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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4화 (14/175)

14화 견습생을 위한 의료 기구 (2)

똑똑―

조심스레 준의 방문을 노크한 아그네스가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응답이 없었다. 귀를 기울여 봐도 마찬가지.

“선생님. 선생님?”

묵묵부답.

아그네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그새 주무시는 건가?”

평소라면 그냥 내려갔겠지만, 곧 진료를 시작해야 했다. 아그네스는 문을 열까 말까 고민하다 용기를 냈다.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안은 굉장히 어두웠다. 암막 커튼으로 막아 놓은 탓에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검은빛 유리판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한 빛이 더 선명히 보였다.

그 유리판과 통뼈 같은 막대기가 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준은 그 막대기를 오른손에 쥐고 그 끝을 자신의 왼손에 댄 채 조작하고 있었다.

“저기요. 선생님?”

그제야 준이 고개를 돌려 아그네스를 주목했다.

“죄송해요.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으셔서요.”

“괜찮아. 환자가 왔나?”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곧 마리가 올 시간이에요. 진료 준비는 다 해 놨는데 안 내려오셔서. 약 제대로 됐나 확인받으려고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그럴 만도 했다. 이 장치를 만드는 데 고도의 집중력이 들어갔으니까.

언뜻 보면 간단한 장치인 것 같지만 마도공학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준은 다시 검은빛 유리판을 응시했다. 기이한 영상이 잡히고 있었다. 준이 막대를 움직일 때마다 영상이 조금씩 바뀌는 게 신기했다.

멍하니 그 영상을 바라보던 아그네스가 물었다.

“근데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들고 계신 그건 뭐고요?”

“이거? 글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으음, 아직 마리가 오려면 시간 여유가 좀 있나?”

“제가 약을 제대로 만들었다는 가정하에서요.”

“그럼 잠깐 들어와 봐.”

아그네스가 문을 닫고 준의 옆에 섰다.

준은 뼈같이 생긴 막대기를 들고 설명을 시작하려다가, 문밖의 또 다른 기척을 느끼곤 발소리를 죽인 채 문으로 걸어갔다.

벌컥!

“우왁!”

갑작스레 문이 열린 탓에, 몰래 밖에서 엿듣고 있던 하룬이 안으로 굴러 넘어졌다.

어이가 없는 상황에 가만히 있을 아그네스가 아니었다.

“너 거기서 대체 뭐 하고 있던 거니?”

“아, 아니. 그냥 지나가다가 무슨 소리가 나는 거 같아서…….”

“그런다고 남의 방을 엿들어?”

엄청난 실례라고 말하려다 아그네스는 입을 다물었다. 자기도 허락 없이 문을 열긴 했으니까.

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둘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하지만 그가 이번 일을 그냥 넘기려고 하니 아그네스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나섰다.

“선생님. 이럴 땐 단단히 혼을 내셔야 한다고요. 계속 오냐오냐 하면 버릇 잘못 들어요.”

“괜찮아. 어차피 부르려고 했으니까.”

“역시 그렇죠? 선생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저 하룬뿐이라니까요. 하하핫!”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래.”

아그네스는 여전히 불만이었지만, 더는 추궁할 수 없었다. 준이 설명을 시작해 버려서.

“이건 생명체의 내부를 관찰하고 병을 진단할 수 있는 기구다. 배를 가르지 않으면 장기를 볼 수 없는데, 이 도구를 쓰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형상을 볼 수 있지.”

“정말요? 이것도 마도공학 기계인가요?”

“그래. 이 막대 끝에서 마나가 흘러나온다. 마나의 파장을 이용해 내부의 모습을 영상으로 구현하는 장비라고 할 수 있지. 이 유리판이 마나의 움직임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주고.”

“어…… 그럼 마나를 다룰 수 있어야 쓸 수 있겠네요?”

아그네스는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였지만, 준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준은 통뼈 막대기 끝에 꽂혀 있는 작은 부속을 가리켰다.

손가락만 한 나무토막이었다. 하지만 준의 손을 거친 이상 더 이상 평범한 나무가 아니다. 고농도의 마나를 응축하고 있었다.

“여기에 마나가 저장되어 있으니까 그냥 버튼을 눌러 사용하면 돼.”

“그럼 저도 쓸 수 있는 건가요?”

“물론. 중요한 건 유리판에 나타난 영상을 어떻게 판독하느냐 하는 건데…… 어디 보자, 마침 좋은 표본이 왔으니 성능을 확인해 볼까?”

준의 시선이 하룬을 향했다. 흠칫 놀란 하룬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설마 저요?”

“여기에 너밖에 더 있니?”

“전 대체 이 진료소에서 어떤 역할을 맡은 걸까요? 혼란스럽네요.”

더는 저항하지 못했다. 아그네스의 손에 이끌려 하룬은 상의를 벗고 침대에 누워야 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하는 하룬을 보며 준이 미소를 지었다.

“하나도 안 아프니까 겁먹을 거 없다.”

“누, 누가 겁을 먹었다고 그럽니까?”

“아니면 말고.”

준은 통에 담긴 걸쭉한 액체를 하룬의 배에 바르기 시작했다. 차갑고 질척거리는 게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하룬이 인상을 찌푸렸다.

“느낌 겁나 안 좋네요. 으, 대체 그건 뭡니까?”

“공기의 간섭을 줄여 주는 윤활제다. 이 약제를 바르고 마나를 쏘면 훨씬 더 선명한 영상을 얻을 수 있지.”

“아니, 뭘로 만든 건데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냐고요. 꼭 슬라임 녹인 걸 바르는 거 같은 느낌인데.”

“맞아.”

“……네? 잠깐, 제가 지금 뭔가 잘못 들은 거 같은데?”

“슬라임 맞다고.”

“우아아악!”

하룬이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리자 아그네스가 팔을 붙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슬라임의 체액은 부식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그걸 바르면 어떡해요! 내 배 다 녹겠네! 물! 네아 물 가져와!”

“정제한 거라서 괜찮다.”

“아? 그렇군요. 진즉 말씀하시지. 이제 안심입니다. 하하하.”

“어휴, 녹는 거라면 선생님이 저렇게 맨손으로 배에 바르겠어? 선생님 손도 녹을 텐데. 하여간 엄살은.”

하룬은 입술을 빼죽거리며 불만을 표했다.

그렇게 윤활제 도포가 끝나고, 준은 뼈 막대기를 하룬의 배에 댔다.

딸칵. 버튼이 눌렸다.

우우웅!

공명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빛 유리판에 영상이 띄워지기 시작했다. 빛들이 음영을 만들며 육안으로 구분할 수 있는 모양을 만들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아그네스가 물었다.

“이게 하룬의 뱃속인가요? 기분 탓인가. 뭔가 지저분해 보이네.”

“야.”

“실제 뱃속의 모습하곤 좀 다르다. 색과 질감이 좀 다르지. 빛의 음영으로 표현되는 영상인데, 세밀한 진단은 어렵지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다. 이게 심장이고, 이쪽이 위, 이쪽이 간이다.”

“흐응,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유리판을 보고 있으니 좀 어지럽기도 하고요.”

아무리 아그네스가 재능이 있다고 해도 생소한 영상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준은 다시 막대를 심장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유리판에 손가락을 가리키며 친절히 설명했다.

“이 안쪽 검은 영역이 줄었다 늘어나는 게 보이지? 지금 심장이 뛰고 있는 거야.”

“와, 신기해요. 사람이 죽으면 심장이 멈추죠? 두근거리는 소리가 안 나니까.”

“그럼 저 움직임도 멈추겠지. 한번 실험해 볼까?”

“헉!”

유리판에 띄워진 하룬의 심장이 더 빠르게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다. 준이 씨익 웃었다.

“농담이니까 긴장하지 마.”

“……농담도 할 줄 아셨어요? 처음 알았네.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농담하지 마세요. 앞으로. 예? 생사람 잡겠네.”

“참고하도록 하지.”

준이 뼈 막대기를 거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영상이 사라져 버렸다. 아그네스는 아쉬움에 탄성을 내뱉었지만, 다음 기회가 또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도구를 정리하며 준이 말했다.

“조만간 호프만 씨가 진찰을 받으러 올 거다. 만약 이 기구를 사용한다면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부풀어 있는 혈관을 볼 수 있겠네요.”

“잘 보이는지 아닌지 그때 한번 확인해 보자.”

“예. 그런데요. 저…… 선생님.”

아그네스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말을 이었다.

“앞으로 진찰하실 때, 마나를 쓰지 말고 이 기계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유는?”

“화면을 많이 봐야 익숙해질 것 같아서요. 따로 가르쳐 주시는 것보다 제가 옆에서 보조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게 효율이 좋으니까.”

“그래. 최대한 그렇게 해 보마.”

“감사합니다!”

아그네스가 꾸벅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며 하룬은 마음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림을 느꼈다. 아그네스가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니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준은 그 속내를 읽었다.

‘조만간 검세를 좀 봐 주도록 할까? 한쪽만 도와주면 질투가 날 테니.’

「아이고. 그만 좀 퍼주라니까요! 싹퉁머리 없는 애 도와줘 봐야 나중에 짐만 된다고!」

‘우리 진료소를 위한 투자라고 하자. 소드마스터 문지기 한 명 정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설마 이 마을에 정착하기로 정한 거예요?」

뜻밖의 질문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준이 웃으며 릴리에게 상념을 보냈다.

‘아직.’

그때 아래층에서 방울 소리가 들렸다.

올 사람은 정해져 있기에, 아그네스와 하룬이 재빨리 아래로 내려갔다. 준도 방을 정리하고 진료실로 향했다.

하얀 가운이 펄럭이며 준의 몸을 감쌌다.

* * *

진료실로 내려온 준은 살짝 놀랐다. 마리의 모습이 조금 이질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생각보다 성장 속도가 빠른 것 같군요.”

“아무렴요. 키가 정말 많이 컸습니다. 이제 옷도 잘 안 맞더군요.”

불평이 아니었다. 마리의 부모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평범한 가정의 보물은 바로 자녀들이니까.

“키를 좀 재 볼까요?”

이제 익숙해졌는지 마리가 알아서 기둥을 등지고 섰다. 준은 의료용 칼날로 홈을 파고 어제 팠던 것과 비교해 보았다.

“확실히 성과가 있는 듯합니다. 꾸준히 키가 크고 있군요.”

흡족한 표정을 지은 준이 약을 준비시켰다.

물론 그 전에 사탕이 든 가죽 주머니를 꺼내 놓는 걸 잊지 않았다. 역시나 마리는 눈을 반짝이며 가죽 주머니만 바라보고 있다.

곧 약이 준비되었다.

“어제보다 조금 더 쓸 거다. 그래도 잘 마실 수 있지?”

“…….”

마리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약을 마시기 시작했다.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끝까지 먹는 데 성공했다. 다 먹고 난 표정은 울기 직전 같았다. 준은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먹였다.

덕분에 천진난만한 아이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요.”

“맛있다고?”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하지 않은 한마디였지만, 마리는 분명 말을 했다.

“지금 말을 한 건가요?”

“오! 세상에!”

그 놀라운 성과에 마리의 부모는 물론, 아그네스와 하룬까지 환하게 웃었다. 준은 특별히 사탕 하나를 더 마리의 손에 쥐여 주었다.

마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잘했다. 내일 또 보자.”

고개를 끄덕거린 마리가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진료소를 나섰다. 배웅을 나온 아그네스는 보람찬 눈으로 마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놀랐어요. 언젠가 말을 하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거든요.”

“네가 약을 잘 만들어서 그래.”

“선생님이 마법을 부린 게 아니고요? 솔직히 월영초가 없었다면 이렇게 빨리 낫지 않았을 거 같아요. 그리고 그걸 구할 수 있었던 건 선생님 덕분이고.”

잠시 말이 끊겼다.

아그네스는 물론이고, 하룬도 과연 준이 어떤 대답을 내어놓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시선은 준을 떠나지 않았다.

곧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어제도, 오늘도 약을 만들 때 마리가 빨리 낫기를 바라면서 만들지 않았나?”

“당연하죠.”

“하룬이 독침에 당했을 때도.”

“그건 뭐 친구니까…….”

“그런 정성이 조금씩 쌓여 놀라운 결과를 내는 거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염원이 담기지 않은 기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무슨 일이든.”

“정말 기적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요?”

“글쎄? 이곳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한번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그네스가 웃었다. 그녀의 시선이 어느새 작아져 있는 마리의 뒷모습을 향해 있었다.

“있죠. 왜 제가 치유사가 되려고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조금은요.”

“잘됐구나.”

그 한마디만을 남긴 채, 준은 진료소 안으로 들어갔다.

아그네스는 어깨를 활짝 펴고 심호흡을 했다. 차가운 바람에 가슴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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