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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7화 (17/175)

17화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좋은 아침이에요. 하아아암…….”

하품을 한 아그네스가 축 늘어진 채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일이 많고 피곤하더라도, 그녀는 늦게 출근하는 법이 없었다.

책을 읽고 있던 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약초 채집이 힘들었나?”

“아아뇨. 몬스터도 안 나오고 편했죠. 요즘 공부하느라 잠을 줄여서 그래요. 수면 부족이죠 뭐. 진료소 일도 많고요.”

“환자도 안 오는 진료소 일이 뭐가 바빠?”

미간을 찌푸린 아그네스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언제나 여유로운 선생님은 알 턱이 없으시겠죠. 환자가 없다고 한가한 건 아니에요. 자잘한 일이 계속 있으니까. 얼마 전엔 차트 양식도 만들라고 하셨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기억나지.”

10년 넘게 건물을 사용하지 않아 정리해야 할 곳이 남았다. 창고 정리는 끝나지도 않았고, 비가 새는 곳도 있어 신경을 써야 했다.

기회를 잡은 아그네스는 푸념을 계속했다.

“아는 건 별로 없는데 부담스러운 일만 잔뜩 시키시고. 아무튼 선생님은…….”

그때, 뭔가가 휙 날아왔다.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든 아그네스는 눈을 깜빡였다. 어디선가 많이 본 가죽 주머니였다.

준이 말했다.

“공부할 때 달달한 걸 먹으면 도움이 될 거다. 집중력이 좋아지거든. 그런데 아까 하다 만 말은 뭐야? 아무튼 선생님은 뭐라고?”

“선생님은 최고라고요!”

생긋 웃은 아그네스가 엄지를 세웠다. 그 주머니 안엔 사탕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젠 마리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피식 웃은 준이 보던 책을 덮었다.

“잠깐 앉아라.”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 진지한 쪽으로.

주머니를 보며 행복한 표정을 짓던 아그네스가 무릎 위에 손을 모으고 얌전히 앉았다.

“이대로 약효가 잘 듣는다면 마리는 곧 말을 할 수 있게 될 거야. 거기에 대비해 다른 치료법을 하나 세워 둘 생각이다.”

“곧 말을 할 수 있게 되는데 다른 치료법이 필요해요?”

“기능상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거야. 입이 트여도 어눌하고 힘든 부분이 많겠지.”

“아.”

“그 힘든 부분을 감쇄시키는 걸 재활(再活) 치료라고 한다.”

“들어 본 적 있어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쉽게 풀린다.

“병을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 또한 중요해. 훌륭한 치유사를 목표로 한다면 이 분야에도 관심을 가져 봐. 그런 의미에서 마리의 재활 치료는 너에게 맡기마.”

“알겠어요. 한번 해 볼게요.”

처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묻지 않았다.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것이다.

일취월장(日就月將).

그 단어를 떠올린 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룬은 나왔나?”

“웬일로 일찍 나와선 요 앞 공터에서 훈련하고 있던데요?”

“훈련을?”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그네스는 말했다. 왜 치유사가 되고 싶은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고.

‘하룬 녀석에겐 아마 큰 자극이 됐겠지. 좋은 신호야.’

준이 진료실을 나섰다.

바로 공터 쪽으로 나가려다, 뭔가를 떠올리고는 2층 방으로 올라왔다. 책상 위엔 미리 준비해 둔 투박한 검이 한 자루 놓여 있었다.

그때, 준의 어깨 쪽에 잔상이 일며 릴리가 나타났다.

잠옷을 입고, 귀여운 수면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그녀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저걸 그 싹퉁머리한테 줄 생각은 아니겠죠?」

“어차피 먼지만 쌓이고 있었는데 뭐 어때? 이보다 좋은 검은 넘치고도 남아. 하나 준다고 해서 티도 안 날 거다.”

「아이고 의미 없다…….」

그 검은 준의 수집품 중 하나였다. 다른 차원의 그랜드마스터 얀센이 쓰던 명검으로, 사용자의 잠재력을 이끌어주는 훌륭한 검이었다.

사실 더 좋은 무기는 많이 있었지만 준이 이 검을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사용자와 함께 성장하는 능력이 숨겨져 있었던 것.

릴리가 반쯤 누운 채 배를 벅벅 긁었다.

「차라리 줄 거면 더 좋은 걸 줘요. 장비빨이라도 받아야 목숨을 부지하지. 저렇게 까불다가 쎈 놈 만나면 탈탈 털릴걸요?」

“오히려 성능이 좋은 검은 독이 될 거야. 너무 무기에 의존하게 되니까. 차근차근 성장하는 게 여러모로 좋겠지. 지금 녀석에게 딱 맞는 무기는 이거야.”

「흥, 마음대로 하세요. 그런데 전 뭐 없어요? 설마 만난 지 얼마 안 된 싹퉁머리보다 제가 덜 소중한 건 아니겠죠?」

“뭐 필요한 거라도 있나?”

「윤회의 사슬을 끊은 거 철회하고, 절 페어리 퀸으로 만들어 주세요. 프레어 그 새……님이 정령 빡치게 하네요.」

“잠이나 마저 자라.”

준은 검을 착용한 뒤 밖으로 나갔다.

아그네스의 말대로, 하룬은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쉭! 쉬익!

하룬이 연격을 펼쳐 보였다.

검이 종횡으로 움직이며 날카로운 궤적을 만들어 냈다. 평범한 사람이 보기엔 위협적인 공격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준의 안목을 만족시키진 못했다.

‘의욕이 앞서 힘이 과도하게 들어가고 있어. 교정이 필요하겠는데?’

하지만 준은 섣불리 나서지 않고 하룬의 훈련 장면을 지켜보았다.

검을 열심히 휘두르던 하룬이 움직임을 멈췄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그는 검을 거두고 숨을 골랐다.

그때, 옆에서 인기척을 느낀 하룬이 고개를 홱 돌렸다.

“헉! 뭐야. 깜짝 놀랐잖아요! 언제부터 보고 계셨던 겁니까?”

“방금 왔다. 아침부터 열심인데?”

“이 정도는 해야죠. 귀족가 자제들은 제 나이 또래에 기사가 되어 전장을 누비는데 말입니다.”

준이 가까이 다가왔다.

하룬은 다시 긴장의 끈을 조였다. 며칠 전 준의 놀라운 실력을 목격했기에. 또다시 그의 검 끝을 목에 허용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준이 내민 것은 검이 아니라 그의 오른손이었다.

“좋은 검을 쓰는구나. 잠시 구경해도 되나?”

“안 될 거 뭐 있나요.”

하룬이 검을 준에게 넘겼다.

“처음 자경단에 들어올 때 선물로 받은 겁니다. 뭐 흔한 검이라곤 하지만, 여기에선 무기 구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제법 잘 만들어진 검이네.”

준은 검을 집은 채 앞뒤로 살폈다. 도시 무기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검이다. 물론 누아에선 보기 드문 물건일 것이다.

그때, 준이 마나를 일으켰다.

동시에 검을 시험 삼아 두어 번 휘둘렀다. 사실 목적은 따로 있었다. 준은 검을 휘두르다 미끄러진 척 검을 멀리 던져 버렸다.

“어! 어어어!”

날아간 검이 옆쪽 바위에 부딪쳤다.

쩌정! 쩌억!

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쇳가루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깜짝 놀란 하룬이 손을 뻗었으나 이미 검이 두 동강 난 뒤였다.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준이 무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룬은 너무 어이가 없고 갑작스러워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 말도 안 돼…….”

저렇게 살살 부딪쳤는데 검이 부서질 리는 없었다.

준이 일으킨 마나 때문이지만, 하룬이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검사에게 있어 검은 목숨만큼 소중한 것인데.

그때 준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집을 풀었다.

“검이 부서졌으니 새로운 무기가 필요하겠어. 으음, 어쩔 수 없나. 이걸 써라.”

“뭡니까? 이 볼썽사나운 쇠붙이는.”

“겉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한번 뽑아 봐. 네 검보단 쓸 만할 거다. 꽤 비싸게 구한 검이야.”

화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던 하룬은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스릉!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의 검보다 나아 보일 게 없었는데, 막상 꺼내 보니 얘기가 조금 달랐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뭐지?”

하룬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검이 손바닥에 쫀득하게 달라붙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립을 놓치지 않을 것 같았다. 덕분에 자신감이 샘솟는다.

하룬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제야 이 검의 진가를 알아본 것이다.

“잠깐 휘둘러 봐도 됩니까?”

“얼마든지. 이제 네 검인데.”

쉬익! 쉭쉭!

연격을 펼친 하룬이 감탄했다. 자신의 검과는 차원이 달랐다. 투박하고 촌스럽게 생겼지만 마치 자신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완벽했다.

하지만 누아 마을의 하룬이 누군가?

다른 사람이라면 감격에 찬 표정으로 감사의 절이라도 올렸겠지만, 그는 표정 관리를 하며 헛기침을 했고, 오히려 흘겨보기까지 했다.

“제 검이 부서진 건 굉장히 유감이지만, 무기가 없으면 안 되니 제가 쓰도록 하죠. 다음부터는 주의해 주십쇼. 아, 이건 또 언제 숙련도를 올리나.”

“그래. 알았다. 다음부터는 주의하도록 하지.”

준이 돌아섰다.

역시나 릴리가 속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열불을 토했지만, 어쨌든 목적을 자연스럽게 달성했으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근데요. 선생님.”

걸음을 멈추고 다시 몸을 돌렸다. 하룬의 태도가 다소 공손하게 변했다.

“그거, 기억나십니까? 예전에 왕립기사단에 대해 이야기하신 적 있잖아요.”

“방심하다가 독침에 맞았던 그날 밤에?”

“……방심한 건 아니고요. 흠흠. 아무튼, 혹시 왕립기사단에 대해 좀 아는 거 있으신가 해서요. 언제 여쭤보나 싶었는데 지금이 딱인 거 같네요.”

“그거라면 자경단장님께서 더 잘 알 텐데.”

“안타깝게도 단장님이 싫어하는 얘기 중 하나가 그거거든요.”

“지원하려고?”

잠시 고민하던 하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은 한 발자국 내디딘 기분이었다. 자신의 미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유대감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니까.

팔짱을 낀 준이 대꾸했다.

“아비루나 왕국의 기사단을 말하는 거라면 아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해.”

“오, 정말입니까? 그럼 추천서 좀 써 주십쇼.”

“그 전에 하나 묻자. 스스로 기사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열심히 연습하면 되겠죠. 앞으로 훈련양도 늘릴 거고요.”

“실력을 묻는 게 아니야.”

하룬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준은 친절하게 질문을 바꿨다.

“넌 왜 기사가 되고 싶은 거지?”

“그야 멋있으니까요. 번쩍거리는 무구를 차고 사람들 앞에 서면 진짜 기분 째질 거 같은데.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와 신민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행진도 하고! 와우!”

어느새 하룬은 자신의 꿈에 푹 빠졌다. 준은 차분히 그의 희망을 들었다. 그가 나선 것은 모든 희망 사항이 나온 뒤였다.

“결국 공을 세우려면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한지 알아?”

“잘 싸워야 하지 않을까요? 좋은 무기도 있어야 하고요. 그리고…….”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차가운 한마디에 하룬이 흠칫 놀랐다. 자경단에서 검을 쥐고 있지만 바탕은 산골 마을 소년이었다. 사람을 상대해 본 적은 없었다.

“그, 그렇겠죠. 전쟁이 나면 다치거나 죽겠죠.”

“넌 그 검으로 적을 벨 수 있나?”

“베어야……죠.”

“적이 같은 마을 출신이면? 혹은, 아는 사람이거나.”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

준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말투는 얼음처럼 냉랭했다.

“왕립기사단은, 한마디로 왕의 검이다. 왕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해내야 하지. 귀족들의 기사단도 마찬가지야. 얻는 만큼 잃는 게 많은 곳이다.”

하룬이 할 말을 잃었다.

처음부터 주눅을 들게 할 생각은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다른 관점으로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해서 꺼낸 말이었다.

“그 준비가 되었다면 이야기해라. 추천서는 그때 생각해 보마.”

“알겠습니다.”

“그리고 검을 휘두를 때 왼발을 너무 앞으로 빼지 마. 반 발자국 정도 여유를 둬라. 그립은 감싸는 정도로만.”

“……네?”

슬쩍 비급을 흘려준 준은 어느새 진료소로 향하고 있었다. 멍하니 있던 하룬이 번쩍 정신을 차리더니 다시 검세를 잡았다.

“반 발자국 여유를 두고, 그립은 감싸는 정도로만?”

쉭! 쉭쉭!

하룬의 눈이 커졌다.

움직임을 살짝 바꿨을 뿐인데 검이 아까보다 훨씬 경쾌하게 허공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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