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뒷산의 주인 (1)
늦은 밤. 진료소의 불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늦게까지 약초학책을 들여다보던 아그네스도 이제 한계가 온 모양이다.
“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선생님은 안 주무세요?”
기지개를 켜며 아그네스가 물었다. 눈이 반쯤 감긴 게, 누우면 바로 잠이 들 것 같았다.
“봐야 할 게 남아서. 먼저 자.”
“그럼 먼저 실례할게요. 선생님도 어서 주무세요. 요즘 안색이 좀 안 좋으신 거 같아요.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죠?”
“그래?”
준은 얼굴을 한 번 쓸어 만졌다. 그리고 거울을 살폈다.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이는데.
그래도 누군가가 곁에서 챙겨 주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특히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지금까지 수천, 아니 수만 년 동안 혼자 퀘스트를 해결해 왔으니까.
“선생님이 쓰러지시면 큰일 나요. 저 혼자서는 아직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잘 쉬셔야 해요.”
“걱정인지 명령인지 모르겠군.”
“당연히 걱정이죠.”
“고맙다. 올라가서 쉬어. 좋은 꿈 꾸고.”
“선생님도요.”
“아그네스.”
준이 빤히 자신을 바라보자 아그네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에 사 준 머리핀은?”
“아, 그거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머뭇거리던 아그네스가 배시시 웃었다.
“깜빡하고 못 하고 왔지 뭐예요. 다음엔 꼭 하고 올게요. 헤헤.”
너무 소중한 물건이라 함부로 하고 다니기 어렵다는 말을 꺼내진 못했다. 부끄러워서. 그 마음을 헤아리진 못했지만, 준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먼저 올라가요.”
진료실을 나간 아그네스는 2층으로 올라갔다.
원래 아그네스는 집에서 출퇴근을 하지만, 당분간은 마리와 함께 지내기로 했다. 곁에서 힘이 되어 주라는 준의 지시가 있었다.
그건 아그네스도 원하는 바였다.
마리가 갑자기 성장하는 바람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 어색함을 없애려면, 역시 가까운 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최고니까.
모든 기척이 없어지자 드디어 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아공간 창고를 열었다.
“어디 보자.”
광대한 창고가 펼쳐졌다. 준이 손으로 홱홱 넘기는 시늉을 하자 공간이 바뀌었고, 이윽고 무기들이 진열된 공간이 나타났다.
릴리가 타이밍 좋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욜~ 역시 우리 마스터의 무기고는 최고라니까. 그런데 이번엔 어떤 무기로 때려잡을 거예요?」
“글쎄. 뭐가 좋을까?”
사실 준 정도의 경지에 오른 존재라면 무기의 종류는 크게 의미가 없다.
그게 무엇이든, 휘두르면 상대는 소멸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프라가라흐를 소환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좋은 무기를 챙겨 간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으니.
준은 잠시 고민하다 결정을 내리고 무기를 집었다.
「오, 그건?」
릴리가 눈빛을 반짝였다.
영롱한 사파이어가 박힌 검이었다. 전체적으로 푸른빛을 띠고 있었는데, 집히는 순간 준의 마나에 반응해 한기가 쏟아졌다.
쉬이이잉!
준은 재빨리 마나를 거뒀다. 더 방치했다간 진료소가 통째로 얼어붙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보네요. 그 뭐더라, 북해빙궁의 빙설화 궁주가 준 거 맞죠? 이름이 만년설검(萬年雪劍)이고.」
“맞아. 용케 기억하고 있구나.”
「어떻게 잊겠어요? 그 여자가 마스터 좋다고 따라오려는 거 간신히 뿌리쳤었잖아요. 그때 참 좋았는데~ 왔을 때 잡아야지~ 그런 시절 이제 또 안 온다규~」
끼릭.
진료소의 문이 열리고 준이 밖으로 나갔다. 뒤처져 있던 릴리가 투덜거리며 잽싸게 따라붙었다.
초가을인 데다가 산까지 인접해 있으니 공기가 차가웠다.
하지만 만년설검의 영향으로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기본 냉기 저항에 추가 냉기 타격 옵션이 걸린 검이었다.
준은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깊게 써 얼굴을 가렸다.
“어디라고 했지?”
「뒷산 중턱에 왕창 몰려 있어요. 수는 정확히 세지는 않았는데 한 200마리쯤? 되어 보였고요.」
“그 정도로 모여 있다면 자경단에서도 눈치를 챘을 텐데. 사람들의 움직임은 없었나?”
「없었어요. 위치가 좀 애매하긴 해요. 얘네들은 횃불도 안 쓰니까 소리만 죽인다면 몸을 숨기기 좋죠. 정령들이 결계를 치고 있긴 한데 이제 한계임요.」
오히려 자경단원들이 눈치를 채지 못한 게 편했다. 만약 비상이 떨어졌다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활보하기 어려울 테니.
릴리가 앞장을 섰고, 준은 그 뒤를 따랐다.
곧 길이 좁아지며 뒷산 초입이 나타났다. 여기까지는 몬스터가 내려오지 못했다. 먼 곳에서 정령들이 결계를 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준의 눈빛이 싸늘히 식었다.
상대는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행동을 개시했다.
마음 같아서는 산을 통째로 날려도 시원찮았다. 하지만 확인해야 할 게 하나 있었기에, 준은 정공법을 택했다.
“서두르자.”
준이 마나를 일으켜 훌쩍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모습이 사라진 것 같았는데, 어느새 그는 릴리가 지목한 지점에 착지했다.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엄청난 신위였다.
준은 착지하는 즉시 마나를 끌어올렸다. 릴리의 말대로 다수의 몬스터가 한곳에 모여 있었다.
발을 딱 한 번 내디뎠을 뿐인데, 사방에서 안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마치 지뢰를 밟은 것처럼.
“쉬익!”
“끼에엑!”
“뀨르르르!”
흉측한 울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고블린, 대형 거미, 그리고 코볼트까지.
아니, 이 소리는 늑대인간의 것이다. 심지어 라이칸스로프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이 아니다.
‘언데드까지?’
스켈레톤이 내는 뼛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던 것. 파악되지 않는 소리까지 더하면, 스파토이까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대체 얼마나 많이 모여 있는 거야?”
「셀 수가 없네요. 제가 보고를 하러 간 사이 더 늘어난 것 같은데요?」
붉고 푸른 기괴한 안광들이 어둠 속에서 춤을 추며 빠른 속도로 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이 봤다면 벌써 혼절했을 규모다.
준이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자 릴리가 호루라기를 불었다.
쩌저정!
결계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중급 정령들이 모두 정령계로 돌아갔다. 이제 준을 수호하고 있는 기운은 아무것도 없다.
릴리는 몬스터가 몰려오는 끔찍한 풍경을 감상했다. 팝콘을 꺼내며.
「이럴 땐 역시 팝콘이 제격이죠. 냠냠.」
그만큼 몬스터들의 수가 많았다. 거의 이 주변 일대를 빼곡히 덮고도 남을 정도로. 땅속에 숨은 것들도 올라와서 쪽수를 채우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놈들이 상대를 잘못 골랐으니까.
“쉬익쉬익!”
그때, 겁 없는 대형 거미가 날카로운 발톱을 들이밀며 준을 향해 돌진했다.
두두두두두!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진은 아니었다. 모든 몬스터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안광의 물결이 쏟아졌다. 살 한 점이라도 더 뜯어 먹겠다는 탐욕이 느껴지는 무서운 눈빛.
사방에서 괴성과 흉측한 살기가 날아오는 와중에도 준은 흔들림이 없었다.
곧 그가 만년설검을 꺼냈다.
번쩍!
검집에서 검의 민낯이 드러난 바로 그 찰나의 순간.
몬스터들에게 지옥도가 펼쳐졌다.
검에서 뿜어져 나온 엄청난 한기가 주변을 휘감기 시작한 것이다.
휘이이잉!
저항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차갑다는 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얼었으니까. 북해빙궁의 비전과 준의 힘이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쩌저저저저저적!
맨 앞에 있던 몬스터들이 공격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모조리 얼어붙었다.
한기의 폭풍은 계속되었고, 그 손길에 예외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예외는 있었다. 몬스터를 제외한 다른 사물들은 조금도 얼지 않았으니까.
2열도, 3열도, 그리고 한참 뒤에 있어 준을 보지 못한 몬스터들도 꽁꽁 얼어붙었다. 땅속에 숨은 것들은 얼굴 한 번 꺼내지 못했다.
완벽한 멸절(滅絶).
준의 어깨에 앉아 구경하던 릴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여기서 딱 안 얼고 덤비는 놈이 하나쯤은 있어야 재미있는데. 그쵸?」
“그렇긴 하지.”
피식 웃은 준은 검을 쥔 채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검을 휘두를 필요가 없었다. 만년설검의 냉기가 숨이 붙은 모든 몬스터들을 찾아 빠짐없이 얼려 버렸다.
잠시 후 준은 몬스터들이 펼친 포위망을 뚫었다. 그리고 만년설검을 검집으로 갈무리했다.
탁.
그 작은 소리를 신호로, 얼어 있던 몬스터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뽀얀 얼음안개가 숲을 가득 메웠다. 마치 겨울 숲에라도 온 것 같았다.
그런데 앞에서도 몬스터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끝이 아닌가? 많이도 뽑아냈군.”
「그러게요. 몇 뭉텅이 더 있는 것 같은데.」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깨끗이 정리를 해야겠어. 가자.”
「고고싱!」
그렇게 준은 사냥을 계속했다.
방해하는 몬스터들은 모조리 없앴다. 그 어떤 것들도 준의 로브 끝자락조차 건들지 못했다. 다가오면 얼었고, 더욱 가까이 다가오면 유리처럼 박살이 났다.
얼마나 걸었을까?
길 없는 곳에서 준이 걸음을 멈췄다. 그가 고개를 들어 위를 살폈다.
높이 솟은 절벽이 길을 막고 있었다. 주변 풍경과 비교했을 때 뭔가 이질감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지나치게 높고 단단해 보였다.
준이 주먹을 쥐고 마나를 둘렀다.
「어쩌시려고요?」
“이렇게.”
순간 벽을 힘껏 내리쳤다.
꽈르르릉!
절벽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먼지가 사라지고, 그 너머로 거대한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릴리가 앞으로 날아가 파편을 하나 쥐었다.
「이거 그냥 바위가 아니었네요. 결계였어요. 응축된 마나가 엄청난데. 상대가 한가락 하는 놈인 거 같은데요?」
“드래곤이다.”
「엑? 드래곤이요?」
릴리는 화들짝 놀랐다.
얼마 전 뒷산에 세상 물정 모르는 도마뱀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 건 순전히 농담이었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괜찮겠어요? 성체라면 만만치 않을 텐데. 프라가라흐도 소환 못 하잖아요.」
“이런 곳에 레어를 깐 놈이면 별거 아닐 거다. 그만큼 급했다는 거니까.”
「지금 엄청 화가 나 있을 게 분명해요. 재미 좀 보려는 순간에 장난감들이 순식간에 다 쓸려버렸으니.」
“글쎄. 그건 확인해 봐야 알겠지.”
준은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존재가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엄청난 살기.
준이 만년설검에 손을 얹었다.
“문지기가 있었군.”
크르르르르.
낮은 울음이 들렸다. 범상치 않은 기세가 쏟아져 나오며 붉은 안광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준은 가만히 서서 그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기만을 기다렸다.
곧 거대한 괴수가 동굴을 박차고 나왔다.
“크르르르!”
사방이 진동할 정도로 거대한 몬스터였다. 온몸을 화염으로 두른 늑대형 괴물이었는데, 숨을 내뱉을 때마다 지옥불이 넘실거렸다.
지옥견 켈베로스와 유사했지만, 마족의 애완견은 아닌 것 같았다. 드래곤이 만든 피조물이 분명했다.
“컹!”
화염 늑대가 달려들었다.
얼마나 강력한 괴수인지 만년설검이 내뿜는 한기에 저항했다. 오히려 그 기운을 수증기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기세가 좋았다.
릴리가 화들짝 놀라며 팝콘을 놓쳤다.
「마스터!」
콰광!
어마어마한 무게와 불길로 준을 짓밟았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공격. 하지만 발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느낌이 없었다. 밟히는 느낌도.
이상한 낌새를 느낀 화염 늑대가 고개를 돌리려 했다.
서걱.
그때, 뭔가가 빠르게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끄응?”
고개가 돌아가지 않는다.
이상한 건 그뿐이 아니었다. 목 쪽에 서늘한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세상이 뱅글 돌았다.
툭.
흐릿한 시야로 피를 뿜고 쓰러지는 자신의 몸뚱이가 보인다.
대체 무슨 일이지?
하지만 화염 늑대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목이 잘리고 살아날 수 있는 괴수는 이 세상에 얼마 되지 않으니까.
릴리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다가왔다.
「와…… 마스터 폼 아직 안 죽었네요? 냉기 공격이 안 들어가서 깜짝 놀랐는데. 꼼짝없이 당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은퇴 번복해도 되겠는데?」
“호들갑은. 고작 문지기를 해치웠을 뿐이야.”
검을 검집으로 회수한 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동굴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순간 발아래에서 마법진이 발동했다.
“이제 이곳의 주인을 만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