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24화 (24/175)

24화 조금은 특별한 환자 (2)

로브를 걸친 남자가 홀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시뻘건 머리카락과 신경질적인 인상을 후드로 절묘하게 가리면서.

그는 바로 레드 드래곤 로드 볼카누스였다.

거동이 불편해 보였는데, 절뚝거리던 그가 갑자기 가던 길을 멈췄다.

때마침 옆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볼카누스는 그곳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가쁜 숨을 진정시켰다.

‘젠장. 상처가 생각보다 깊어.’

묵직한 통증이 배와 허벅지에서 느껴졌다. 오심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볼카누스는 이를 악물고 버텨 냈다.

‘이러다 적이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신마전쟁은 끝났지만, 그것은 준의 입에서 끝이 났을 뿐이었다. 언제 어디서 잔당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힘이 온전했다면 코웃음을 칠 일이었다. 어떤 놈이 오든 한판 해 볼 만하다고.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마나를 잃은 상황이었고, 마나를 회복하기 위한 육신 또한 온전치 않은 상태였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마족에게 입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망할 자식! 알려줄 거면 좀 자세히 알려줄 것이지. 도대체 진료소는 어디에 있는 거지? 분명 이쯤이라고 했는데.’

그때 볼카누스의 두 눈에 진료소로 추정되는 건물이 잡혔다. 낮은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다고 했으니 분명 저곳이 맞을 것이다.

‘흐음, 어떻게 하지? 역시 레어로 돌아가는 게 나을까?’

볼카누스는 그 와중에 한참이나 고민했다.

레어에서 자기 발로 나온 것도 놀라운데, 인간으로 변해 마을 안으로 들어온 것 자체도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신중했다.

‘그래도 놈이 치료해 줄 때는 참 좋긴 했지. 노곤노곤한 게 아주 편했어.’

준이 자신에게 치유 마법을 시전했던 그때를 떠올렸다. 전직 절대자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치유술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적의가 없었고, 심지어 절대악 케이아스의 정수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게 없었더라면 그의 말을 모두 믿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볼카누스는 걸음을 옮겼다.

준이 레어에서 남겼던 마지막 말이 자꾸 그의 발걸음을 진료소로 향하게 했다.

‘진짜……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

가족들이 그립기도 했고, 우두머리로서 구성원들의 안위를 살펴야 했다. 자신은 레드 드래곤의 로드였으니까.

치료가 잘 되어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볼카누스는 준의 진료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쉬이 발을 들이진 못했다.

인간의 거주지에 들어오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거기에 또 다른 위협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그때였다.

“어머, 어떻게 오셨어요?”

마침 빨래를 걷고 있던 아그네스가 친근히 다가왔다. 볼카누스는 반사적으로 드래곤 피어를 뿜으려고 했지만, 내상이 꿈틀거려 그러지 못했다.

“혹시 선생님을 뵈러 온 손님이신가요?”

아그네스는 하룬에게 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단 머리카락과 인상착의를 듣지 않더라도, 이렇게 수상하게 로브를 걸치고 나타난 중년의 사내를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볼카누스가 최대한 위엄을 갖추며 말했다.

“강준을 만나러 왔다.”

“그러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다리고 있었다고? 나를?”

“선생님께서 손님이 오실 거라고 하셨거든요. 붉은 머리카락은 이 마을에서 흔하지 않아서, 손님이신 걸 척 보고 알았죠. 헤헤.”

해맑게 웃는 아그네스를 보던 볼카누스는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해야 하나.

단순히 진료소의 처마가 따가운 햇볕을 가려주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신기한 진료소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음, 그러지.”

곧 볼카누스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준은 보던 책을 덮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크흠.”

“앉아. 거기에.”

곁에서 보조하던 아그네스는 두 사람이 굉장히 친한 사이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준이 이렇게 편하게 말을 하는 것은 처음 보니까.

그런데 볼카누스를 보면 꼭 그런 거 같지도 않았다. 친구를 만나러 왔다기엔 너무 어색했고, 그의 눈빛엔 여전히 의구심이 담겨 있었다.

볼카누스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물었다.

“정말 내 상처를 치료할 수 있나?”

“치료할 수 없는 환자를 병원으로 부르는 치유사도 있나?”

“흐음.”

“석 달이면 다 나을 수 있다. 그러면 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준이 장담하자 볼카누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석 달.

영겁의 세월을 사는 드래곤의 입장에서는 실로 잠깐의 시간이었다.

“좋아. 치료를 받도록 하지. 그런데 저 아이는 물리는 게 좋지 않나?”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사실과, 상처가 마족에게 당한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력이 좋은 친구야. 빨리 회복하고 싶으면 그 부분은 양보해.”

“알았다.”

“그럼 이쪽으로 누워. 아그네스. 뜨거운 수건 좀 준비해 주고.”

“예, 선생님.”

아그네스는 평소보다 신중히 수건을 준비했다. 환자에 따라 차별을 두면 안 되는 거지만, 준의 지인이라니 왠지 신경이 쓰였다.

수건을 쟁반 위에 놓고 돌아서니 준은 벌써 볼카누스의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볼카누스는 상의를 완전히 벗었고, 바지는 허벅지 위로 끌어 올렸다.

가까이 다가와 상처를 확인한 아그네스가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쟁반을 놓쳤다.

“꺄앗!”

진보랏빛으로 물든 상처는 징그럽게 곪아 있었다. 썩어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넌 지금 아무나 할 수 없는 진귀한 경험을 하고 있는 거야. 두 눈 뜨고 똑바로 상처를 봐. 어서.”

준이 채근하자 아그네스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상처를 살폈다. 흉측하고 역했지만 상처의 특징을 꼼꼼히 파악했다. 어떻게 곪고 갈라졌는지.

눈에 익고 나니 조금 역한 기운이 가셨다.

아그네스는 입을 막던 손을 치웠다. 왠지 아픈 사람을 앞에 두고 실례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 이건 대체 어떤 상처인가요? 중독인가요?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했어요.”

“그럴 만하지. 이건 일종의 저주다.”

“저주요?”

“그래. 마족에게 당하면 상처가 이렇게 되지. 중독된 것처럼 통증이 있다가 살은 물론, 나중엔 뼈까지 썩어들어 간다.”

마족이라는 말에 아그네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만약 하룬이나 다른 사람이 그런 얘길 했다면 무슨 농담이냐며 흘러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준은 늘 진지했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직설적이기도 했고.

“마족이…… 정말 존재하는 거예요? 전설에만 나오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지. 아무튼 지금 묻기엔 적당한 질문이 아닌 거 같은데? 치료에 집중해.”

“아, 예! 수건 다시 준비할게요.”

다행히 아그네스는 성실했다. 자신의 궁금증을 먼저 해결하는 것보다 환자의 치료를 우선시했다.

준은 볼카누스의 상처에 손을 올렸다.

우선 병의 진행을 막아야 했기에, 한쪽 부위만 집중하는 것보단 양쪽 모두를 고르게 치료하기로 했다.

우우웅!

준의 손에서 청량한 마나가 쏟아졌다. 최상급의 치유 마법이 볼카누스의 상처를 포근히 감쌌다.

“으음…….”

“어때?”

“나쁘지 않다.”

“좋아. 이런 식으로 한 달 정도 치료를 하고, 나머지 기간엔 약으로 치료할 생각인데, 괜찮나?”

볼카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든 그가 입을 열었는데, 아그네스를 힐끔 보고는 그 질문을 전음으로 대신했다.

― 그런데 넌 왜 날 돕는 거냐? 나를 돕는다고 해서 아무런 이득이 없을 텐데?

― 그냥 불쌍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대답에 볼카누스는 당황하더니 급기야 진노했다.

― 뭣이? 정녕 그게 다냐!

― 전에도 얘기한 거 같은데. 마음 곱게 쓰라고. 그래야 빨리 낫는다. 의심 같은 건 하지 마. 스트레스는 만병의 원인이다.

― 네놈의 그런 행동 자체가 나한테는 스트레스지!

― 하하하하.

준은 오랜만에 유쾌한 기분을 느꼈다.

얼굴 한 번 본 적은 없지만, 한때 같은 적을 상대한 사이였다. 그래서인지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곧 치료가 끝나고 준은 아그네스가 준비한 뜨거운 수건을 상처 위에 올려두었다. 근육이 풀어지며 노곤한 느낌이 들었다.

아그네스가 새 차트를 들고 왔다.

“환자분. 앞으로 계속 치료를 받으셔야 하니까 몇 가지 여쭤볼게요. 성함은요?”

“볼카누스.”

“나이는요?”

“5천 2백…….”

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볼카누스가 헛기침을 하며 정정했다.

“52살이다.”

“그렇군요. 전에 앓았던 병이라든지, 다른 불편한 곳은 없으시고요?”

“없다.”

기본 정보를 옮겨 적은 아그네스가 간단히 주의사항을 전했다. 가려야 하는 음식과 술, 담배 같은 것을 조심하라는 일반적인 설명이었다.

곧 그녀는 준이 처방한 대로 약초를 배합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드는 과정이라, 준과 볼카누스는 눈빛을 교환하더니 진료소를 나섰다.

볼카누스의 거동은 훨씬 편안해 보였다.

밖으로 나온 그는 상체를 천천히 돌리며 자신의 변화를 느꼈다.

“실력이 대단하군. 은퇴하긴 했어도 역시 전직 절대자라 이건가?”

“과찬이다. 소소한 실력이지.”

“기만 떠는 것도 제법이고. 역시 절대악 그놈이 나가떨어질 만한 이유가 있었군. 근데 넌 왜 은퇴한 거냐? 신의 대리인이 윤회의 사슬을 끊은 건 처음 듣는 일이다.”

“그래서 나를 믿지 못했던 거군.”

“그것도 그렇고, 뭐, 힘센 놈들은 보통 이렇게 친절하지 않으니까. 크흠.”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강한 사람들은 이유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은퇴한 자신은 이유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쉬고 싶었다. 그뿐이야.”

“허, 쉬고 싶다고? 거참 기가 막힌 이유로군. 그런다고 영생을 포기해?”

“다 부질없는 일이지.”

준은 말을 아꼈다.

오천 년을 살아온 볼카누스였다. 아무리 몸 상태가 안 좋다고는 해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둘은 말없이 들판 너머를 바라보았다.

주변 풍경을 둘러본 볼카누스는, 이 마을의 풍광이 제법 괜찮다고 느꼈다. 평화롭고 젊었던 시절에는 인간 세상에 유희도 제법 다녔던 그였다.

“나 때문에 이 마을이 사라질 뻔했나?”

“그래. 네 하수인이 폭주를 하고 있었다. 고블린, 언데드 가릴 것 없이 몬스터를 뽑아내고 있더군. 내가 아니었다면 이 마을, 아니 왕국 전체가 위험해졌을 거야.”

“아끼던 하수인이었는데…… 네가 죽였지?”

“내가 죽을 순 없으니까.”

“그럼 서로 주고받은 셈 치지. 마을은 무사하잖아.”

“그래도 저 아이한테는 사과해라.”

때마침 마리가 진료소에서 나오고 있었다. 준은 그녀를 불렀다. 준의 말이라면 무엇이라도 듣는 마리였기에 총총걸음으로 달려왔다.

마리가 가까이 오자 볼카누스는 왜 그녀에게 사과를 하라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어렴풋하게나마 그녀에게서 자신의 마나가 느껴졌던 것이다.

“설마?”

“그래. 그렇게 됐다.”

“으음.”

드래곤, 그것도 로드급의 드래곤이 인간에게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준이 시킨 일이다.

납득할 순 없지만,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에게 몸을 의탁해야 했다. 분하고 어이가 없지만 일단 고개를 슬쩍 숙였다.

“미안하다. 꼬맹아.”

“에? 뭐가요?”

“그냥 다…….”

눈을 깜빡거리던 마리가 싱긋 웃었다. 그러더니 허리춤에 차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곧 사탕 하나가 끌려 나왔다. 마리는 그걸 볼카누스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거 먹으면 빨리 나아요.”

“엉?”

손을 흔들며 마리는 길을 떠났다. 마법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모양이었다. 얼떨결에 볼카누스도 손을 흔들어야 했다.

“근데 이거 뭐냐?”

“사탕.”

“흐음. 역시 인간들은 이해할 수 없단 말이야.”

입 안에 사탕을 쏙 넣은 볼카누스.

혀를 자극하는 달콤한 그 맛에, 묵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곧 약이 완성되었다.

볼카누스는 약을 받아들고 진료소를 나섰다. 아그네스가 차라도 한잔하고 가라고 했지만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준과 아그네스가 배웅을 나왔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건가?”

“그래야지.”

“길이 꽤 멀 텐데. 괜찮다면 진료소에서 지내도 좋다. 남는 방 많으니까.”

“흥. 이런 누추한 곳에서 내가 묵을 것 같으냐? 어림도 없지!”

콧방귀를 낀 볼카누스가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뒷산으로 이어진 길을 걷기 시작했다. 중간에 한 번 삐끗했지만, 그는 꿋꿋이 걸었다.

아그네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두 분, 친구 맞는 거죠? 반말을 하시는 것도 그렇고 왠지 분위기가 좀 묘해서.”

“일단은?”

싱겁게 웃은 준도 진료소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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