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13화 (13/175)

13화 견습생을 위한 의료 기구 (1)

누아 마을 진료소는 늘 아침 일찍 문을 연다.

하지만 아침이 훌쩍 지날 때까지 환자가 한 명도 오지 않았다. 현관을 열고 밖을 힐끔거린 아그네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장사가 안 되는 가게의 주인들이 어떤 심경인지 알 것 같았다.

“환자들이 한 분도 안 오시네요.”

“오히려 다행 아닌가? 그만큼 아픈 사람이 없다는 의미니까. 이따 오후에 마리가 올 테니 준비 미리 해 둬.”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네에. 준비해야죠.”

“난 잠시 외출하마. 금방 다녀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라고 대꾸한 아그네스가 약초 준비를 위해 진료실로 들어갔다. 준은 미리 준비한 것들을 가방에 넣고 진료소를 나섰다.

목적지는 자경단 본부가 있는 마을 입구 쪽이었다.

길을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어제 하룬을 만난 곳이 자경단 본부 근방이었으니까.

준은 길을 걸으며 주변 풍경을 살폈다.

마을 사람들이 아침부터 논밭 일을 하고 있었다. 빨래를 하는 아낙들의 모습도 보인다. 평화로운 누아 마을의 일상을 눈에 담으며, 준은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 릴리가 잠에서 깨어났다.

「저 사람들 참 한가롭네요. 부러울 정도네. 밖에서 몬스터들이 흉계를 꾸미고 있는 걸 모르고 있는 걸까요?」

‘아는 게 더 이상한 거지. 자경단에서도 움직임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우리니까 가능한 일이다.’

「어휴, 답답해.」

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릴리도 이 마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면 답답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걱정이 되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준은 어느새 자경단 본부에 도착했다.

「본부라기보다는 그냥 막사 같은데요? 촌스럽게 이게 뭐람.」

‘시골 마을치고 이 정도면 훌륭하지. 별도의 훈련장을 갖추고 있는 곳은 드물어.’

「그럼 다행이고요.」

준이 다가오자 경계를 서던 자경단원 하나가 인상을 썼다. 일전에 준이 마을에 처음 방문했을 때, 하룬과 함께 경비를 섰던 그 청년이었다.

청년이 물었다.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다행히 첫 만남 때처럼 무례하게 굴진 않았다. 준이 누아의 치유사가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단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안에 계십니까?”

“잠시 기다리시죠.”

사내가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나와 들어오라고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릴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막사를 개량한 임시 초소 같았다. 무기 등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이런은 거대한 목제 테이블 위를 주목하고 있었다. 낡은 지도가 깔려 있었는데, 누아 주변이 제법 정교하게 묘사된 지도였다.

“무슨 일인가? 내가 알기로 부상당한 단원들은 없는데 말이야.”

바이런의 시선은 여전히 지도를 향해 있었다.

준은 알 수 있었다.

붉은색 장기 말들이 지도에 뭉쳐 있었다. 몬스터들의 수상한 움직임을 눈치채고 있는 게 분명했다.

“상의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상의? 나에게? 촌장님을 먼저 찾아가야 하는 게 아니고?”

“단장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제야 바이런이 지도에서 눈을 떼고 준을 응시했다. 기백이 좋았다. 아마 평범한 사람이라면 상당한 위압감을 느꼈을 것이다.

“앉지.”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았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는 없었다.

“덕분에 하룬이 빨리 나았네.”

“아그네스가 정성껏 돌본 덕입니다.”

예상과는 다른 대답에 바이런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딸이 그 정도로 치유술을 익히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딸애는 정식으로 치유술을 배운 적이 없는데?”

“치유의 기본은 정성입니다.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치료는 효과를 보기 힘들지요. 그런 면에서, 따님은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흐음.”

바이런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실력이 좋고 나이가 젊다면 조금은 으스댈 줄 알았는데, 준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욕망에서 해탈한 느낌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이상한가?

“뭐, 그건 그렇고. 상의할 게 뭔지 한번 들어나 보지.”

“약초 채집을 본격적으로 할 계획입니다. 호위 병력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하룬으로는 부족해서.”

“약초는 충분하다고 들었는데? 보존 마법이 걸려 있다고 말이야.”

“맞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쓰기에 충분한 양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무런 일이 없을 때의 이야기고,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지요.”

“흠…… 어떻게 다르다는 건지?”

“몬스터들이 집단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종이 다른 것들도 무리 지어 다니는데, 신기하게도 서로 물어뜯지 않더군요.”

바이런이 살짝 놀랐다.

그건 자경단원 중에서도 일부 인원들만 알고 있는 기밀이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퍼진다면 좋을 게 하나 없는 정보였으니까.

표정을 원래대로 돌린 바이런이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알게 됐나?”

“약초를 채집하다 우연히 목격했습니다.”

“용케도 살아났구만.”

“다른 사람들보다 운이 좋은 편이라.”

바이런이 말없이 한참을 쏘아보았다. 준이 뭔가 숨기는 것 같은데, 알기가 어려웠다. 준은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결국 바이런이 한발 양보했다. 상대는 곧 일어날지도 모를 전투를 대비해 약품을 더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부하들의 안위가 달린 문제였다.

“몇 명이나 필요하지? 보충 병력 말이네.”

“세 명 정도면 좋겠습니다. 하룬을 포함하면 호위 병력은 넷이 되겠군요.”

“채집엔 아그네스를 보낼 생각인가?”

문득 궁금했다.

강한 신념을 가진 원칙주의의 사내가 어떻게 공과 사를 구분하는지 말이다.

“약초학 실습도 시킬 겸 보낼 생각입니다. 저는 진료소에서 환자를 보고.”

“알겠네. 실력 좋은 친구들을 조만간 보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뜻밖에 그는 선뜻 허락했다.

하지만 바이런은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니었다.

“그런데 약초를 많이 캔다고 도움이 될까? 치유사의 수는 정해져 있는데 말이네. 아그네스가 돕는다고 해도 한계가 있을 터. 그건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지?”

바이런이 씨익 웃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준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가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손바닥 반만 한 휴대용 나무 상자였다.

그런데 그것을 본 바이런의 눈이 번뜩였다.

“설마 이건……!”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응급처치 키트를 만들어서 자경단원들에게 보급할 생각입니다. 조만간 큰 전투가 벌어지지 않을까 해서요.”

바이런은 조심스레 목제 상자를 열었다.

예상이 맞았다. 그것은 응급처치 키트였다. 곱게 빻은 약초와 압축한 붕대, 그 외의 여러 약품들이 칸을 꽉꽉 채우고 있었다.

하나하나 효과가 굉장한 약초들이었다.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00년 전 대륙전쟁 이후로 응급처치 키트의 중요성이 널리 퍼져나갔다.

부상 초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환자의 예후가 달라진다는 연구 논문은 이제 왕립 학술원에서는 철 지난 테마로 여겨질 정도였다.

바이런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걸 누아에서 보게 될 줄이야. 자네, 솔직히 말하게. 기사단 의무관 출신인가? 아니면 왕립기사단? 그러지 않고서야.”

응급처치 키트는 기사단에서 주로 사용하는 의약품이었다. 개당 단가가 높고, 아무나 만들 수 없기에 한정적으로 사용되는 것들이 많다.

제조 방법이 극비로 전해지고 있고, 또 효율이 좋지 못하기에 사용하는 곳은 드물었다.

아무튼 준은 사실이 아니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아 마을 주변에는 좋은 약재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제가 조제법을 알고 있으니 만드는 데 문제는 없을 겁니다.”

“확실히 키트 생산이 가능하다면 단원들의 피해도 줄겠어.”

“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되겠지요.”

고개를 끄덕인 바이런이 키트를 준에게 돌려주었다. 하지만 준은 받지 않고 다시 바이런 앞에 밀어놓았다.

“첫 키트는 단장님이 쓰십시오. 곧 다른 단원들에게도 보급하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네. 부하들을 놓고 좋은 걸 쓸 수 있나. 가서 하룬에게 줘. 앞으로 위험한 일들을 많이 하게 될 테니.”

“그러지요. 그럼 이만.”

준은 기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바이런이 나가려던 그를 불러 세웠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는 비밀일세.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네.”

“그건 어렵지 않지만 충분히 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네. 전령을 보내 켈세타에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야. 지원 병력이 온다면 일이 좀 수월해지겠지.”

과연 그것만으로 괜찮을까?

당연한 의문을 뒤로한 채 준은 자경단 본부를 나섰다.

* * *

“계십니까?”

준은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간판이 달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관 겸 주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굉장히 좁은 곳이었다.

그래서 주인장인 호프만의 모습이 바로 보였다.

그는 준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카운터에 앉아 한숨을 푹 내쉬고 있었다.

“호프만 씨.”

“응? 자네. 진료소는 어쩌고 대낮부터 무슨 일인가?”

“잠깐 자경단 본부에 갔다 오는 길입니다. 상태는 괜찮으신…….”

준은 말을 맺지 못했다. 호프만이 황망한 표정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쉿. 조용해! 안사람이 들으면 아주 난리가 날 거라고! 이쪽으로.”

준은 호프만을 따라 창고 겸 휴게실로 사용하는 쪽방으로 들어갔다. 각종 술과 음식물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었다.

“한잔할 텐가?”

“근무 중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참 재미없는 친구로군. 아그네스가 적잖이 고생 좀 하겠어. 상태는 뭐 괜찮아. 어제 봐 준 덕인지 아픈 것도 좀 덜한 것 같고.”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한숨을 내쉰 호프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켈세타까지는 먼 길일 텐데 조심히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엉? 난 어떻게 한다고 말 안 했는데?”

“척 보면 알지요.”

씨익 웃은 준은 가방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냄새가 강한 약재가 들어 있는 주머니였다.

“이건 뭔가?”

“혹시 복통이 갑자기 심해지거나 어지럼증이 생기면 바로 드십시오.”

호프만이 머뭇거리다 주머니를 받았다.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그런 표정이다.

“자네는 속도 좋구만. 불쾌하지 않아? 까놓고 말해 자네를 못 믿어서 다른 병원으로 가는 건데 말이지. 나라면 버럭 화를 냈을 텐데.”

“치유사를 선택하는 것은 환자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조금도 불쾌하지 않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고맙네.”

“잠깐 진찰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호프만은 순순히 배를 깠다. 준은 손을 올리고 마나를 일으켰다. 미리 주입한 마나가 반응하며 입체적인 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곧 준이 손을 거뒀다.

“아직까지는 나쁘진 않군요. 출발은 언제입니까?”

“상단에 물어보니 닷새 이후에 출발한다고 하더군.”

“닷새라. 그럼 그 전에 하나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켈세타로 떠나기 전에 진료소로 오셔서 진찰 한 번만 받아 주시죠.”

“어? 그게 다인가?”

“네.”

“허허! 그야 어렵지 않지. 꼭 들르겠네.”

살짝 묵례한 준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나섰다. 그때 호프만이 따라 나왔다. 손에는 갓 구운 빵이 담긴 바구니가 있었다.

“이건?”

“가서 애들하고 나눠 먹게나. 셋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를 맛이지만 진료소니까 상관없겠지.”

“하하하. 다들 좋아하겠네요. 잘 먹겠습니다.”

빵을 받아 든 준은 바로 진료소로 향했다.

진료소는 여전히 한가했다. 환자가 다녀간 흔적은 없었다. 하룬은 마당에서 검을 손질하고 있었고, 아그네스는 진료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다녀왔다.”

“어머, 웬 빵이에요?”

“오는 길에 주점에 들렀는데 호프만 씨가 주셨어. 하룬하고 나눠 먹어라.”

“선생님은요?”

“하나 남겨 놔. 난 잠시 방에 들어가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고.”

“넹~”

아그네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하룬에게 달려갔다. 준은 모르고 있지만, 호프만이 만든 빵은 누아 마을의 명물이었다.

준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하나와 기다란 테이블이 놓인 단출한 방이었다. 우선 테이블에 올려둔 것들을 한쪽으로 치웠다. 그리고 아공간 창고를 열었다.

릴리가 아공간 창고 옆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뭐 하려는 거예요? 저 보너스 주시려고? 에이, 안 그러셔도 돼요. 우리 사이에 무슨.」

“의료기구를 하나 만들 생각이다.”

「……내 말은 이제 귓등으로 들으시네. 에휴, 그런 건 만들어서 뭐 해요? 마스터가 그냥 뚝딱하고 치료해 버리면 그만인데.」

“아그네스는 마나를 다루지 못하니까.”

「그냥 마나를 다루도록 만들어 주면 그만이잖아요. 마스터라면 누워서 떡 먹기인 일일 텐데. 임독양맥 타통 얍! 하면서 등 두드리면 되잖아요.」

“그럼 실력이 안 늘잖아.”

「옴마나. 은근 잔인한 구석이 있는 분이라니까? 역시 부하를 굴리는 데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셔.」

피식 웃고 만 준은 아공간 창고에서 검은빛 유리판을 하나 꺼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유리판이었지만, 그것은 무려 에이션트 드래곤 ‘카이젤 드라케’를 물리치고 얻은 전리품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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