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배 안의 시한폭탄 (1)
몸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였기에 진료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했다. 그들은 준이 진찰을 한다고만 생각했다.
‘뭐라도 발견한 거냐?’
「대박 사건이라니까요. 지금 한가하게 진찰이나 할 때가 아니라구요!」
이렇게 다급한 목소리는 참 오랜만이었다.
절대악 케이아스의 흔적을 처음 발견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릴리가 간혹 과장되게 말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진실을 왜곡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준은 사실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손을 거두고 아그네스에게 지시를 내렸다.
“우선 찜질부터 하는 게 좋겠어. 부탁하지. 너무 뜨겁게 하지는 말고.”
“어? 진찰 벌써 끝나신 거예요?”
“아니. 도구가 좀 필요하다. 창고에 보관해 놓은 것 같은데 금방 다녀오마.”
“알겠어요.”
준은 진료소를 나서 옆에 마련된 허름한 창고로 들어갔다. 곧 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볼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대체 뭘 보고 온 거야?”
「전에 몬스터들이 집단행동을 한다고 했었잖아요? 마스터가 위성으로 봤다고.」
“그래.”
「세상에, 놈들이 훈련을 하고 있었어요!」
훈련이라는 표현에 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몬스터들은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 부족을 이루는 것들도 간혹 있지만, 훈련까지 하는 경우는 없다. 이 근방에 고등 지성을 가진 것들은 없었으니까.
팔짱을 끼며 잠시 생각에 잠기던 준이 명했다.
“자세히 설명해 봐. 구체적으로 어떻게 훈련을 하는지.”
「그게요!」
기다렸다는 듯 릴리가 과장을 섞으며 본 것을 나열했다. 고블린, 슬라임, 대형 거미 할 것 없이 몬스터들이 도열하며 움직이는 것을 봤단다.
무기도 준비되어 있었다. 어디서 구해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무기를 쥘 수 있는 몬스터들은 그것을 들고 전투를 하듯 휘둘렀다고 전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몬스터 사이에서 충돌이 전혀 없었다는 점.
몬스터들은 본능에 의해 움직이고, 그 본능은 파괴에 가깝다. 때문에 동족이 아니라면 서로 엉켜 싸우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확실히 이상하군.”
「당연하죠. 서로 모이면 물고 뜯고 싸울 텐데 사이좋게 행군하는 걸 보니 소름이 돋았다니까요?」
“무기는 대체 어디서 구한 걸까?”
「아마도 위성을 날려 버린 그놈 짓이겠죠.」
확신을 할 순 없지만 그럴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릴리가 한 바퀴 빙글 돌더니 눈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빨랑 솔직히 말해 봐요. 마스터는 그놈 정체 알고 있죠? 설마 절대악 케이아스의 잔당이 쫓아온 건 아니겠죠?」
“그럴 리는 없다. 루치아가 그 정도 안배는 해 줬을 거야. 아무튼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 파편에 남아 있던 기운은 미약해서 확신하기 어려워. 좀 더 조사해 봐야 해.”
「그럼 확 가서 조사하면 되지 왜 이렇게 미적대고 있어요? 프라가라흐 소환해서 그냥 통째로 확…… 아, 프라가라흐는 아직 무리죠?」
“그전에 내 행동 하나가 마을 사람들에게 큰 재앙이 될 수 있으니까.”
릴리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휴, 아주 성인군자님 납셨네. 아무튼 알아서 하세요. 마스터랑 멀리 떨어져 다녔더니 좀 지치네. 쉴게요. 내일 봐요. 뿅.」
릴리가 모습을 감췄다.
창고 벽에 기대 잠시 생각에 잠기던 준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아공간에서 통뼈 하나를 꺼내 들곤 밖으로 나왔다.
그가 시선을 돌린 곳은 어둠에 휩싸인 마을 뒷산이었다.
준은 통뼈에 마나를 불어넣고 그쪽을 향하게 했다.
‘거기에 있다면, 응답해라.’
순간 준은 강한 이끌림을 느꼈다.
운명의 이끌림과 비슷했다. 산은 고요했으나 마치 이곳으로 오라는 것 같았다. 그만큼 산이 품은 어둠은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
미약하게 공명하던 통뼈에서 마나가 툭 사라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상대의 존재를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역시 그랬군. 조만간 찾아가겠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도록.’
산에서 냉정하게 시선을 거둔 준은 통뼈를 다시 아공간 창고에 던져 넣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진료소 안은 시끌벅적했다.
“와하하하!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냐?”
“말도 마세요. 오죽하면 선생님께서 심각한 합병증이 생겼는데, 그게 엄살이라고까지 하셨겠어요?”
“그거 명언이군!”
호프만은 아그네스는 물론 하룬과도 가까운 모양인지 주점 주인 특유의 입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녀석. 독침에 좀 맞았다고 그렇게 엄살을 떠냐? 하긴, 어릴 때부터 아픈 거라면 아주 질색을 했지.”
“정말 친구라는 게 부끄러워 죽겠다니까요.”
“야! 소문 좀 그만 내고 다니라고! 환자에게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는데…… 어? 선생님 오셨네요. 그럼 난 이만.”
하룬은 도망가듯 밖으로 나갔고, 아그네스는 찜질용 수건을 한쪽으로 정리했다. 침상으로 다가온 준이 호프만의 허리를 살짝 눌렀다.
“좀 괜찮으십니까?”
“어어. 덕분에 많이 좋아졌네. 이제 며칠간은 살 만하겠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진찰을 해 보겠습니다.”
“번거롭게 뭐 그러나? 시간이 늦었으니 어서 가 봐야겠어. 늦으면 마누라가 구박한다고.”
“잠깐이면 됩니다.”
옷을 다시 입으려던 호프만은 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어차피 잠깐이니 진찰을 받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아그네스의 설득이 발목을 잡았다.
곧 준은 자리에 앉아 호프만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정순한 마나가 손바닥을 타고 흘러나왔다. 동시에 준은 눈을 감았고, 마나가 보내오는 시각 정보를 하나로 모아 머릿속에 입체로 된 상(像)을 띄웠다.
‘음? 이건…….’
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다시 눈을 감고 마나가 만들어 내는 상에 집중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의 집중력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곧 모든 진찰이 끝나고, 마나를 거둔 준이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의자에 손을 뻗으며 권했다.
“호프만 씨. 잠깐 이쪽으로 앉으시죠.”
“왜 그렇게 진지해? 설마 뭐가 잘못됐나?”
오래된 경험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호프만은 옷을 대강 주워 입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제야 준의 입이 열렸다.
“허리가 아픈 건 언제부터였습니까?”
“진찰 결과만 말해 주면 되지, 그건 왜 묻나?”
“아저씨. 문진도 중요한 진찰 중 하나라고요. 선생님 말씀 들어주세요.”
아그네스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호프만은 쉬이 입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뭐, 아픈 거야 꽤 됐지. 젊었을 때부터 허리가 영 안 좋았어. 도시에서 막일도 하고 징집됐을 때 부상도 당했거든.”
“최근에 갑자기 심해졌지요? 더부룩한 느낌과 복통도 있었을 거고. 아마 다리도 자주 부었을 겁니다.”
“엉? 그건 어떻게…….”
“허리가 아픈 원인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아파서 그냥 지나치신 모양인데, 이건 단순 요통이 아닙니다. 조금 위험한 상황입니다.”
“뭐, 뭣?”
위험하다는 말에 진료실 내부가 조용해졌다.
호프만은 침을 꿀꺽 삼켰고, 아그네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며, 하룬은 진료실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설명이 좀 필요하겠군요. 아그네스. 종이와 펜 좀 갖다 줘.”
“네!”
곧 펜촉에 잉크를 묻힌 준이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슥슥슥―
먼저 사람 외형을 그렸고, 배와 양다리로 이어지는 굵은 혈관을 안에 그려 넣었다.
혈관은 사람 인(人)자 모양이었는데 그 가운데에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표시를 했다.
“사람의 배 안엔 이렇게 양쪽 다리로 이어지는 커다란 핏줄이 있습니다. 지금 호프만 씨는 여기가 이렇게 부풀어 있어요. 직경이 두 배 정도 늘어나 있어 위험한 상황입니다.”
“이거 설마…… 이렇게 부풀어 오르다 빵 하고 터지는 건가?”
“정확히 보셨습니다.”
호프만이 헛숨을 들이켰다. 혈관이 터진다니. 듣도 보도 못한 끔찍한 일이다.
“호, 혹시 잘못 진찰한 건 아니겠지?”
“선생님의 실력은 확실해요. 마리가 목숨을 구한 거 아저씨도 아시잖아요? 촌장님도 인정하셨고요.”
“그래도…….”
의심과 걱정이 섞여 표정이 복잡해졌다. 이럴 땐 몰아붙이는 것보다 한발 물러서는 게 효과적이라는 것을 준을 잘 알고 있었다.
준은 펜을 내려놓으며 차분히 말했다.
“의심되신다면 켈세타의 병원에 가서 다시 진찰을 받아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마침 상단이 와 있으니 돌아가는 길에 함께 가면 되겠군요. 하지만 그쪽에서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단순한 외상이 아니라서…… 마나로 치료하는 것도 한계가 있겠죠.”
호프만은 할 말을 잃었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럼 완치는 불가능한 건가?”
“가능하긴 합니다만.”
준은 여전히 신중한 태도였다. 잠깐 밝아졌던 호프만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지고 말았다.
“그 과정은 쉽지 않을 겁니다. 매일 진료소에 오셔서 치료를 받으셔야 하고, 약도 드셔야 하며 무엇보다도 잘못된 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습관을 어떻게?”
“이 시간부로 술은 절대 안 됩니다. 식사량도 줄여서 살도 빼야 합니다.”
“뭐? 그건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는데!”
“선택은 호프만 씨의 몫입니다.”
준이 선을 딱 긋자 호프만이 신음을 내며 생각에 잠겼다. 말 그대로 선택은 자신의 몫이었다.
눈앞의 청년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뜬금없이 나타난 외지인의 말을 덜컥 믿을 만큼 호락호락한 성질도 아니었다.
호프만은 켈세타의 병원과 준의 진료소를 두고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겠나?”
“그러지요. 우선 약을 처방해 드릴 테니 잘 챙겨 드십시오.”
“고맙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빨리 결단을 내리셔야 할 겁니다. 호프만 씨의 배 안에 폭탄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준은 아그네스에게 처방을 지시했다. 약을 받아 든 호프만의 얼굴엔 어느새 취기가 싹 사라져 있었다. 호탕한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준과 아그네스가 직접 배웅을 나왔다.
“조심히 가세요. 아저씨. 이제 술 드시면 안 돼요 정말. 또 드시면 아주머니한테 이를 거예요.”
“그래. 또 보자꾸나. 고마웠소. 선생.”
“살펴 가십시오.”
애써 웃어 보이며 몸을 돌린 호프만이 길을 따라 내려갔다. 평소라면 배웅도 없이 진료실을 정리했겠지만, 아그네스는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음이 좋지 않네요.”
“친한 사람이 아파서?”
“네…….”
아그네스의 어깨가 축 처졌다. 준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지도, 말로 격려하지도 않았다. 멀어지는 호프만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전에 진료소를 청소할 때가 생각나는군. 치유사가 되는 건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 어깨가 무겁다고 했던 말, 기억나?”
“기억나요.”
“앞으로 이런 일은 자주 있을 거야. 호프만 씨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겠지. 그래도 치유사가 되고 싶나?”
“그건…….”
오히려 예,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이 나왔다면 준은 실망했을 것이다. 아그네스는 대답하지 못했고, 솔직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준이 그제야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앞으로 천천히 찾아보도록 해라. 네 힘으로.”
“알겠어요.”
고개를 살짝 숙인 아그네스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번엔 하룬이 대신 나왔다.
“호프만 아저씨 말입니다. 선생님께 치료를 받을까요?”
“아니.”
“냉정하시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어요? 사람 일이란 거 모르잖아요.”
“어디든 사람 사는 거야 다 똑같으니까. 상단이 켈세타로 돌아갈 때 호프만 씨가 동행한다에 1골드 걸지.”
“아씨, 치사하게 베팅으로 죽이기입니까? 저 1실버도 없는 사람이라고요.”
“자경단엔 보수가 없나?”
“당근 무보수죠. 마을 주민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건데 돈을 왜 받아요.”
준은 공평하게 하룬의 어깨도 다독여 주고 진료소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의 진료는 이것으로 끝났다. 아그네스와 하룬에게 마무리를 맡긴 준은 다소 노곤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갔다.
‘내일은 바이런 씨를 한번 만나 봐야겠어.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겠지.’
준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어두운 산속에서 몬스터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