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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25화 (25/175)

25화 준, 결정하다

다음 날 아침, 진료실로 내려온 아그네스를 본 준은 깜짝 놀랐다. 그녀의 눈이 토끼처럼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기 때문에.

“눈이 왜 그래?”

“아, 밤새 책 읽느라 그런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또 공작가 막내아들 시리즈인가.”

아그네스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준에게 건넸다. 준은 진지하게 책 제목부터 훑었다.

“‘전설의 마족’이라. 흠, 꽤 진부한 제목인데. 요즘은 이런 제목이 잘 먹히나?”

“당근 옛날 책이죠. 요즘 유행에 맞추려면 ‘우리 삼촌은 마계스타’정도는 돼야지. 그거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보셨던 책인데, 잠깐 빌렸어요.”

“갑자기 마족은 왜?”

“어제 그 상처, 마족에게 당한 거라고 하셨잖아요.”

어제 그 상처라면 볼카누스가 입은 상처를 말하는 것이리라.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들었다.

“마족 같은 거 책에서만 봤는데 궁금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그래서요. 할아버지한테 여쭤보니 그 책을 주셨어요.”

“그렇군.”

준은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마족을 묘사한 그림과 서술이 가득 있었다. 하지만 이 중 대부분은 틀렸다. 인간의 상술과 상상력이 가미된 것이 많았다.

책에선 마족을 독한 악마로 묘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준이 상대한 마족은 인간과 거의 흡사했다. 그들은 순수한 악을 추구했고, 철저한 신념 아래 움직였다. 품격은 덤이었고.

“어떤 현상이나 상황을 판단할 때는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하는 게 좋아.”

“예?”

“마족에게 당했다는 건 다른 의미도 있다는 말이야. 마족이 남긴 물건, 혹은 장치, 혹은 독에 당해도 저런 상처를 입을 수 있지.”

“아? 그럼…….”

“그래. 마족은 존재하지 않아. 그들이 남긴 유산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을 뿐. 저주받은 검이라든지. 그게 고위 사제들이 존재하는 이유기도 하고.”

“뭔가 허무하네요. 휴, 밤새 읽었는데.”

하지만 아그네스라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견습생이라면 가지지 않는 그런 특별함이.

책장을 넘기며 아그네스가 표시한 부분을 확인한 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엉터리지만 저주 치료법이 적힌 부분이었다.

곧 준은 책을 덮고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여기에서 치료의 실마리를 찾기는 어렵다. 잘못된 내용이 많거든. 그 친구를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곁에서 잘 지켜보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자신의 노력을 알아주는 준이 고마웠다. 아그네스는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딸랑―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하룬은 이미 수련을 하고 있었기에, 손님인가 싶어 아그네스가 달려나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환자는 아니었다.

왜소한 체구의 그는 누아 마을에서 소문난 목수인 펜터였다. 주점을 운영하는 호프만과 비슷한 연배의 사내로 신경질적이지만 세심한 손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어머, 아저씨.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

“그럴 리가 있나? 평생 약 한 번 안 먹어 본 몸이시다.”

“그래도 이제 슬슬 몸 생각도 하셔야죠. 보약이라도 한 재 지어 드려요?”

“이 녀석이 이제 나한테까지 장사를?”

“헤헤. 당연히 농담이죠.”

아그네스의 웃음에 펜터의 노기가 풀어졌다. 지금은 훌쩍 컸지만, 아그네스가 걸음마를 뗄 때 가장 좋아했던 게 펜터이기도 했다.

그만큼 그녀는 마을에서 소중한 존재였다. 모두의 딸이거나 손녀인 존재.

“크흠, 다른 게 아니고 여기 선생이 며칠 전에 주문한 게 있어서 말이야. 그거 전해 주러 왔지. 바깥에 있는 수레에 잔뜩 실어 놨으니 확인해 봐.”

“그럼 미리 말씀해 주시지 그랬어요. 여기에 힘만 센 바보가 하나 있어서 보내면 되는데.”

“끌끌끌. 하룬 녀석 말이냐? 요새 녀석 훨훨 날아다닌다며?”

“독침 맞은 게 부끄러워서 그렇죠 뭐. 아무튼 잠깐만요. 선생님!”

곧 준이 진료실에서 나와 제품을 확인했다.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목제 상자였는데, 안에는 제법 촘촘하게 칸이 나뉘어 있었다.

나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봐도 꽤나 정성스럽게 만든 티가 났다. 조립법도 그렇지만 원재료 자체도 꽤 품질이 좋았다.

상자를 열어본 아그네스가 살짝 놀랐다.

“혹시 이거 응급처치 키트에 쓸 상자인가요?”

“그래. 펜터 씨가 나무를 다루는 솜씨가 좋다고 들어서 특별히 부탁했지.”

“책만 보는 샌님일 줄 알았는데 제법 잘 아는군. 상단 놈들 거 사봐야 금방 내용물이 변하고 안 좋아. 원자재를 나쁜 걸 쓰니까. 이건 최상품이라고. 나무도 직접 해서 가공한 거고.”

“감사합니다. 이 정도라면 믿고 약품을 보관할 수 있겠군요.”

준은 주머니에서 은화 두 개를 꺼내 펜터에게 건넸다. 약속된 금액이었지만 펜터는 두 개 중 하나만 낚아챘다.

“나머지는 약값에 보태. 우리 지켜 주느라 단원들이 고생하는데 그 정도는 도와야지. 녀석들한테 괜한 이야기는 하지 말고. 흥.”

펜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료소를 떠났다.

세상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고집이 세고 사회성이 없지만, 묵묵히 자기 분야에서 대성하는 사람들도 그중 하나다.

‘이런 작은 마을에도 장인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있구나.’

싱겁게 웃은 준이 남은 은화 하나를 엄지로 퉁겼다. 은화가 궤적을 그리며 아그네스에게 날아갔다.

아그네스는 깜짝 놀라며 은화를 잡으려 버둥거렸지만 이마에 툭 부딪히고는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너무해.”

“펜터 씨 말 들었지? 그 돈으로 모자란 약재를 충당해라.”

“근데 이렇게 큰돈을 막 저한테 맡겨도 되는 거예요? 몰래 군것질이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부유함은 상대적인 거야. 마음대로 해.”

준은 수레를 한쪽에 세워두고 진료소 안으로 들어갔다. 손에 쥔 은화를 바라보던 아그네스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작가 막내아들이 아니면…… 역시 후작가 막내아들일까?”

* * *

아그네스와 하룬이 키트 제작에 필요한 것들을 창고로 옮기는 사이, 준은 2층으로 올라가 마리의 연습실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안으로 들어간 준은, 눈 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을 잠시 감상해야 했다.

마치 드넓은 바다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수면 위에는 커다란 함선이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수면 아래에는 각종 물고기들에 떼를 지어 해초 사이를 누볐다.

바닷속 생태계가 단면으로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다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마리가 이런 풍경을 스스로의 힘으로 제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속성에 대한 감응력이 상당히 높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때 마리가 오른손을 움직였다.

촤악!

준의 눈앞으로 커다란 청새치가 수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너무 현실감이 뛰어나 보통 사람이 봤다면 기겁을 하며 주저앉았을 것이다.

“훌륭하구나.”

“다 스승님 덕분이에요.”

준이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 모든 사물이 입자가 되어 흩어졌다. 마리도 더 이상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으니, 슬슬 다른 걸 가르쳐 주마.”

마리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준이 마나를 전개하자 주변의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방 안이 아니라 드넓은 초원이었다. 마리는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곳은 준의 아공간 창고였다. 정확히는 아공간 창고 중 비어 있는 공간.

“여기에서는 마음대로 마법을 써도 된단다. 오늘은 공격 마법을 가르쳐 주마. 우선 마나를 단단히 모은다는 느낌으로.”

준이 손을 펼치자 푸른 마나가 손바닥에 응집됐다. 그는 손을 가볍게 털었고, 마나가 쏜살같이 날아가며 바위를 박살 냈다.

“기본 공격 마법인 에너지 볼트(Energy bolt)다. 한번 해 보겠니?”

“네.”

마리는 준을 그대로 따라 했다.

우선 손바닥에 마나를 모았다. 그런데 그녀는 조금 다른 걸 해 보고 싶었다. 마음대로 마법을 써도 된다고 했으니까.

마리는 뜨거운 느낌을 떠올렸다.

순간 손바닥에 맺힌 마나가 작은 불덩이로 변했다. 마리는 오른손을 뻗었고, 불덩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갔다.

퍼엉!

화염이 튀며 바위를 깔끔하게 박살 냈다. 이번에 마리는 차가운 느낌을 떠올렸다. 왼손에 모인 마나가 얼음 창으로 변했다.

그렇게 공격 마법이 계속 쏟아졌고, 주변에 있던 사물이 모조리 산산조각이 났다.

공격 마법을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마리는 속성 전환 기술까지 완벽하게 습득했다. 이제는 마나를 원하는 모양과 속성으로 바꿀 수 있게 됐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습득 속도였다.

그 광경을 몰래 지켜보던 릴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히야…… 내일이면 미티어 스웜(Meteor swarm)도 문제없겠네요.」

콰광!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공을 가르던 불덩이가 땅으로 내리꽂혔다. 다행히 운석은 아니었고, 조금 크기가 큰 화염구였다.

그렇게 계속될 것 같았던 마법의 향연은 얼마 가지 않아 멈췄다.

사실 마리는 얼마든지 마법을 난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팔을 내렸다.

모든 힘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준의 한마디가 떠올랐던 것이다.

* * *

마법 수련을 끝낸 준은 아그네스와 하룬, 그리고 마리를 불렀다. 그리고 세 사람에게 키트 제작을 맡겼다. 제조법은 아그네스에게 전수했다.

그리고 잠시 후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볼카누스가 나타났다.

“왔어?”

“친한 척하지 마라. 정든다.”

“정들면 좋은 거지.”

볼카누스가 입을 씰룩이며 의자에 앉았다.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다면 말빨로 누르고 싶은데, 준에게는 그조차 무위였다.

진료실을 둘러본 볼카누스가 물었다.

“흐음. 그 견습생 나부랭이는?”

“지금 창고에서 응급처치 키트 만들고 있다. 모두 달라붙어서 일하고 있지. 곧 자경단에 배급할 생각이라서.”

“오지랖은. 어차피 이제 몬스터들도 많이 안 나오잖아?”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거 없지. 몬스터가 없다고 무기를 놓으면 이 세상엔 전쟁 하나 없이 평화로울 거다.”

어차피 앞으로 견학할 기회는 많기에, 준은 아그네스를 치료에서 빠지게 했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키트를 만드는 게 그녀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볼카누스는 상의를 벗고 얌전히 침대 위에 누웠다. 준은 어제처럼 다시 마나를 일으켰고, 최상급 치유마법이 볼카누스의 상처를 보듬기 시작했다.

“어어. 좋다.”

마치 사우나에 들어간 노년의 사내를 떠올리게 하는 신음이었다.

“회복이 상당히 빠른데? 이 정도라면 석 달도 안 걸릴 것 같다.”

“근데 말이다. 진짜 대가 없이 치료해 주는 거 맞지? 나중에 멱살 잡고 막 드래곤 하트 내놔라, 이런 거 아니지? 엉?”

“하하하하. 그런 거 줘도 안 가져.”

그것도 사실이었기에 볼카누스는 입맛만 다셨다.

치료를 마친 준은 직접 준비한 약재를 포장해 볼카누스에게 넘겼다.

“약은 먹을 만하나?”

“인간이 만든 게 입에 맞을 리 없지. 쓰고 맛없다.”

“참고 마셔. 드래곤 체면이 있지.”

“쳇!”

볼카누스는 다시 레어로 돌아갔다. 어제보다는 걸음걸이가 좀 더 나아진 것 같았다.

준이 다시 진료소로 들어가려는 그때 뒤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지낼 만한가?”

촌장 아론이었다.

* * *

준은 저녁 식사 초대를 받고 아론의 집으로 향했다.

들어가니 빵과 수프가 준비되어 있었다. 준은 왠지 반가웠다. 자신이 처음 촌장의 집에 묵었을 때 먹었던 저녁과 같은 메뉴여서.

빵은 여전히 맛있었고, 수프는 풍미가 좋았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아론은 직접 차를 준비했다. 그것도 예전에 마셔 봤던 그 차였다.

“자네 얼굴을 보니 재미가 좋은 모양이야.”

“그렇게 보입니까?”

“확실히 얼굴이 폈어. 처음 봤을 때는 뭔가 무미건조했는데, 이젠 나름 생기가 돌고 있다네.”

문득 언젠가 릴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요즘 얼굴이 활짝 편 것 같다고.

“재미있는 곳입니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느낌이고요. 이제 아무것도 이룰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느끼는 게 제법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일이 있었다.

아그네스와 하룬을 만나 진료소를 꾸렸고, 두 사람은 착실하게 성장하는 중이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로 마리의 금제를 치료했고 나아가서는 볼카누스를 만나게 됐다.

‘왠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미심쩍은 부분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준은 의심을 거뒀다. 필연이든 운명이든 상관없다. 어떤 일이 닥친다고 해도 그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라면.

준의 기색을 살피던 촌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마음은 정했나? 정착하는 거.”

준은 윤회의 사슬을 끊은 이후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았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재미있다.

그리고, 이곳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

“진료를 마치고 가끔 차를 얻어 마시러 와도 괜찮겠습니까?”

“허허허. 얼마든지 환영하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미소를 지은 준은 찻잔을 들었다. 오래도록 기억될 은은한 향이 코를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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