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폭풍 속으로 (1)
딸랑―
진료소의 문이 열리자 아그네스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어머, 펜터 아저씨. 좋은 아침이에요. 요즘 왠지 자주 오시는 거 같네요?”
“흥, 자주는 무슨. 딱 세 번째다. 세 번째!”
신경질적으로 대꾸한 펜터가 주변을 기웃거렸다. 아무래도 준을 찾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너희 선생은?”
“아직 진료 시간 안 돼서 2층에 계실 거예요. 급하시면 불러 드릴까요?”
“일 없다. 괜히 일찍 온 사람 잘못이지. 크흠.”
펜터는 인상을 쓰며 대기실에 앉았다. 팔짱을 끼고 허리를 곧추세운 모습이 무언가를 단단히 따지러 온 사람 같아 보였다.
그만큼 고집스러운 사람이었다.
왕년에는 켈세타 공방에서 그를 초청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다는데, 결국 그는 고향에 남았다. 마을에도 할 일이 많다면서.
그런 그를 보며 아그네스는 늘 존경심을 품었다. 신념이 그만큼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혹시 어디 편찮으신 거예요?”
“신경 끄고 청소나 마저 해.”
“오신 김에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예끼! 인석이.”
“하하하하.”
잠시 후 계단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준이 내려왔다. 아그네스가 꾸벅 인사했고, 펜터는 헛기침을 했다.
정착을 결정한 이후로 준의 얼굴엔 더욱 여유가 생겼다.
“잠깐 못 본 사이에 신수가 훤해졌군.”
“덕분입니다.”
“내가 뭐 한 일이 있다고? 어때. 키트는 다 제작이 끝났나?”
“이따 오후에 자경단 본부로 가서 배급을 할 계획입니다. 마침 잘 오셨네요. 드릴 게 있는데.”
준은 진료실로 들어가 응급처치 키트를 하나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펜터에게 건넸다.
“이건 펜터 씨에게 드리려고 따로 준비해 놓은 겁니다. 필요할 때 쓰십시오.”
“쓸데없는 짓을! 내가 이걸 쓸 일이 뭐가 있어? 하나라도 아꼈다가 단원들 주는 게 나아. 도로 가져가!”
하지만 준은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처음부터 펜터에게 주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재료를 채집하거나 작업 중에 부상을 입으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때 도움이 될 겁니다.”
“장인에게 상처와 흉터는 훈장 같은 거지.”
“이것도 훈장이지요. 펜터 씨가 만들어 주신 상자가 이렇게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기념품이라고 할까요? 첫 생산품을 전시해 놓는 곳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까지 얘기해 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펜터는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한다면야 뭐 받아야지. 둘 데도 없는데 난감하군.”
결국 펜터는 준이 건네는 키트를 받아들었다. 그가 상자를 열자 준이 하나하나 설명을 하며 약재의 사용 방법을 알려주었다.
대충 흘려들으며 펜터가 물었다.
“보나 마나 최하급 키트겠지?”
“중급 정도는 됩니다.”
“뭐?”
놀랄 만도 했다.
보통 치유사들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최하급이나 하급 키트. 중급은 상급 치유사들이 어렵게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급 키트를 대량으로 생산했다니.
펜터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준을 올려다보았다.
“자네 실력이 그렇게 좋았나?”
“펜터 씨에 비하면 잔재주 수준이지요.”
“허, 그런!”
도시에서 온 샌님인 줄 알았는데, 펜터는 준이 보통 샌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역시 그것을 표정에 드러내진 않았다.
준이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정착한다고 들었네만.”
“소문 한번 빠르군요.”
“작은 마을이니까.”
그렇게 툭 대꾸한 펜터가 허리에 차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열곤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작은 목재 조각상이었다.
정확히는 치유의 여신으로 알려진 엘레나의 전신상. 작지만 상당히 정교했다. 조각에 문외한이라고 해도 실력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뭐, 다른 뜻은 없고 정착 기념 선물이야. 부적으로 쓰든지 땔감으로 쓰든지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소중하게 보관하지요.”
말만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진짜 기뻤다.
절대자 시절엔 누군가에게 받는 모든 것에 반드시 대가가 따랐다. 퀘스트를 달성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얻은 거니까.
하지만 펜터가 준 조각상은 달랐다. 어떤 행위에 대한 대가라기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준은 조각상에 담긴 펜터의 마음을 가늠해 보았다.
「헐랭? 마스터. 이 조각상에 마법이 걸려 있는 거 같은데요?」
릴리의 한마디에 준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준은 마나를 조각상에 흘렸고, 릴리의 말은 사실이라는 게 입증됐다.
‘마력과 행운을 조금 올려 주는 효과가 걸렸군. 희한한 일이네.’
「그러게요. 마나 유저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마법을 부여하는 건 정말 로또 같은 일이죠. 음, 어쩌면…….」
‘어쩌면?’
「성격이 지랄 맞아서 그런 걸지도. 이 마을은 진짜 답이 없어요, 답이. 어휴! 진짜 우리 마스터 보살이라니까.」
준은 웃음을 참으며 조각상을 살폈다.
한편 그 모습을 흘겨본 펜터가 콧방귀를 뀌더니 간다, 하며 몸을 돌렸다.
“펜터 씨. 편찮으신 곳이 없으시더라도 나중에 한번 진찰받으러 오십시오. 답례를 하고 싶네요.”
“늙어서 죽으면 죽었지, 아파서 올 일은 없을 거야.”
“하하하. 알겠습니다.”
펜터가 바람처럼 사라지자 진료실로 돌아온 준은 조각상을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왠지 부적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펜터가 다녀간 그날 오후, 준은 직원들과 함께 직접 키트를 자경단 본부로 날랐다.
마침 자경단원 전원이 본부 밖에 도열해 있었다. 마을 청년 20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였지만, 역시 훈련이 잘되어 있어 정예 소대 느낌이 났다.
“아버지!”
아그네스가 힘차게 바이런을 불렀다.
단원들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하던 바이런은 적당히 말을 끊고 직접 마중을 나왔다.
“마침 다 나와 계셨네요. 선생님. 바로 나눠 드리면 되는 거죠?”
“그래. 사용법도 알려 드리고.”
“제가요?”
준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할 수 있을까 긴장했지만, 아그네스는 굳세게 마음먹고 자경단원들 앞으로 나갔다. 이미 하룬과 마리가 키트를 나눠 준 터라 바로 교육에 들어갈 수 있었다.
조금 떨긴 했지만 아그네스는 키트 사용법을 정확히 전달했다.
그 모습을 보던, 아니 정확히는 단원들이 들고 있는 키트를 바라보던 바이런이 피식 웃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중급 키트를 일주일도 안 돼서 이렇게 많이 만들었나?”
“펜터 씨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좋은 보관함이 생겨서 빠르게 만들 수 있었지요.”
“자네는 자신의 공을 남에게 돌리는 게 취미인가 보군.”
준은 빙긋 웃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보였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가끔은 공치사를 해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대화가 끊기자 바이런이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추가로 더 만든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그건 당분간 보류해도 좋을 것 같네. 이상하게 요 며칠 사이 몬스터들이 자취를 감췄어. 수호 정령들도 안 보이고.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조사 중이네만…….”
조사를 한다고 해도 원인을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준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니까. 레어 쪽은 볼카누스가 이미 손을 써 두었다.
“이 정도 품질의 상자라면 약재를 오래 보관할 수 있을 겁니다. 재고를 확보해 두는 게 여러모로 좋겠지요. 몬스터가 사라졌다고 다치는 사람이 없어지진 않을 테니까요.”
“그래 주면 고맙긴 한데, 아마 열 명 정도는 소집 해제가 될 거야. 곧 수확기니까.”
“참고하겠습니다.”
때마침 아그네스의 설명이 모두 끝나고 질문 시간이 시작됐다. 가끔 짓궂은 질문을 하는 단원들도 있었지만 별 탈 없이 보급이 끝났다.
“마리야. 잠깐 날 따라오거라.”
마리가 고개를 끄덕이곤 준 옆에 바싹 붙었다. 돌아갈 채비를 하던 아그네스가 그쪽을 주목했다.
“어디 다녀오시게요?”
“잠시 숲에.”
“조심히 다녀오세요. 저녁 전에 오셔야 해요. 오늘 솜씨 좀 발휘해 볼 생각이거든요.”
자경단에서 감사의 의미로 닭과 돼지고기를 선물했던 것이다. 준은 오래 걸리진 않을 거라고 말한 뒤 마리와 함께 마을을 나섰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그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실실 쪼개던 하룬이 팔꿈치로 그녀를 툭 쳤다.
“질투 나냐?”
“무, 무슨 소리니? 얘가 못하는 소리가 없네!”
찰싹!
등짝에서 시큰한 통증이 올라왔다. 뭘 해도 매를 버는 하룬이었다.
* * *
준과 마리는 한가롭게 숲길을 걸었다.
몬스터가 거의 사라진 터라 주변은 조용했다. 가끔 사슴이나 다람쥐 같은 야생 동물들이 기척을 드러낼 뿐이었다.
“키트 옮길 때 힘들지 않았어?”
“조금요.”
“그때는 마법으로 팔의 근력을 높이거나 물체를 가볍게 만들면 된단다. 기회가 되면 알려주마.”
“할 줄 알아요.”
마리가 준이 메고 있는 배낭에 손을 댔다. 마나가 흘러나왔고, 낮은 단계의 경량화 마법이 걸렸다. 준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알았지?”
“그냥 생각했어요. 어떻게 하면 가벼워질까. 그렇게 하다 보니까 방법이 떠올랐어요.”
문득 준은 궁금했다.
아까 키트를 옮길 때 마리가 마법을 썼다면 자신이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마법을 쓰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키트를 옮겼다.
그래서 물었다.
“왜 아까는 마법을 쓰지 않았니?”
“마법을 함부로 쓰지 말라고 하시기도 했고, 저만 가볍게 들면 언니랑 오빠한테 미안해서요.”
“착하구나.”
뜻밖의 칭찬에 마리가 수줍게 웃었다.
준은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느꼈다.
전에 마법을 자유롭게 써 보라고 했을 때부터 그랬다. 마리는 힘에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유념하고 있었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까지 갖췄다.
이런 아이가 나중에 대마법사가 된다면 조금은 살기 좋은 세상으로 바뀌지 않을까?
「모르죠. 착한 사람도 힘에 눌려 악인으로 변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그래도 처음부터 악한 사람들보단 낫겠지.’
「마스터는 참 속 편하게 사는 것 같아서 부럽네요. 휴…….」
릴리가 다시금 존재를 감췄고, 곧 두 사람이 걸음을 멈췄다.
준은 메고 있던 가방에서 둥그런 장치를 꺼냈다. 아공간 창고에 남아 있던 위성이었다. 마리에게 마법공학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서 특별히 준비했다.
“이건 마법공학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다.”
“마법공학이 뭐예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장치나 기계에 마법을 부여해서 여러 기능을 활용하는 기술이야. 마법 전구는 빛을 밝히고, 마법 날개는 하늘을 날 수 있게 해 주지. 그리고 이건, 높은 하늘에서 지상을 관찰할 수 있는 기계다.”
마리는 눈을 반짝이며 준의 말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사사삭!
뒤에서 풀숲을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뛰쳐나온 건 몬스터도, 야생 동물도 아닌 건장한 백마였다. 말이 준과 마리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주인이 있는 말 같은데?’
안장과 고삐를 확인한 준이 손을 뻗었다.
마나를 일으켜 말의 질주를 막으려던 그 순간, 말이 울음소리를 내며 스스로 뜀박질을 멈췄다. 그러곤 준 앞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뭔가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따라와 보라는데요?」
릴리의 전언에 준이 말의 고삐를 잡고 진정시켰다. 말은 준의 가슴에 코를 비비곤 돌아서더니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따라가 보자.”
두 사람이 말의 뒤를 쫓았다.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니 말이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 원 안에는 창백한 피부의 젊은 청년이 쓰러져 있었다.
재빨리 달려간 준이 청년을 살폈다.
“호흡도 없고, 심장도 멈췄어. 얼마나 이렇게 방치된 거지?”
심정지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치료한다고 해도 예후가 좋지 않다.
그래도 청년이 쓰러진 장소가 멀지 않고, 또 말이 바로 달려온 것이라면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거라고 판단했다.
준은 즉시 청년의 상의를 뜯었다. 그리고 양 손바닥을 가슴에 댔다.
“마리, 물러서!”
파지직!
손바닥에 응집된 마나가 전기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