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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8화 (18/175)

18화 생명의 빛 (1)

촤악!

하룬이 시원하게 검을 내질렀다. 그 일검에 고블린이 힘도 써보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대박! 이거 엄청나잖아?’

쓰면 쓸수록 감탄이 나오는 검이었다. 마법이 걸려있는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그뿐이 아니었다.

준이 알려 준 대로 검세를 고치니 움직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훨씬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정말이지 대단한 변화였다.

‘선생님은 초절정 고수일까?’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자세 지적도 그렇지만, 이런 좋은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준다는 게 이상했으니까.

하지만 하룬은 잡념을 치웠다.

양옆에서 날붙이를 치켜들며 고블린들이 흉측하게 덮치기 시작했던 것.

“훗!”

여유로운 체술로 몸을 빼낸 하룬이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퀘엑!”

“꾸엑!”

두 마리의 고블린이 일검에 즉사했다.

어제의 자신이 이 장면을 본다면 믿지 못하리라. 정말 대단한 발전이었다.

“여기 정리 끝났습니다!”

“이쪽도 이상 없습니다!”

곳곳에서 자경단원들의 보고가 들어왔다.

지금 누아 마을의 자경단원들은 비상 작전에 임하고 있었다. 목표는 간단했다. 마을 외곽을 침범한 고블린 무리를 섬멸하는 것.

“쿠웨엑!”

마지막 남은 고블린의 숨통을 가차 없이 끊어 버린 자경단장 바이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고블린들이 싸늘히 식어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그가 크게 외쳤다.

“부상자는 없나?”

“없습니다!”

“좋아. 모두 잘 싸워 주었다!”

자경단원들이 각자 무기를 하늘로 치켜들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수호정령들이 놓칠 정도로 고블린의 수가 많지 않고, 또 단원들이 신속하게 모였기 때문에 인명 피해는 없었다.

오늘은 바이런이 작전에 참가했지만, 놀랍게도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하룬이었다. 평소라면 두어 마리 잡는 게 고작인 그는 무려 여덟 마리를 처치했다.

“이봐, 하룬.”

“옙!”

하룬이 재빨리 바이런에게 달려갔다.

“은근히 폼이 올라온 것 같은데? 요즘 열심히 훈련하나 보군. 고블린 독침이 특효약이 된 건가?”

“단장님께서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죠. 하하하. 제가 뭐 하는 게 있습니까?”

“으음. 좀 예상외의 반응인데?”

“뭐가요?”

“평소의 너라면 이까짓 고블린 따위는 콧바람으로도 무찌를 수 있습니돠아아! 핫핫핫핫! 하고 으스댔을 텐데 말이야.”

“하하하하!”

바이런의 정교한 성대모사에 다른 자경단원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평소라면 이런 놀림에 발끈해야 하는데, 하룬은 겸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다.

“아직 멀었습니다. 더 연습해야죠. 며칠 전부터 오전에도 개인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면 좋겠네요.”

“…….”

할 말을 잃은 바이런이 진지한 표정으로 하룬을 바라보았다.

하룬은 긴장했다. 자신이 성장한 모습을 보고, 그가 또 다른 비전(祕傳)을 전수해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음, 그래도 괜찮으려나? 근무지가 진료소니 위급하면 그 이방인 선생이 치료해 주겠지.”

“와하하하하!”

주변이 온통 웃음바다가 됐다.

그제야 본래의 하룬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동료들에게 버럭 화를 냈다.

“그만! 그만 좀 웃으라고! 고블린 여덟 마리도 못 잡은 것들이!”

물론, 그만두라는 부탁을 곱게 들어줄 동료들은 아니었다. 다들 하룬만큼 짓궂었으니까.

* * *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야?”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기운이 없니?”

“그냥.”

진료소로 복귀한 하룬이 대기실에 반쯤 기대앉았다. 동료들이 놀려 댄 후유증이 컸다. 물론 아그네스가 그런 걸 알 턱이 없지만.

그녀가 손에 든 응급처치 도구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작전은? 다친 분들은 없었고?”

“살짝 긁힌 녀석 하나 있는데 그 정도는 가만히 둬도 나아.”

“다행이네. 갑자기 몬스터들이 침입했다고 해서 놀랐어. 그래서 선생님이랑 같이 응급치료 준비하고 있었거든.”

“어. 그래.”

하룬은 눈을 감고 그대로 드러누웠다. 말을 걸지 말아 달라는 그런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한 아그네스는 하룬을 뒤로한 채 진료실로 들어갔다.

“선생님. 부상자는 아무도 없대요. 고블린들이 모두 퇴치된 모양이에요. 하룬이 좀 이상하긴 한데, 신경 안 써도 되겠죠?”

“어디가 이상한데?”

“그냥 만사가 귀찮고 무기력한 거 같아요.”

“전투는 사람을 극도로 긴장하게 만들지. 외상이 없더라도 마음을 보듬어 줄 필요가 있다. 소중한 친구이기 이전에 치유사라면.”

“명심할게요.”

“그건 그렇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약초를 기르는 밭도 하나 만들어야 할 것 같구나. 채집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거야.”

어느새 준의 시선은 진료소 앞 공터를 향해 있었다. 잘 개간한다면 좋은 그림이 펼쳐질 것 같았다.

“와!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텃밭처럼 잘 꾸며서 재배하면 좋을 거 같아요.”

“그건 나중에 천천히 하자. 일이 많을 땐 어떻게 해야 한다고?”

“우선순위를 정해라.”

“그렇지.”

급한 사건이 정리되었으니 이제 다음 우선순위를 생각할 차례였다. 아그네스는 대기실 한쪽 책장을 열었다. 차트가 두 개 있었다.

그중 하나를 꺼내 펼쳐 보니, 맨 위에 마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차트엔 마리의 기본 정보와 병의 증세, 그리고 지금까지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가 시간 순서대로 적혀 있었다.

이걸 만든 건 아그네스였고, 그녀의 성격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무척 꼼꼼하게 적혔다.

아그네스는 차트를 준의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전에 말씀하신 환자 기록 양식을 한번 만들어 봤어요. 봐 주실래요?”

준이 차트를 들었다. 그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고, 곧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생각보다 잘 만들었구나. 이대로 써도 좋을 것 같은데?”

“정말요? 그럼 앞으로 환자분이 오실 때마다 이렇게 기록지를 만들어 둘게요.”

고개를 끄덕인 준은 펜을 들어 차트에 오늘 날짜를 기입했다.

곧 마리가 방문할 시간이었으니까.

역시나 정해진 시간에 맞춰 마리가 진료소를 방문했다. 그런데 혼자였다. 문 앞까지 마중을 나온 아그네스는 깜짝 놀랐다.

“어머, 혼자 왔니?”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끄덕이 아니라 끄덕.

그 모습에서 아그네스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하루 사이에 어른스러워진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그 귀여운 미소는 어디 가지 않긴 했지만.

“어라? 아니었네. 저기 봐. 아빠 계시지? 걱정돼서 따라오셨나 보다.”

마리는 손을 들어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나무 뒤에 어설프게 숨어 있던 아버지는 멋쩍게 웃으며 양팔을 흔들어 주었다.

약효가 좋은지 마리는 더욱 성숙해 보였다.

처음엔 아그네스의 허리 아래였던 키도 어느새 쑥쑥 자라 가슴께까지 왔다. 이대로라면 금방 키가 비슷해질 것 같았다.

“그런데 마리 너 키 엄청 컸다. 응? 몇 밤 더 자면 언니랑 비슷해지겠어.”

“……웅.”

“어머? 지금 얘기한 거니?”

끄덕.

목소리가 많이 떨리긴 했지만 마리는 분명히 말로 대꾸했다.

아그네스는 치유사로서의 희열을 느꼈다. 자신이 모두 치료한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을 옆에서 도왔다. 보람이 샘솟았다.

환하게 웃은 아그네스가 마리의 손을 잡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선생님! 마리 왔어요.”

“그래. 어서 와라.”

“키 많이 컸다고 하니까 웅, 이라고 대답한 거 있죠? 약효가 잘 받나 봐요. 곧 사탕 달라고 떼쓸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떼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지.”

준도 마리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하루 만에 이렇게 달라질 줄은 몰랐지만, 예측 범위 안이었다.

한데 몸도 마음도 달라졌음에도 딱 하나 변하지 않은 게 있었다.

마리의 시선은 처음부터 쭉 준이 가지고 있는 사탕 주머니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하긴, 아그네스도 눈독을 들일 정도면 달콤한 건 나이와 관계가 없는 걸지도.’

준이 웃으며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자, 어서 약 먹고 사탕 먹자. 아그네스. 약 준비해 줘.”

“네에~”

마리는 예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약을 마셨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약을 먹으면 훨씬 편해진다는 사실을.

그녀는 약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비웠다.

“잘 마시는구나. 이제 사탕은 필요 없겠는데?”

준의 농담에 마리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아니, 정색에 가깝나? 표정이 훨씬 다양해졌어.’

준도 웃고 아그네스도 웃었다. 의젓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나쁘지 않았다.

준이 사탕 주머니를 뒤적였다.

“농담이야. 자, 받아라. 이번엔 주황색 사탕이다.”

마리가 사탕을 맛있게 먹는 사이 준이 아그네스에게 조용히 물었다.

“재활 치료 준비는?”

“자신은 없지만, 맡겨 주세요.”

“날씨도 좋으니 진료실보다는 밖에서 하는 게 좋겠구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마리야. 언니랑 나가서 놀까?”

아그네스는 마리를 데리고 진료소 근처에 있는 꽃밭으로 향했다. 야생화가 예쁘게 피어 있었다. 햇살도 좋아 야외활동을 하기 딱 좋았다.

밤새 특별한 재활 치료법을 고민하던 아그네스는 동이 틀 무렵 해답을 찾았다.

자신은 마리와 유대감이 누구보다도 좋다.

그렇다면, 특별히 뭔가를 가르치려고 하기보다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결론이 나온 것은 준의 신뢰 덕분이기도 했다.

치유술에 대해 무지한 자신에게 치료를 맡겼다는 것은, 특별히 뭔가를 배워서 적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한편, 두 소녀가 손을 잡고 꽃밭을 거니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준과 마리의 아버지였다.

“따님의 얼굴에도 이제 여유가 보이는군요. 치료가 잘 되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이게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마리의 아버지는 감격에 찬 눈으로 딸이 꽃을 만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눈이 그렁그렁한 게,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거 같았다.

“이곳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기적이 말입니다. 이 진료소가 다시 문을 여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준의 생각은 좀 달랐다. 마리의 부모가 딸을 포기했다면 이런 장면은 볼 수 없었을 테니까.

딸에 대한 애정과 정성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준은 굳이 그 부분을 꼬집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말로 지금의 기쁨을 방해하지 않는 편이 마리의 아버지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때, 마리가 양팔로 손짓을 했다.

“음? 선생님. 우리를 부르는 걸까요?”

“가 보죠.”

정확히는 준에게 용무가 있었다.

마리는 슬픈 표정으로 아파, 라고 말했다. 준은 살짝 놀랐다. 말을 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치료가 완벽했는데 아프다고 말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마리의 작은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따라갔다. 그 끝엔 병든 꽃이 외로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파해.”

“그래. 꽃 친구가 좀 아픈 것 같구나. 어디 좀 볼까?”

준이 꽃잎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줄기를 손가락으로 잡았다.

“이제 안 아플 거야. 잘 보거라.”

준이 마나를 일으켰다.

안개 같은 하얀 빛이 꽃을 감쌌다. 꽃잎이 싱싱해지고 줄기가 탄탄해졌다. 반쯤 누워 있던 꽃이 점점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곧 준이 손을 거뒀다.

마술처럼, 그 아래 놓여 있던 꽃은 이제 갓 피어난 것처럼 싱싱해졌다.

“……!”

말없이 꽃을 바라보는 마리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식물을 되살리는 건 아주 간단한 마법 중 하나였다.

하지만 마리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시 살아난 꽃을 만지는 순간.

빠직!

마리의 심장을 죄고 있던 결계 중 하나가 부서져 버렸다. 순간 번쩍거리는 광채가 마리의 몸에서 터져 나오며 주변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그 찰나의 순간, 준이 눈매를 좁혔다.

이건 분명 예상 밖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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