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16화 (16/175)

16화 릴리의 말 못 할 고민

자경단장 바이런은 약속을 지켰다.

준이 지원 병력을 요청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 셋을 진료소로 파견했다. 그들은 모두 누아 마을 출신으로 마을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다들 모인 건가?”

“그렇습니다.”

진료실 안에 도열한 모습이 제법 든든했다.

준은 아주 찰나였지만 그들의 손과 발, 그리고 무게 밸런스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 실력을 가늠했다.

‘훈련을 정말 잘 시켰군. 웬만한 도시의 정규군보다 나은 것 같은데. 대체 과거에 뭘 하던 남자지?’

바이런에 대해 궁금증은 갈수록 커져 가고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얼마 전 아그네스에게 지나가듯 물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잘 모르고 있었다. 그가 귀향할 때까지 할아버지 손에 자랐으니까.

‘한번 천천히 알아보도록 할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준은 가장 오른쪽, 체격이 좋은 청년을 지목했다.

“이름은?”

“툴리앙입니다.”

“검을 잡은 지는 얼마나 됐나?”

“5년 정도 됐습니다.”

“실력이 좋아 보이는데? 훈련을 열심히 한 모양이야. 듬직하군.”

“감사합니다!”

그렇게 준은 새로 온 자경단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같이 있던 하룬은 이게 자기가 알던 선생님이 맞나 싶었다.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었으니까. 거기에 은근 사람을 놀리는 재주까지 있었으니.

얼마 전 슬라임 체액 사건만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툴리앙 오라버니는 실력만 좋은 게 아니라 성격도 좋아요. 마을 분들한테도 인기가 많고요. 이 중에서 제일 먼저 결혼할걸요?”

“확실히 그렇네. 인물도 좋고.”

“하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아그네스도 곁에서 적극적으로 나서 준 덕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준은 새로 온 자경단원들의 정보를 모두 머릿속에 담았다.

툴리앙, 23세. 주력 무기는 검.

알렉스, 22세. 주력 무기는 창.

배런, 20세. 주력 무기는 활.

조합을 살펴보니 바이런이 나름 배려한 부분이 있었다. 세 명을 앞세우고 뒤에서 배런이 활로 견제한다면 전투가 훨씬 더 수월해질 것이다.

거기에 알렉스가 차지하는 리치 상의 우위가 전투에 변수를 가미할 테고.

물론 그 과정에서 하룬은 관심을 조금도 받지 못해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끝내 준의 시선을 빼앗는 데는 실패했다.

소개하는 시간이 모두 끝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들 알겠지만,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약초 채집을 할 계획이다. 매일 정해진 양을 채집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때 툴리앙이 손을 들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질문을 해도 괜찮습니까?”

“얼마든지.”

“채집해야 하는 약초의 양이 얼마나 됩니까?”

“자넨 약초학에도 관심이 있었나?”

“아닙니다. 그게…… 작전 시간을 알고 싶어서 여쭤봤습니다.”

“아마 한나절은 꼬박 캐야 할 거야.”

자경단원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한나절을 꼬박 캐야 한다는 것은, 그 시간 동안 아그네스를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말과 같다. 그것도 마을 밖에서.

하룬이 나섰다.

“한나절이면 대략 여섯 시간 정도 되는데, 인원이 적어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좋은 지적이야. 그래서 채집 지역을 좀 바꿨다.”

준은 미리 준비한 지도를 테이블에 펼쳤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기며 모두를 주목시켰다.

“당분간 약초는 누아 마을과 켈세타 사이에 있는 지역에서 채집한다. 여기에서부터 여기까지.”

준이 지도에 그려진 지역을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뒷산과는 반대인 평지 지형이었다. 지도를 확인한 자경단원들의 표정이 다소 풀렸다.

숲이라는 변수가 있긴 하지만, 산에서 나오는 몬스터들보다는 훨씬 약한 개체들이 나타나는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릴리의 정령들에게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지역을 선택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 이야기를 굳이 꺼내진 않았다. 적당한 긴장감을 위해서.

준이 지도를 가리키며 설명을 계속했다.

“지도에 붉은색으로 표시된 지역, 특히 뒷산 쪽은 절대 가지 마. 이쪽도 마찬가지. 아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경단장님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

준은 품에서 응급처치 키트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알싸한 약초의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툴리앙이 물었다.

“그게 뭡니까?”

“이건 앞으로 자경단에 보급될 응급처치 키트다. 부상 부위를 빠르게 지혈하고 소독하는 효능이 있지. 상급 키트는 절단된 사지를 붙일 정도로 효과가 좋다. 뭐 이건 상급 키트는 아니지만, 중급 정도는 되니 위급할 때 써라.”

준은 툴리앙에게 키트를 던졌다. 엉겁결에 받아 든 그가 되물었다.

“혹시 이 키트를 만들려고 약초를 채집하는 겁니까?”

“그래.”

자경단원들의 표정에 남아 있던 일말의 의혹이 말끔히 사라졌다.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걸 알자 의욕이 샘솟았다.

특히 상급 키트에 대한 이야기가 귀를 솔깃하게 했다.

가장 좋은 건 다치지 않는 것이겠지만, 혹여라도 다쳤을 때 혼자서 치료할 수 있는 도구가 있다는 건 역시 든든한 일이다.

준이 덧붙였다.

“약초 채집도 중요하지만, 너희들의 안전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잊지 마. 위험한 상황이 생길 것 같으면 무리하지 말고 돌아오고. 아무튼 잘 부탁한다. 리더는 툴리앙, 자네에게 부탁하지.”

“옛!”

곧 자경단원과 아그네스가 약초 채집 장비를 챙기고 진료소를 떠났다. 그들을 진료소 아래까지 배웅한 준은 다시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그네스도, 하룬도 없으니 진료소 안은 무척 고요했다.

문득 두 사람이 이 진료소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릴리.’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두어 번 더 불렀지만,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열심히 임무를 수행 중인 것 같아 준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책을 들었다.

오랜만에 한가로운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 *

길쭉한 나무와 거친 풀로 가득한 숲.

그곳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릴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바닥에 작은 불꽃이 일었다.

곧 그녀는 주머니에서 호루라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까 말까 고민을 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쿠아와 윈디, 그리고 노움은 다른 곳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호루라기를 힘차게 불었다.

휘익!

그러자 작은 불꽃이 일렁이더니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도 험상궂었는데, 릴리를 보자마자 인상을 팍 썼다.

「아이 씨! 정령 빡치게 왜 또 부르고 그래? 엉? 어제 그렇게 부려먹었으면 좀 쉬게 해야지!」

「그, 그, 그게요!」

「그게 뭐! 엉? 쪼끄만 게 어디서 말대답이야. 엉?」

화염계 중급 정령, 프레어가 오른손을 확 들자 릴리가 움찔 놀랐다.

프레어는 부를 때마다 뭔가 이상했다.

분명 자신의 하수인 정령인데, 이 정령은 나타날 때마다 성질을 부린다. 화염이라는 속성을 감안하더라도 화가 나는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뒤통수라도 한 대 때리고 싶은데 피지컬 차이가 너무 크다.

그래도 릴리는 헛기침을 하며 권위를 드러냈다.

「진료소 직원들이 약초를 캐러 이쪽으로 올 거예요. 그러니까 이쪽을 잘 지켜 달라고요.」

「젠장! 또 시작인가. 이놈의 몬스터들은 왜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냐?」

「그것까진 알 필요 없고요. 아무튼 알죠? 모습을 들키지 않고 처리해야 한다는 거. 우리 마스터의 특별한 부탁이니 잘 지켜 주세요.」

「쳇! 네 마스터의 부탁이니 어쩔 수 없지만, 아무튼 귀찮게 됐군. 정령계가 나한테 해 준 게 뭔데! 엉? 이렇게 막 부려먹어도 되는 거냐!」

「지, 진정하시고요…….」

그때, 두 정령이 동시에 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쪽에서 인기척을 느꼈던 것이다.

프레어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덕분에 고함에서 벗어난 릴리도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그 너머로 아그네스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공식적으로 첫 채집을 나선 아그네스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만감이 교차했다.

약초를 제대로 캐지 못하면 어쩔까. 목표량을 채집하지 못하면 혼나지 않을까.

지금까지 준의 옆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실제로 적용하는 무대였기 때문에 더욱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힘들어? 덥지도 않은데 왜 그렇게 땀을 흘리고 그래?”

“응? 아냐. 그냥 좀.”

“하긴. 너무 걷기만 했나? 쉬었다 갈까?”

아그네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룬의 배려가 참 고맙긴 했지만, 지금은 다른 자경단원들도 있었다. 조금 무리하더라도 빠르게 일을 마무리하는 게 좋다.

일행은 마을 입구를 나서 켈세타로 이어진 길을 걸었다. 마차가 다니는 길이라 넓고 쾌적했다. 신기하게도 여기까지 몬스터는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룬이 툴리앙에게 따라붙었다.

“아우. 좀이 쑤시네. 몸 풀 만한 놈도 안 나오고. 그놈의 수호 정령인지 뭔가 하는 놈들 때문에 검집에 거미줄 생기겠어요.”

“오히려 고마운 일이지. 우리 마을을 지켜 주는 소중한 정령들이잖아.”

툴리앙이 지도를 힐끔 바라보며 대꾸했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어 하룬 역시 더는 따지지 않았다.

수호 정령의 존재가 밝혀진 것은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다.

정체 모를 마력원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이 마을 전체에 퍼지자, 촌장 아론이 직접 나섰다. 지혜와 경험이 가장 풍부한 사람이었으니까.

아론은 마나를 다룰 뿐만 아니라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사물과 교감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나온 결론은, 그들이 마을에 이로운 정령들이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상단 사람들의 목격담도 크게 작용했다. 몬스터가 나타났는데 홀연히 불빛이 나타나 자신들을 도와주고 갔다는 증언 같은 것이었다.

“근데 목적지까지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조금 더 걷다가 좌측 숲으로 빠지면 돼. 거기에 약초가 많다고 표시되어 있어. 거기서 작업하면 될 거야.”

툴리앙은 지도를 잘 보는 편이었다. 일행은 모두 툴리앙의 지시에 따르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걷다 보니 풀숲이 나왔다. 뭔가가 은신하고 있기 딱 좋은 곳이었다.

경험이 많은 툴리앙이 수신호를 보냈다. 남은 세 자경단원들이 무기를 꺼내 들고 전투 대형을 갖췄다. 중심에 아그네스가 들어 있는 방어 진형이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도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조용하네.”

“그러게요.”

“방심하지 말고, 아그네스! 약초가 보이냐?”

“여기 한가득 있어요!”

아그네스는 이미 호미를 들고 약초를 채집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것도, 익숙한 것도 있었다.

우선 익숙한 것을 먼저 채집했다. 손을 풀면서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푸이푸이와 라자이아에 이어 난이도가 높은 백련초에 도전했다.

‘우선 잎보다 넓게 땅을 파고. 책에서는 줄기로부터 한 뼘 정도라고 했지?’

아그네스는 옆으로 뻗은 잎에 손을 대고 거리를 쟀다. 그리고 호미로 땅을 슬금슬금 팠다.

잠시 후 백련초가 뿌리째 뽑혀 나왔다. 뿌리 끝이 조금 잘려나가긴 했지만 처음치고는 굉장히 채집을 잘한 편이었다.

‘얏호! 성공이다!’

아그네스가 한창 채집에 집중하고 있을 때, 하룬이 코를 킁킁거렸다.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났던 것이다.

“형. 뭐 타는 냄새 안 나요?”

“킁킁, 어. 그러게?”

“저쪽인 거 같은데. 한번 가 볼까요?”

하룬과 툴리앙은 남은 단원들에게 아그네스를 맡기고 정찰을 나갔다. 가까운 숲에서 연기가 뽀얗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닥을 보니 고블린 세 마리가 바싹 탄 채 누워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간 하룬이 검 끝으로 고블린을 쳤다. 반응이 없다.

“죽었나 본데요?”

“한발 늦었군.”

“음. 아주 늦은 거 같진 않아요. 저기 좀 봐요.”

한옆으로, 꼬챙이에 꿰어진 멧돼지 한 마리가 있었다. 타지 않은 거로 봐선 정령에게 당하기 전에 고블린에게 잡혀 온 모양이었다.

“옛날 생각 나네요. 몬스터가 없을 땐 숲에서 야영도 하고 좋았는데. 형. 오늘 저녁은 이놈으로 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거 좋지. 역시 임무 후엔 통구이가 제격이니까.”

“그럼 같이 들어요. 읏차!”

두 사람은 멧돼지를 들고 원래 위치로 복귀했다. 아그네스는 여전히 약초 채집에 열을 올렸다.

하룬과 툴리앙은 아그네스를 지켰고, 나머지 자경단원들이 장작을 모아 통구이를 준비했다.

곧 불에 올라간 멧돼지가 노릇노릇 익어 가기 시작했다. 아그네스가 들고 있는 약초 바구니에도 싱싱한 약초가 하나둘 채워지고 있었다.

“밥 먹고 합시다!”

하룬이 손을 흔들며 신호를 보냈다. 구수하게 익은 멧돼지를 보니 절로 군침이 돌았다.

아그네스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우와, 진짜 맛있겠다!”

“많이 먹으라고. 자, 받아.”

하룬이 먹기 좋게 자른 돼지고기를 커다란 잎에 올려 나눠 주었다. 모두가 모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식사를 했다.

그 장면을 먼 허공에서 지켜보고 있던 릴리가 말했다.

「어때요? 보람차죠?」

「보람? 보오람? 지금 나랑 장난 까냐?」

「그, 그럴 리가요! 헤헤헤. 아무튼 채집 끝날 때까지 잘 부탁드려요오…….」

릴리는 결국 프레어에게 다시 고개를 숙여야 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