일으켰다.
이번엔 좀 달랐다.
마법의 위력을 낮추는 대신 전기가 심장에 집중되도록 했다.
파직!
짜릿한 소리와 함께 청년의 몸이 떨렸다. 준은 재차 청년의 상태를 살폈다.
미약하지만 숨결이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조용하던 가슴에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은 상태 유지 마법을 건 다음, 외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특별히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데. 지병이 있는 사람인가?’
확실히 그런 생각이 들 만했다.
젊은 청년은 창백한 피부에 살집도 없어 굉장히 연약해 보였다. 심장 쪽에 지병이 하나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었다.
“마리. 근처에 이 사람이 흘린 짐이 있나 한번 확인해 봐.”
“네.”
마리가 움직였고, 릴리도 몸을 은신한 채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준은 마나를 흘려 청년의 상태를 계속 확인했다. 호흡과 심박이 점점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지만, 청년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진료소로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준은 계획을 세웠다. 특별한 외상이 없으니 업고 간다면 문제는 없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과연 이 청년에게 일행이 있는지, 혹은 쫓기는 와중이 아니었는지 하는. 행색을 보니 쫓기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니까.
‘위성을 써야겠군.’
준은 손을 뻗어 마나를 일으켰다.
푸슈우웅!
아까 놓아 둔 마법공학 위성이 무서운 속도로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적당한 고도에서 움직임을 멈추더니 날개와 렌즈를 펼쳤다.
준은 즉시 위성에 접속했다.
곧 주변의 지형과 사물 정보가 준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일행이나 다른 기척은 없는 것 같아. 그렇다면 혼자 여기까지 온 건가?’
여행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말도 혈통이 있는 것이었다. 그 말은, 쓰러진 이 청년이 보통의 신분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더욱 이상했다.
‘고귀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시종이나 일행이 있어야 정상일 터인데?’
그때, 마리가 다가왔다.
“스승님. 이거.”
그녀가 작은 가방을 내밀었다. 준은 그것을 받아 꼼꼼히 살폈다.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만든 고급 가방이었다.
가죽으로 되어 있었는데, 검과 방패가 들어간 알록달록한 문양이 박혀 있었다. 준은 그 문양이 귀족 가문을 뜻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지만 가문을 특정하기에는 지식이 부족했다.
준은 릴리를 호출해 도움을 청했다. 릴리는 돋보기로 문양 곳곳을 살폈는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처음 보는 문양이네요. 그 뭐냐, 자경단의 바이런 아저씨라면 알지 않을까요?」
“마리. 일단 이 사람을 진료소로 옮겨야겠다. 짐을 챙겨라.”
준은 젊은 청년을 조심스레 업었다. 마리도 가방을 들고 준과 함께 마을로 복귀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청년의 말도 뒤를 따라왔다.
* * *
진료소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그네스가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리가 문을 열어 주었고, 준이 청년을 업은 채 안으로 들어왔다. 종소리를 듣고 나온 아그네스와 하룬이 놀라는 건 당연한 수순.
“환자인가요?”
“숲에 쓰러져 있었다. 일단 응급처치를 해서 위급한 상황은 넘겼어.”
“바로 치료 준비할게요!”
아그네스가 진료실로 먼저 뛰어갔다. 이어 들어온 준은 하룬의 도움을 받아 청년을 침대에 눕혔다. 아직까지 그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준이 하룬에게 물었다.
“말을 다뤄 본 경험이 있나?”
“있습니다. 조랑말이긴 하지만. 그런데 뜬금없이 말은 왜요?”
“밖에 흰 말이 하나 있을 거다. 먹이를 주고 잘 보살펴 주도록 해. 말을 잘 듣는 녀석이니 다루는 데 어렵지 않을 거야.”
“알겠슴다.”
“저도 도울게요.”
준은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마리가 있다면, 유사시에 마법으로 도움을 줄 것이다.
두 사람이 말을 보살피는 사이, 준은 진료에 들어갔다.
곁에서 보조하던 아그네스는 도통 환자의 상태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얼마 전 준이 만든 스캐너에 시선이 쏠렸다.
“선생님. 일단 스캐너로 검사를 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 전에 어디에 이상이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게 좋아. 검사는 그 이후에.”
“일단 외상은 없는 거 같은데…… 흐응, 전혀 모르겠어요. 의식이 없어서 문진을 할 수도 없고. 난감하네요. 어떤 상황이었어요?”
“이 환자는 발견 당시 쓰러져 있었고, 심장이 멎고 호흡도 없었다. 창백하고, 입술은 파랗게 질렸지. 그렇다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
“순환계일 확률이 높아 보여요. 입술에 나타나는 청색증이 단서고요.”
아그네스는 원하는 답변을 내놓았다. 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친구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보자. 검사는 그때 해도 늦지 않을 거야.”
“별일 없겠죠?”
“그러길 바라야지.”
그때, 준의 시선이 청년의 가방으로 향했다. 화려한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곧 아그네스도 준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아그네스. 지금 가서 네 아버지를 모셔와. 여쭤볼 게 있으니 최대한 서둘러라.”
“예!”
대강 눈치를 챈 아그네스가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진료소를 뛰쳐나갔다. 시골 마을 출신인 그녀가 봐도 이 청년은 고귀해 보였다.
인간의 기품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으니까.
* * *
“어떻습니까?”
“으음.”
문양을 본 바이런의 표정이 굳었다.
준은 그가 그 문양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 확신했다. 아예 몰랐다면, 이 정도로 걱정스러운 표정이 나오진 않았을 테니.
“분명 사우던 가문의 상징이야.”
“사우던 가문이라면……?”
“현재 켈세타를 거점으로 주변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가문이지. 유서 깊은 가문은 아니지만, 재력을 바탕으로 최근 세를 떨치고 있는 가문이다.”
그래서 몰랐던 건가.
유서 깊은 가문이 아니라면 과거에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더라도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준은 일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보통 이런 상황은 좋은 경우가 없다. 귀족이라면 서열 등 각종 이권이 얽힌 다툼이 치열할 테니까.
역시나 바이런이 그 부분을 지목했다.
“가문의 징표를 소유했다면 가주의 친족일 가능성이 크다. 나이를 본다면 아들일 수도 있겠군.”
“구성원이 어떻게 됩니까?”
“아들 둘에 딸 하나. 내 기억이 맞다면 바스티엔 공자가 장남이고, 세사르 공자가 차남이야.”
“그렇다면…….”
“얼추 그림이 그려지지? 후계 경쟁이 시작되어 무슨 변고가 생겼을 가능성이 커. 그러지 않고선, 귀족가의 자제가 수행도 없이 혼자 이 먼 곳까지 왔을 리는 없겠지.”
바이런은 고개를 휘저었다. 만약 젊은 청년이 멀쩡한 몸으로 마을에 왔다고 해도 그 자체만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다 바이런이 뭔가를 떠올리고는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래! 맞아. 장남인 바스티엔 공자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다고 들었네. 심장이 안 좋다는 소문도 있었고. 아무래도 그쪽인 거 같은데?”
“예. 발견했을 당시 순환계에 이상이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난감하군. 어때. 치료할 수 있겠나?”
“아직 정확한 병명은 모릅니다. 진찰을 하지 않아서……. 하지만 위기는 넘겼으니 깨어날 겁니다. 치료 계획은 그 이후에 세워야지요.”
바이런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준이 허둥댔다면 눈앞이 캄캄해졌을 것이다.
“여기에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네. 알지? 화가 난 영주가 트집을 잡고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어.”
“환자는 두 발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겁니다. 의지만 있다면.”
“그렇게 끝난다면 천만다행이지만…… 아무튼 선생의 어깨에 우리 마을의 운명이 걸렸다는 걸 부정할 순 없겠군.”
사우던 가의 가주인 드뇌르 백작은 성정이 거칠기로 유명하다. 사업 수완도 좋고 정치력도 있어 단기간에 가문을 중앙 무대에 세울 수 있었다.
가장 무서운 건 역시 재력이었다.
돈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지만, 사람의 목숨도 앗아갈 수 있기 때문에.
벌컥!
그때 문이 격하게 열렸다. 아그네스였다. 숨을 헐떡인 그녀의 모습을 보곤 바이런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설마?
“지금 환자분 깨어나셨어요!”
“다행이군. 이제 내가 나서지. 신분을 확인하고 지위에 맞게 대우를 해야 해.”
바이런이 즉시 움직였지만, 준이 그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여기는 귀족들의 살롱이 아닙니다. 치료가 우선이지요. 그는 귀족이기 이전에 환자니까.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잊지 말게. 자네의 행동 하나에 마을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걸.”
바이런의 걱정을 뒤로한 채, 준은 아그네스와 함께 진료실로 내려갔다.
청년이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이 가까이 다가와 그림자를 만들자, 그 멍한 눈이 옆으로 움직였다. 공허해 보였다.
“여긴, 어딘가?”
자연스러운 하대. 그러나 어투에 격식이 묻어 있다. 준도 격식을 갖추며 대답했다.
“여긴 누아 마을의 진료소입니다. 귀하께서는 마을 근처 숲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계셨습니다. 호흡과 심장이 정지해 응급처치를 시행했고, 피치 못하게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그런가.”
“충성스러운 부하를 두셨더군요.”
“부하라니? 나는 혼자…….”
그제야 준이 꺼낸 ‘부하’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청년이 고개를 숙였다. 피식, 자조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괜한 짓을. 그냥 그대로 죽게 두었으면 좋았을 걸.”
“예?”
아그네스가 깜짝 놀랐다. 귀족의 입에서 쉽게 들을 수 없는 한마디였으니까.
생각보다 얽힌 일이 많아 보였다. 준은 아그네스가 들고 있던 빈 차트를 슬쩍 뺏었다. 그제야 아그네스가 정신을 차렸다.
“소개가 늦어 송구합니다. 저는 누아 마을의 치유사, 강준입니다. 치료를 위해 귀하의 성명을 듣고 싶습니다만.”
“나는…….”
청년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준은 재촉 없이 그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사우던 가의 바스티엔이다.”
당차게 한마디를 내뱉은 그가 고개를 들며 준과 눈을 마주했다. 바스티엔은 기세를 올렸지만, 준의 온화한 눈빛을 누를 수는 없었다.
“치료를 위해서 내 이름을 물었다고 했는가.”
“그렇습니다.”
“그대의 수고스러움을 덜 수 있어서 기쁘군. 치료는 됐다. 난 치료받을 가치가 없는 인간이니까.”
충격적인 한마디에, 순간 진료실에 정적이 깔렸다.
* * *
바스티엔 공자는 입원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치료를 거부했지만, 그는 며칠 쉬어 가기를 원했다. 준은 흔쾌히 허락했다.
허름한 입원실이라 불편한 기색을 보일 만도 했는데 바스티엔 공자는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혹시 몸이 불편하시면 이쪽 벨을 누르시면 됩니다.”
준이 침상 위에 있는 빨간 벨을 가리켰다. 마법공학을 이용한 도구로, 벨을 누르면 진료실에 신호가 가게끔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바스티엔 공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대 이름이 준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만.”
“내 병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나?”
바스티엔 공자의 질문은 진지했다. 아그네스는 귀족을 이렇게 가까이서 대하는 건 처음이라 긴장했지만, 준은 반대였다. 여유가 넘쳤다.
“워낙 상황이 급해 허락을 구하지 못하고 귀하의 몸에 손을 댔습니다만, 진찰은 하지 않았습니다. 양해를…….”
“그대에게 무어라 하는 게 아니다. 나는 다만…….”
바스티엔 공자가 말을 끊고 고개를 숙였다.
“아니, 됐다.”
몸이 안정된 이후로 그는 더욱 우울해졌다. 치료받을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강하게 쏘아붙인 그때의 기백도 옅어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준은 그것보다 바스티엔 공자의 병명이 궁금했다. 대체 어떤 병이기에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의 희망을 앗아간 걸까.
“사우던 가에 기별을 넣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라. 조용히 쉬었다 가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시길.”
준은 병실을 나섰다. 뒤따라 진료실로 돌아온 아그네스가 그제야 묵혀둔 질문을 꺼냈다.
“어떤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치료를 적극 권유해서 도와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글쎄.”
“선생님이라면 낫게 할 수 있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고 결론지은 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이 낫는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야. 아무래도 마음까지 병들어 있는 것 같거든.”
“마음까지요?”
“오랜 지병은 마음까지도 병들게 한다. 그게 해결되지 않으면 치료한다 한들 별 의미가 없겠지. 지금 그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도 모르고. 그에게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준은 늘 보던 두꺼운 책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