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배 안의 시한폭탄 (1)
숲길은 한적했다.
어느새 노을이 되고 밤이 찾아왔다.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준의 관심을 끌진 못했다.
마을에서 멀어지자 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웬일이래요?」
“뭐가?”
「마스터가 힘을 숨긴다는 컨셉 아니었어요? 아까 그 싸가지 없는 꼬맹이 앞에서 검을 휘두를 줄은 몰랐네.」
“어느 정도 인지는 시켜 두는 게 편하니까. 혼자 다닐 때마다 따라붙는 것보단 낫잖아.”
「그건 그렇죠. 그래도 그 꼬맹이 제법이던걸요? 몇 번 휘두른 걸로 마스터의 실력을 간파할 정도면.」
“좋은 스승을 둔 덕이겠지.”
그렇게 준은 릴리와 숲길을 거닐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었고, 숲속이라 어두컴컴했지만 라이트 마법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안광을 돋우는 것만으로도 주변이 모두 보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익숙한 풍경이 나타나자 준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특히 준은 바닥에 시선을 집중했다. 곧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바닥이 툭 패여 있는 것이, 위성을 쏘아 올린 장소가 맞는 것 같았다.
준은 마나를 일으켜 바닥을 조사했다. 예전에 흘렸던 자신의 기운이 공명을 일으켰다.
“확실해. 이 근처에 잔해가 있을 확률이 높아. 한번 찾아보자.”
「넹.」
릴리가 날개를 파닥이며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준도 풀숲을 헤치며 잔해가 있을 만한 곳을 조사했다.
잠시 후, 두 존재가 제자리에 모였다.
「꽝이에요. 아무것도 없네요. 거봐요. 제 말이 맞았죠?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 하여간 마스터는…….」
그간 쌓인 걸 터놓으려던 릴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준이 반 박자 느렸지만, 그는 미소와 함께 철재 조각을 손가락으로 집어 보였다.
「쓰레기 아니죠?」
“위성이다. 내 에너지가 남아 있었어.”
「그렇다면…….」
“그래. 이걸 부순 자의 에너지도 함께 남아 있었지.”
의미심장한 한마디였다.
준의 성격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릴리는 사뭇 긴장했다. 그가 이렇게 진지하게 나올 때는 다 이유가 있었으니까.
「대체 누구예요? 감히 우리 마스터의 안식을 방해하는 놈이! 설마 신님이 뒤끝 있어서 퀘스트에 빠트린 건 아니겠죠?」
준은 대답 대신 묵묵히 고개를 돌렸다.
곧 그의 시야에 마을 뒷산이 잡혔다. 무어라 할 거 없이 평범한 산. 하지만 그곳을 바라보는 준의 눈이 한없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
* * *
“아야야얏!”
“엄살 좀 부리지 말라니까 그러네? 약 좀 바르는 거 가지고!”
“쓰라린 걸 어떡해? 그러니까 안 아프게 살살 발라 줘야지. 돌팔이냐?”
“뭐어?”
하룬의 말에 아그네스가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대접에 담은 약재를 천에 듬뿍 발라 상처에 비비기 시작했다.
“우왁!”
어디 한번 매운맛 좀 봐라, 그런 느낌의 치료였다.
하룬은 비명을 질렀고, 아그네스는 상처 부위를 깨끗한 붕대로 다시 감았다. 마음 같아서는 피도 안 통하게 꽉 묶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그네스가 손을 털며 도도히 말했다.
“다 끝났어. 이제 진료소엔 안 와도 돼.”
“뭔 소리야? 나 여기서 일하는 사람인데.”
“척 하면 좀 딱 알아들어라. 환자로서 올 필요 없다는 얘기란다.”
진료를 마친 아그네스는 옆 책상에 앉았다.
한창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하룬이 찾아와 방해했다. 곧 있을 테스트를 위해 그녀는 열심히 약초학을 공부했다.
그런데 제대로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하룬을 밤새 간호한 것도 있고, 진료소 내부를 정리할 것도 좀 있었다. 며칠간 제대로 쉬지 못해서인지 기운이 없었다.
“휴우.”
그것도 모르고, 하룬은 자신이 뭔가 실수라도 했는지 곁에서 눈치를 보고 있다.
“저…… 근데 선생님은 아직 안 들어오셨어?”
“너 보러 가신다고 해 놓고 아직 소식 없으셔. 환자가 없어서 다행이긴 한데, 좀 불안하긴 하네.”
“으음, 역시 따라갔어야 했나.”
하룬이 툭 내뱉은 한마디에 아그네스가 고개를 홱 돌렸다.
“뭐야. 어디 가셨니?”
“아니 그게…… 아까 숲에 나간다고 하시더라고.”
“왜?”
“그야 나도 모르지.”
아그네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젯밤 산에서 있었던 고블린들의 흉측한 몰골이 떠올랐던 것이다. 낮엔 모르겠지만 해가 떨어진 숲은 대단히 위험하다.
“말렸어야지! 아니면 따라가든가! 왜 혼자 가시게 내버려 둔 건데?”
“저기요. 나 그렇게 생각 없는 애 아니거든요? 누아 마을 자경단의 에이스라고.”
하룬은 준이 검을 꺼냈던 그때 일을 덧붙였다. 그가 검을 잘 다룬다는 게 요지였다. 그 얘기를 들은 아그네스의 눈이 빛났다.
“검술까지? 역시 우리 선생님은 못 하는 게 없으시네.”
“걱정을 할 거면 좀 진득하게 해라. 줏대 없게 그게 뭐야.”
“마나를 다룰 줄 아시니까 보조 마법이라도 쓰면 될 거야. 그럼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아그네스는 마음을 편히 먹었다. 아까 걱정이 되어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리고 보조 마법으로도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런 아그네스의 모습을 보며 하룬이 발끈했다.
“그렇게 태세 전환을 빨리할 거면 대체 왜 말리라고 소리를 지른 거냐?”
“그냥?”
“솔직히 까 봐. 너 선생님 좋아하지?”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얘가!”
본인은 부정했지만, 흠칫 놀라는 데다 볼까지 빨갛게 물든 것을 보니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하룬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주 그냥 푹 빠져 있네. 아무튼 그 정도 실력이라면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렇게 혼자 다니시겠지. 켈세타에서 여기까지 무기도 없이 온 게 이제야 좀 이해가 가네.”
“그 정도로 대단한 실력이셔?”
“글쎄. 뭐, 잘은 모르겠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하룬은 솔직하지 못했다.
자기보다 낫다는 걸 순순히 인정할 수 없었다. 검세만 잠깐 봤을 뿐이다. 실력을 가늠하는 건 검을 서로 맞대야 가능한 법.
하지만 과연 그 사람을 이길 수 있을까?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자신이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으니까. 주력이 검술이 아닐 수도 있고.
“응? 그런데 거긴 왜 그래?”
“뭐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아그네스가 하룬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가 한쪽으로 처져 있었는데, 어딘가 불편해 보였던 것이다.
“훈련하다 다쳤니?”
“아, 다친 건 아니고, 오늘 검 좀 휘둘렀어. 그래서 좀 뻐근해.”
“얼마나 열심히 했길래?”
“2천 번.”
하룬은 오른쪽 어깨를 쥐고 팔을 한 바퀴 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그네스가 미소를 지었다.
“웬일로 열심히 했대? 잠깐만 기다려.”
아그네스가 찬장에서 약재 몇 가지를 꺼내 끓는 물에 넣었다.
그리고 푹신한 수건을 잠시 담가두었다. 곧 적당히 뜨거워진 수건을 하룬의 어깨에 올렸다.
“으아아아.”
뜨겁고 시원한 기운이 어깨에 스며들었다. 동시에 하룬은 묘한 쾌감을 느꼈다. 뭉쳐 있던 근육이 사르르 풀리는 느낌이 좋았다.
“어때. 시원하지?”
“어어. 딱 좋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요즘 선생님이 주신 책으로 약초학 공부하고 있거든. 찜질이야 늘 하던 거고, 거기에 약초를 섞어 봤어. 그럼 더 효과가 좋을 거 같아서.”
“또 실험체가 된 건가. 쯧.”
그렇게 툭 내뱉긴 했어도 하룬은 기분이 좋았다. 뭉친 근육이 풀어져서가 아니라 아그네스가 자신을 생각해 주는 마음이 기뻤던 것이다.
“네아.”
눈이 마주쳤다.
할 말이 분명 있었는데, 하룬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딴청을 피우며 머리를 긁적일 뿐이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아니. 뭐, 그냥.”
“역시 고마워 죽겠다는 말은 못 하겠지?”
“하여간 눈치는 빨라.”
“하하하.”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웃었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 자란 탓인지 이제는 표정만 봐도 뭘 하려는지 알 정도였다.
아그네스가 하룬의 어깨를 꾹꾹 주물렀다.
“친구끼리 뭘 고마워하고 그러니? 서로 돕고 사는 거지. 그리고 어제 고블린도 해치워 줬잖아. 주고받았다고 생각하라구.”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왠지 마음이 개운하진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나서지 않더라도 준이 알아서 처리했을 테니까.
딸랑!
그때 문 쪽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란 하룬이 무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소리야?”
“현관에 종 달아 놨어. 누가 오면 쉽게 알 수 있게.”
“아하.”
두 사람이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안으로 들어온 건 환자가 아니라 준이었다. 아그네스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오셨어요? 숲에 다녀오셨다고 들었는데, 별일 없으셨어요?”
“소문 참 빠르군.”
준은 물끄러미 하룬을 바라보았다. 흠칫 놀란 하룬이 딴청을 피웠는데, 준은 그를 책망하려는 게 아니라 찜질용 수건에 관심이 있었다.
수건에 잠시 코를 대본 준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그네스를 칭찬했다.
“찜질 수건에 약초를 섞었구나. 배합이 잘됐군. 잘했다.”
“조수가 그 정도는 해야죠.”
“내가 준 책엔 안 적혀 있지만, 여기에 푸이푸이 약초가 넉넉하다면 좀 섞어도 된다. 그러면 효과가 더 좋을 거야.”
“넵!”
준은 바로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한편 뒤따라 들어온 아그네스는 방금 준이 말한 내용을 따로 메모했다. 자신만의 약초 배합 리스트를 만들어 둘 생각이었다.
준은 주머니에서 위성의 파편을 꺼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그네스에게 물었다.
“호프만 씨는 아직 안 오셨나?”
“호프만 씨요? 예. 아직 안 오셨어요. 오늘 오시기로 했나요?”
“아까 내려가다 우연히 만났는데 허리가 안 좋아 보여서 봐 드리기로 했다. 좀 심각해 보이더군.”
“맞아요. 저랑 할아버지도 가끔 봐 드리곤 했는데 잘 안 낫더라고요. 그럼 찜질 준비할까요? 푸이푸이 약초 조금 섞어서요.”
근본적인 치료는 되지 않겠지만 도움은 될 것 같았다. 준은 준비를 지시했고, 보이지 않게 위성 파편을 책상 서랍에 넣었다.
‘릴리.’
「…….」
‘듣고 있는 거 다 아니까 대답해라.’
「흥. 왜요.」
‘위성이 망가져서 정찰이 필요한데. 숲에 며칠 머물 수 있겠나? 몬스터들의 동향만 살펴주면 된다.’
「어휴, 그 말 언제 나오나 했네. 멀리는 못 나가니 그런 줄 알아요.」
‘부탁한다.’
작은 빛무리가 빠르게 유리창 밖으로 사라졌다.
“어라?”
약초를 다듬던 아그네스가 뭔가를 느끼고 창가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선생님. 방금 창문에서 뭐 반짝이지 않았어요?”
“글쎄다.”
“이상하네. 피곤해서 그런가?”
고개를 갸웃한 아그네스는 다시 약초 배합에 집중했다.
* * *
늦은 밤, 호프만이 진료소를 찾았다.
그냥 와도 모자랄 판에 술이 좀 취해서 왔다. 얼굴이 붉었고, 은근한 술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허허허! 늦어서 미안하구만. 오늘따라 손님들이 많아서. 이거 자리를 쉽게 뜰 수가 있어야지.”
“어머, 웬일로 손님이 많았대요?”
“못 들은 게냐? 켈세타에서 상단 사람들이 왔단다. 물건을 잔뜩 들고! 한몫 챙기러 온 것 같진 않고, 뭐 잠시 쉬러 왔겠지. 한 닷새 정도 머물다 간댄다.”
“와아! 정말요?”
아그네스는 호기심을 보였다. 외부 문물을 접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상단이었으니까. 그곳 상인들에게 도시 이야기를 듣는 게 그녀의 유일한 낙이었다.
하지만 준에겐 관심 밖의 일일 뿐이다. 코를 자극하는 술 냄새를 맡은 그가 조용히 경고했다.
“호프만 씨. 진료받으러 오실 때는 술을 드시면 안 됩니다. 약효가 떨어지거나, 좋지 않은 작용이 생길 수 있거든요.”
“사람 참 팍팍하기는. 그냥 대충 봐주면 돼! 하루 이틀 아픈 것도 아닌데.”
호프만이 손사래를 치자 아그네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대충 보다가 부작용이 생겨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구요.”
“뭐, 뭐라?”
“약 부작용은 생각보다 심각해요. 켈세타 병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대요. 아무튼 오늘은 찜질만 할 거니까, 다음부터는 술 드시지 마시고 오세요. 알았죠?”
“으음…… 알았다.”
그제야 아그네스가 싱긋 웃었다.
“자아, 그럼 이쪽으로 엎드리세요.”
“녀석. 이젠 완전 치유사가 다 됐구나.”
“호호호. 칭찬 감사해요.”
“웃차!”
호프만이 거대한 몸을 침상에 뉘었다.
곧 준이 곁에 앉아 그의 허리 위에 손을 얹었다. 집중을 위해 눈까지 감았다.
그런데 호프만의 몸을 마나로 스캔하려던 준은 손을 멈추고 눈을 떠야만 했다.
「대박 사건!!!」
릴리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렸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