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수상한 냄새가 난다 (1)
바이런은 하룬을 끌고 내려왔다. 이 정도는 부상도 아니라며 바로 훈련을 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현실이 그랬다. 바이런은 경험이 풍부했고, 고블린의 독침은 위력이 약했으며, 아그네스의 처치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으니까.
그래도 하룬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너무하신 거 아님까? 부상당한 지 하루도 안 지났다고요! 훈련이라니.”
“제대로 안 뛰나?”
“아, 옙.”
바이런은 단호했다. 하룬은 풀죽은 표정을 하며 뛰기 시작했다.
왠지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아그네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바람직한 스승과 제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돌아선 하룬이 아그네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젠 고마웠어!”
“말로만 고마워하지 말고 뭐라도 가져와.”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아그네스는 어서 가라며 손짓했다.
예전에는, 그러니까 어릴 때는 별다를 게 없었는데 요즘은 사소한 행동에도 신경이 쓰였다.
이제 조금 있으면 성인식을 치른다.
‘친구’라는 단어로 포용할 수 없는 일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아그네스는 그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이 어려웠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아버지와 하룬이 점점 시야 저편으로 멀어져가는 것을 보며 아그네스는 마음을 새롭게 다졌다. 지금 중요한 것은 치유사로서의 성장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디 가신 거지?”
진료소 안으로 들어온 아그네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정도 소란에도 준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역시 화가 난 걸까?
아버지의 냉대가 마음에 걸렸다. 어렵게 치유사직을 맡아 준 사람에게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으니까.
사과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아그네스는 진료실을 찾았다. 마침 준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저, 선생님?”
준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자 아그네스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저희 아버지 때문에 기분 나쁘셨죠?”
“전혀.”
“정말요?”
준은 읽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 의자를 돌려 아그네스를 마주 보았다.
“내가 기분 나빠 할 상황이었나?”
“전 그렇게 생각했어요. 선생님은 마을분들을 위해 일해 주고 계시는데.”
“낯선 사람에게 품는 경계심은 당연한 거야. 사람이기 때문에. 게다가 네 아버지는 자경단장직을 맡고 계시잖아. 직무에 충실한 거지 사과할 일은 아니다.”
준이 선을 명확히 긋자 아그네스도 딱히 할 말이 없어졌다. 자리에서 일어선 준은 창가로 걸어가 태양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원래 이 마을에서 지내셨나?”
“아뇨. 원래는 왕도에 혼자 계셨다가 오래전에 귀향하셨어요.”
“그렇군.”
아버지에 대해 더 물을 줄 알았는데, 준의 질문은 거기에서 끝났다. 그가 하늘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슬슬 올 시간이 됐는데.”
“누가 오기로 했어요?”
“마리.”
“아! 맞다. 깜빡하고 있었네.”
준이 슬쩍 아그네스를 쳐다봤다. 아그네스는 그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환자였는데 잊고 있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준이 말했다.
“다음부터는 환자 기록을 글로 남겨 둬. 지금이야 환자가 거의 없다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알았어요. 그런데 기록은 어떻게 해요? 도시의 큰 병원에서는 그렇게 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하는지 잘 몰라서요.”
팔짱을 끼며 가만히 아그네스를 응시하던 준이 미소를 지었다.
“밥상을 차려 줬는데 떠먹여 주기까지 해야 하나?”
“기왕 쉬운 길이 있다면 쉬운 길로 가야죠.”
“굳이 다른 사람이 만들어 둔 것을 따라 할 필요는 없어. 치유사나 환자가 어떤 정보를 필요로 하는지 잘 생각해 본다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그러니까, 일단 제가 해 보라는 말씀이시죠?”
“정답.”
아그네스가 손가락으로 볼을 톡톡 치며 고민하는 사이 준이 옆쪽 테이블로 이동했다. 그리고 찬장에서 약병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아그네스. 고민은 천천히 하고, 가서 월영초를 가져와.”
“넵.”
아그네스는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월영초를 꺼내왔다. 조심스레 검은 천을 풀었다. 은은한 달빛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와, 캐낸 지 좀 됐는데도 빛이 나네요.”
“보존 마법을 걸어 둬서 그래. 그냥 뒀다면 빛이 나지 않았을 거다.”
“그럼 효과도 덜하겠네요?”
“당연하지.”
“피이. 마나 못 다루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한숨을 내쉬면서도 아그네스는 준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졸음이 쏟아졌지만 꾹 참았다.
지금 펼쳐지는 장면은 두 번 보기 힘든 것일 테니까. 월영초를 이용하여 약을 만드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애초에 존재조차 모르던 약초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준은 능숙하게 약초를 다듬었다.
나이프로 꽃을 잘라 내고 뿌리 부분을 통째로 넣어 달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몇 가지 약초가 추가로 들어갔다. 씁쓸한 향이 사방에 퍼졌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아그네스가 물었다.
“꽃은 왜 남겨 두신 거예요?”
“말린 다음 가루를 내서 약으로 쓸 거야. 그러니 잘 말려 두도록.”
“넵.”
“어떻게 말리는지는 안 묻나?”
“말리는 게 뭐 있나요? 그냥 햇빛에 두면…….”
그때, 뭔가를 깨달은 아그네스가 눈빛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햇빛이 아니라 달빛에 말리는 거죠? 월영초니까.”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햇빛에 장시간 놔두면 약효가 약해지니 주의해야 한다. 밤이 되면 꺼내 놓고, 동이 트기 전에 창고에 보관하도록.”
“보존 마법으로는 어떻게 안 되는 거예요?”
“뭐든 자연에서 해결하는 게 가장 이로운 법이지.”
늦잠을 못 잔다는 사실에 실망했지만, 아그네스는 검은 천으로 꽃잎을 잘 싸서 창고에 넣었다.
그때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찾아온 손님은 마리였다.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준은 마리의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때맞춰 오셨군요. 마침 약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어쩐지 약 냄새가 저 멀리까지 진동하더군요. 자, 마리야. 선생님께 인사해야지?”
“…….”
멀뚱히 있던 마리가 꾸벅 인사했다. 그 귀여운 모습에 아그네스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진찰받고 약 먹고 가면 돼. 우리 마리, 쓴 것도 잘 먹을 수 있지?”
마리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이 덧붙였다.
“그럼 진료실로.”
“예.”
진찰을 시작하기 전에 준은 진료실 구석에서 마리의 키를 쟀다. 마리가 기둥에 서자 아그네스와 마리의 아버지가 깜짝 놀랐다.
“키가 큰 겁니까?”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마리는 어제와 같은 신발을 신고 있었고, 머리의 끝은 준이 어제 파 놓은 흠보다 훨씬 위에 위치해 있었다.
준이 자로 정확히 잰 뒤 말했다.
“3센티미터 정도 자랐군요.”
“세상에! 하루 만에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성장할 겁니다. 약을 먹게 되면 더 빨라질지도 모르지요.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해 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마리의 아버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딸이 분명히 낫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곧 진찰이 시작됐다.
준은 마리의 맥을 짚은 뒤 마나를 흘렸다. 이미 심장을 죄고 있던 결계가 무력화된 상황이라 어떠한 저항도 없었다.
혈맥을 한 바퀴 탐색한 준이 살짝 미소 지었다.
“상태가 굉장히 좋습니다. 발작은 없었지요?”
“그럼요! 덕분에 밥도 잘 먹고 잘 뛰어놀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직 감사를 받기는 이릅니다. 치료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요.”
준이 눈짓하자 아그네스가 달인 약물을 한 컵 따라왔다. 바로 마리에게 주려고 했지만, 준이 컵을 잠시 쥐더니 마리에게 건넸다.
냉기를 일으켜 마시기 좋은 온도로 바꾸었다는 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
컵을 쥔 마리는 잠시 주저했다. 냄새만 맡아도 쓴 게 보였으니까.
간신히 입술을 축이긴 했는데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다시 입에 대지 못했다.
“우리 마리는 씩씩하니까 잘 마실 수 있지? 자. 어서 마셔 봐. 응?”
아그네스가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그건 마리의 아버지도 마찬가지.
어쩔 수 없이 준은 아공간 창고에서 미리 꺼내 둔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엔 하얀 구슬이 잔뜩 들어 있었다. 달콤한 향을 풍기는 사탕이었는데, 준이 그것을 마리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약을 다 마시면 하나 주마. 달콤한 과자인데 무척 맛있지.”
형형색색의 사탕을 향한 마리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맛있어 보였다.
어린아이의 호기심이란 대단했다. 결국 마리는 약을 끝까지 다 마셨다.
컵이 빈 것을 확인한 준은 주머니에서 노란색 사탕을 꺼내 마리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약 때문에 찡그려져 있던 마리의 표정이 환하게 풀렸다.
“내일 또 오너라.”
“…….”
“그래. 내일도 약을 잘 먹으면 사탕을 줄게.”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 마리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진료소를 나섰다. 진료는 끝났지만 아그네스는 아직 의문이 풀리지 않은 눈빛이다.
“마리하고 어떻게 얘기를 한 거예요?”
“얘기 안 했어. 어린아이들은 눈빛만 보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지.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
“설마요.”
아그네스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음을 깨달은 준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다름 아닌 사탕이 들어 있는 주머니였다.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그런데 사탕은 어디서 났어요? 엄청 비싸다고 들었는데. 저도 몇 번밖에 못 먹어 봤어요. 두 번쯤?”
“그냥 떠돌아다니다 보니 손에 들어와 있더군.”
“알고 보니 선생님 막 엄청 부자고 이런 거 아니죠? 어디 공작가의 막내아들이라든가.”
“공상에도 재능이 있는지 몰랐네. 근데 왜 하필 막내야?”
“철없이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게 막내의 역할이잖아요. 첫째는 가업을 이어야 하니 바쁠 테고. 둘째는 정치질하느라 바쁠 테고.”
준은 피식 웃기만 했다. 엄청 부자는 맞지만, 굳이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근데 그거, 무슨 맛이에요?”
“달달한 맛.”
“칫. 저 놀리는 거죠?”
“애들 거 탐내면 벌 받는다.”
준은 사탕 주머니를 품 안에 넣었다. 아그네스는 입맛을 다셨지만 언젠가 먹을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한나절이 흘렀다.
노을이 깔릴 때까지 환자는 찾아오지 않았다. 아그네스는 책을 펼쳐놓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준은 의자에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는 시간을 때울 겸 얼마 전 쏘아 올린 위성을 통해 마을 주변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상한 조짐이 발견되었다.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기묘해. 저렇게 집단 이동이 가능한 건가?’
준은 위성에 연결된 에너지를 더욱 증폭시켰다. 머릿속에 펼쳐진 지도가 세밀하게 바뀌었다.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원래 군집을 이루는 개체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개체들도 한곳에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때마침 릴리가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요?」
‘너도 느꼈나?’
「당연하죠. 한때 유력한 페어리 퀸 후보자였다는 걸 벌써 잊으신 건 아니죠?」
릴리는 ‘한때’라는 말을 강조했다. 준이 무안해하기를 바랐지만, 그가 그럴 리는 없었다.
오히려 준은 눈을 감으며 집중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곧 단서를 잡은 준은 눈을 떴다. 뒷산에서 시작된 어떤 묘한 힘이 몬스터들을 조종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 얘기를 꺼내자 릴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엥? 그 정도로 강력한 존재가 여기에 있다고요?」
‘그야 알 수 없는 일이지. 뒷산에 뭔가가 있다는 건 확실하다. 요즘 마을에 몬스터들이 자주 나타나는 게 그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지.’
「어휴, 참. 귀찮은 일은 여기까지 해요! 환자들 뒷바라지하는 것도 모자라서 산까지 뒤질 생각이에요? ……어? 어라?」
릴리가 눈을 부릅떴다.
깜짝 놀란 건 릴리만이 아니었다. 준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위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잠깐의 순간이지만 어떤 강력한 기운이 창공을 꿰뚫었던 것.
「방금…… 엄청났죠?」
‘아무래도 위성이 박살 난 것 같다. 설마 추적을 눈치챈 건가?’
보통 존재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놓인 가죽 가방에 약병과 붕대 등 치료를 위한 도구를 하나둘 담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잠에서 깬 아그네스가 허둥지둥했다.
“어, 어디 가시게요?”
“아침에 퇴원한 환자가 걱정돼서. 훈련을 받다가 상처가 덧나면 곤란하니까.”
“왕진 가시려는 거구나. 흐아암. 아, 왜 이렇게 졸릴까. 하품이 계속 나오네요. 오해 마세요. 저도 정말 따라가고 싶지만 혹시 환자분이 오실 수 있으니까 여길 지키고 있을게요.”
“한숨 푹 자 둬. 금방 돌아오마.”
가방을 손에 든 준이 조용히 진료소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