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15화 (15/175)

15화 모든 현상엔 이유가 있다

작은 깨달음을 얻은 이후, 아그네스는 더욱 열심히 일했다.

물론 환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티가 나진 않았지만 공부와 일 모든 것에 더욱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준이 물었다.

“어때. 내가 준 책은 다 읽었어?”

“다 읽긴 했는데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아서 다시 읽고 있어요. 음, 뭐랄까. 실제 약초와 다른 부분? 그런 게 있어서 메모하면서 보고 있거든요. 요렇게.”

아그네스가 기록 중인 노트를 들어 보였다.

준은 그것을 받아 천천히 넘겨보았다. 같은 약초라고 해도 지리와 기후에 따라 다른 성질을 갖곤 한다. 아그네스는 그 작업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잘하고 있긴 한데, 이렇게 꼼꼼하게 하다간 시간이 부족해 시험에 떨어지지 않을까?”

“떨어져도 할 수 없죠. 그래도 기왕 공부할 때 확실하게 하는 게 좋으니까요. 시험보다 마을 분들의 건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기특한 마음으로 준이 노트를 돌려주었다.

알아서 잘하고 있을 땐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좋다. 막히고 헤맬 때 살짝 길을 알려주면 되겠지.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뒷정리를 하던 아그네스는 슬그머니 준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한가롭게 책을 읽고 있었다.

말할까 말까?

잠시 고민하던 아그네스가 손을 불끈 쥐었다. 인생 뭐 있나. 저지르고 보는 거지.

“선생님?”

준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아그네스가 해맑게 웃었다. 조금은 어색하게.

“저기, 잠깐 시장에 좀 다녀와도 될까요?”

“시장에? 뭐 필요한 거라도 있나?”

“오늘 상단 후발대가 도착했다고 들었거든요. 혹시 편찮으신 분이 없나 물어보려고요. 이쪽에서 치료를 받으면 수익이 나고 좋으니까요. 입소문도 날 거고.”

준은 빤히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다시 어색하게 웃자, 준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속이 너무 빤히 보였다.

아마 도시의 소식이 궁금해서 가려는 거겠지.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기분전환을 해야 공부도 잘되는 법이니까.

“오늘 환자는 더 안 올 거 같으니 그렇게 해라. 다시 올 필요는 없고 시장에 들렀다 바로 퇴근해.”

“와! 그래도 돼요? 감사합니다!”

아그네스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을 갈아입고 진료소를 나섰다. 하룬의 방해가 있었지만 꿋꿋이 물리치고 빠져나왔다.

곧 시장에 들어섰다.

“우와아!”

켈세타에서 온 상단 덕분에 오랜만에 활기가 돌고 있었다. 못 본 물건들이 곳곳에 널렸다. 아그네스는 눈을 반짝이며 구경을 시작했다.

그런데 상인들이 한곳에 모여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왠지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그래도 아그네스는 기회다 싶어 상인들의 무리에 끼어들었다.

“저기 실례지만…….”

“음?”

모두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손님을 바라보는 상인의 시선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그네스는 애써 웃으며 용건을 꺼냈다.

“혹시 몸이 불편하신 상단 분들은 없으신가요? 실은 제가 마을 진료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편찮으시면 한번 들러 주세요.”

“괜찮다. 상단에서 치유사가 함께 왔거든.”

“아, 그래요?”

아쉬웠지만 할 수 없었다. 상단에서 고용한 치유사라면 제법 실력이 있을 것이다. 아그네스는 꾸벅 인사한 뒤 물러났다.

“아깝네. 선생님께 칭찬받을 좋은 기회였는데.”

그때, 그녀의 이목을 끄는 곳이 있었다. 형형색색의 장신구를 파는 좌판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본능적으로 그쪽을 향했다.

“안녕하세요?”

“오, 예쁜 아이구나! 어서 오렴. 분명 마음에 드는 게 있을 테니 천천히 구경해.”

아그네스가 마음에 드는 머리핀을 집었다. 이곳에서 보기 힘든 수려한 디자인이었다. 자연스레 머리핀을 착용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러다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저, 그런데요.”

“어허! 에누리는 안 돼. 나도 밑지고 파는 거니까.”

“아뇨. 그게 아니고…… 저기 저 아저씨들은 왜 저렇게 심각하게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무슨 일 있나요?”

“아아, 저거?”

중년 상인은 마침 잘 만났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상단 후발대가 도착했는데, 글쎄 다들 이상한 이야기를 하더군. 뭔가 싶어서 들어 보니, 불에 타거나 익사한 몬스터 사체가 뒹굴고 있었다더라고. 곳곳에.”

“그게 이상한 일인가요? 누군가 몬스터를 잡으면 그렇게 될 수 있잖아요.”

“무기로 해치운 흔적이 없대.”

아그네스의 귀가 솔깃해졌다. 아버지도, 친한 친구인 하룬도 자경단에서 일하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어떻게 퇴치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용병들이 처리한 게 아닌가 봐요?”

“분명 마법사의 짓일 게야. 용병들이 허공에 떠다니는 빛을 봤다는 둥, 회오리를 봤다는 둥 해서 어수선해. 그래서 다들 저렇게 웅성거리고 있지. 몬스터들이 줄어들어 편하긴 한데 또 다른 위험이 될 수 있거든.”

“상단에서 고용한 마법사는 아닌가 보네요.”

아그네스가 머리핀을 만지작거리며 되물었다. 상인은 손을 홰홰 내저었다.

“이런 작은 행상에 마법사까지 고용한다고? 어림없는 소리지. 쯧쯧. 손해만 막심할걸? 그런데, 그거 살 거니?”

“앗, 아뇨. 저 돈이 없어서. 헤헤.”

아그네스가 만지작거리던 머리핀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머리핀을 다시 집었다.

“얼마입니까?”

“5코퍼요.”

순식간에 머리핀이 아그네스에게 넘어갔다.

거기에 은화가 하나 더 상인의 손에 올려졌다. 상인이 눈을 껌뻑이며 은화와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건 아그네스도 마찬가지였다.

준이 조용히 말했다.

“방금 하신 그 얘기, 좀 더 듣고 싶습니다만.”

* * *

해가 저물 무렵 준과 아그네스는 시장을 나섰다.

아그네스가 머리핀을 얻은 걸 제외하고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은화 하나를 건넸지만, 장신구 상인은 했던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래도 미안한 마음에 이상한 빛을 봤다는 용병과 연결시켜 주었다. 그 용병은 목격한 걸 생생히 전했으나 상인이 말한 것과 비슷했다.

“역시 1실버는 너무했어요. 그 아저씨가 했던 얘기랑 다를 게 없었잖아요?”

“글쎄. 누가 듣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아, 제가 모자란 거군요. 죄송해요. 눈치도 없이 말씀드렸네.”

“하하하. 그건 아니고.”

두 사람은 웃었다.

문득 준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어떤 친근감을 느꼈다. 이 마을에 온 지 고작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더욱 가까워졌다는 느낌이다.

그건 아그네스도 마찬가지였다.

무섭고,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농담까지 하게 되고. 장족의 발전이라 할 만했다.

“그런데 선생님. 진짜 공작가 막내아들 아니에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큰돈을 쓰시고. 아까 저 깜짝 놀란 거 있죠?”

또 막내아들 타령인가. 준은 웃었다.

공작가 막내아들 이야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 물으니 비슷한 소재를 다룬 소설을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단다.

그럴 때마다 화제를 돌렸고, 지금도 그랬다.

“시간이 나면 내일도 상단에 들러서 치유사를 만나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견습생이라고 하면 잘해 줄 거야. 운이 좋으면 책을 얻을 수도 있을 거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배울 게 많겠죠?”

“병원에서 일하는 치유사들과는 좀 다를 거다. 아무래도 전투 현장에 있으니 경험도 풍부하겠지. 치료 방식도 다를 거고.”

“기대돼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곧 갈림길이 나왔다. 진료소와 아그네스의 집은 방향이 달랐기에, 이제 헤어져야 했다.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래도 씩씩하게 돌아선 아그네스가 꾸벅 인사했다.

“전 이쪽으로 가 볼게요. 머리핀 사주셔서 감사해요. 잘 쓸게요.”

“그래. 내일 보자.”

준이 먼저 길을 떠났다.

머리핀을 소중히 품에 쥔 아그네스는 한참이나 서서 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볼이 빨개진 그녀도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진료소에 도착한 준은 진료실을 간단히 정리하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가운을 벗어 걸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릴리.”

대답이 없었다.

기감을 확인하니, 릴리는 자신과 함께 있었다. 그는 조금 엄숙하게 그녀를 다시 불렀다.

“릴리?”

「지금은 부재중입니다. 삐 소리가 나면 메시지를 남겨 주세요. 삐이.」

“농담할 상황 아니니 어서 나와.”

「칫.」

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표정이 평소와는 달랐다. 뭔가 죄를 짓고 들킨 느낌이라고 할까. 보통 눈앞에 나타나곤 했는데, 오늘은 거리가 좀 있다.

“아까 시장에서 들었던 이야기. 솔직히 말해 봐. 네가 한 짓이지?”

「정확히는 제가 아니고 정령들이 한 짓이죠.」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상인과 용병의 말을 들은 준은 그게 마법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탄 것과 익사한 것은 그렇다 치고, 바위에 깔리거나 바람에 휘날린 건 좀 이상했다.

인위적인 피해라기보다는 자연재해에 가까웠으니까.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초자연적인 존재가 개입했다는 이야기에 더 무게가 실린다.

“정령들을 어떻게 소환한 거야?”

「마스터의 능력이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제 능력도 사라지지 않았더라고요. 그래서 불렀죠.」

준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릴리는 상위 개념의 정령이다. 그래서 권능으로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친화력이 강하기에 인간 정령사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정령을 다룰 수 있다.

“누구를 불렀지?”

「프레어, 아쿠아, 윈디, 노움이요.」

“중급 정령을 싸그리 모았군.”

「상급은 안 돼요. 누구 때문에 페어리 퀸이 못 됐으니.」

마지막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문득 궁금했다.

마을 일에 대해서는 귀찮아하거나 뒷전으로 미루던 릴리였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던 걸까?

「친구들이 마을 사방에서 열일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마을은 안전할 거예요.」

“왜 그런 지시를 내렸어?”

「마스터가 너무 관망하는 느낌이라서요. 여기가 좋으면 제대로 지켜 줘야지, 왜 가만히 보고만 있어요? 깝깝하게.」

질문을 받은 준은 가만히 릴리를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빤히 준을 바라보던 릴리가 뭔가를 깨닫고는 흠칫 놀랐다.

「설마…… 지금 제가 마스터를 이긴 건가요? 말빨로? 대박. 오늘을 독립기념일로!」

“그렇게 해서 기분이 좋아진다면 그렇게 생각하든지.”

「아, 좋다 말았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역시 뭔가 꿍꿍이가 있었군요.」

“꿍꿍이까진 아니고.”

릴리가 파드득 날아와 준의 눈앞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준은 쉬이 말해 주지 않았다. 파닥거리다 지친 릴리가 준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그래도 몬스터들이 없는 게 더 낫지 않아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겠지.”

「좋은 건 알겠는데 나쁜 건 또 뭐예요?」

“우선 정령들이 몬스터를 쓸고 다니면 자경단원들은 실전 경험을 쌓을 일이 없어질 거야.”

「음.」

턱을 괸 릴리가 생각에 잠겼다. 설득력이 있는 말이긴 했지만, 여전히 납득이 되진 않았다.

「그래도 몬스터가 없는 편이 나은 거 같은데.」

“판단은 개인마다 다르겠지. 어느 쪽이 옳다고는 할 수 없다.”

「마스터의 판단은 어떤데요?」

“나는 적당한 자극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근력 운동과 마찬가지라고 할까. 한계까지 밀어붙이지 않으면, 인간은 어떻게든 현실에 안주하게 되어 있어.”

「으음.」

“문명의 발전도 비슷한 맥락이야. 투쟁과 경쟁이 없었더라면 빠르게 성장하지 못했겠지. 생활 마법이 전투 마법을 압도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

「으으으음.」

릴리의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확실히 준의 곁에 머물며 보고 느낀 게 있었다. 자경단원들은 더 열심히 훈련하고, 단장인 바이런은 켈세타와 접촉하는 등 나름 자구책을 세우고 있었다.

몬스터의 위협으로부터 생존하고자 하려는 본능이 마을을 차츰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정령들을 물리진 않을래요. 일이 잘못되면, 왠지 마스터가 실망할 것 같아서.」

“고맙다. 신경 써 줘서.”

「바, 방금 고맙다고 한 거예요?」

준은 웃으며 릴리를 쓰다듬었다. 준의 손이 닿을 때마다 하얀빛의 가루가 흩날렸다.

“당분간은 조용할 거야. 그 존재에게 얌전히 있으라고 경고해 뒀거든.”

「어떻게요?」

“네가 정찰을 나갔다가 돌아왔던 그날 밤. 카이젤 드라케의 날개뼈로 전언을 보내 놨다.”

릴리가 화들짝 놀랐다.

에이션트 드래곤의 성물에 반응했다는 건, 적어도 그 존재가 인간이 아니라는 이야기였으니까.

「역시 절대악의 잔당이 쫓아온 거군요!」

“그건 아니야. 만약 그랬으면 벌써 내 앞에 나타났겠지. 한 가지 확실한 건…… 마리도 그 존재와 어떤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거야.”

「예?」

“모든 현상엔 이유가 있다. 그 정도로 엄청난 금제가 우연히 걸릴 리는 없어.”

「어디 보자…… 그럼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건가요? 복잡하네요.」

“복잡하면 풀어야지. 풀 수 없다면, 잘라내든가.”

그 단호한 한마디에 릴리는 마음이 놓였다. 한편으로는 측은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자신의 마스터에게 걸리다니.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운도 없는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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