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8화 (8/175)

8화 자경단장 바이런

“아그네스.”

약병 정리를 끝내고 찬장을 닫은 준이 아그네스를 불렀다. 그녀는 하룬을 실컷 놀리며 붕대로 다리의 상처를 감고 있었다.

“예?”

“너무 꽉 묶지 않는 게 좋아. 피가 통하지 않으면 썩을 수도 있으니까.”

“으음, 그럼 더 좋은 거 아닐까요?”

“야!”

썩을 수도 있다는 말에 흠칫 놀란 하룬이 자신의 다리를 유심히 살폈다. 그걸 보고 아그네스가 또다시 웃음을 터트린다.

“하하하. 넌 왜 그렇게 겁이 많니?”

“겁이 많은 게 아니라 걱정이 되는 거라고. 견습생 나부랭이가 멀쩡한 사람 하나 골로 보낼까 봐.”

“선생님도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야.”

하룬은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이방인에게 이렇게 믿음을 주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독침에 맞았을 때, 준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왕립기사단을 언급했고, 그들이 따르는 규율을 말했다.

흥미로운 일이다.

언제 시간이 되면 그에 대해 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그네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생각 해? 어디 안 좋아?”

“아니. 아무것도. 근데 살살 좀 하지?”

“다 됐거든!”

붕대를 다 감은 아그네스가 손을 털었다.

독침을 제거하고 효과 좋은 약을 쓴 덕에 하룬은 빠르게 컨디션을 되찾고 있었다.

그때, 준이 아그네스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그네스. 잠깐 여기를.”

아그네스의 시선이 준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곳엔 제거한 독침이 놓여 있었다.

“이건 고블린이 쏜 독침이잖아요. 더 봐야 할 게 남아 있나요?”

“좋은 걸 알려 주마.”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아그네스는 집중했고, 준은 핀셋을 들고 독침을 집었다. 바늘로 쓰는 침과 비슷한 모양의 독침이었다.

준은 독침 끝을 가리켰다.

“보통은 이렇게 날카로운 바늘 모양으로 되어 있어 제거하기가 어렵지 않아. 뽑으면 그만이지. 가공 기술을 가진 몬스터들은 거의 없으니까. 하지만 예외가 있다.”

“어떤 예외요? 지능이 있는 몬스터인가요?”

“아니. 사람에게 당했을 때.”

아그네스가 탄성을 흘렸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이곳은 평화로운 마을이고, 사람과 사람이 다툴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전쟁과도 거리가 멀었기에, 사람 간의 전투를 본 일이 없을 것이다.

“박히는 순간 꽃잎 모양으로 펴지는 것도 있고, 갈퀴가 달린 것들도 있다. 그런 것들은 억지로 뽑으려 하면 더 큰 상처를 입히게 되지.”

“확실히 그렇겠네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육안으로 확인하고 살에 칼집을 내야 한다. 마법이 걸린 것들은 훨씬 더 신중히 다뤄야 하고.”

“박혀 있으면 갈퀴 같은 게 잘 안 보이지 않아요? 모양을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준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니까 슬쩍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공부를 해야지. 치유술만 판다고 훌륭한 치유사가 될 수는 없다. 다양한 방면에 지식을 쌓아야 도움이 될 거야.”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오는 건 기분 탓일까요.”

“안타깝게도 그건 시작이다. 그 지식에 준하는 경험도 쌓아야 해. 책으로 얻는 지식과 몸으로 느끼는 경험은 그 질 자체가 달라.”

“아아~”

눈앞이 컴컴해진 아그네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준은 진료실을 나서며 툭 한마디를 남겼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밤은 하룬을 보살펴 줘. 경과를 살펴보며 경험을 쌓도록.”

“밤새요? 독침도 뽑았고 다 나은 것 같은데 그냥 집에 돌려보내면 안 돼요?”

하룬이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좋다가 말았나 보다. 그 모습을 흘겨보며 준은 피식 웃었다. 과잉 진료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우리를 지켜 주려다가 다친 거잖아. 무엇보다도 네 첫 환자고. 완치될 때까지 지켜봐. 분명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알았어요. 그런데 어디 가시려고요?”

“오늘 진료는 여기까지.”

손을 들어 보인 준은 진료소 밖이 아니라 입원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덕분에 진료실엔 아그네스와 하룬만 남았다.

뭔가 좀 어색한 느낌에 하룬이 먼저 물었다.

“촌장님 댁에서 주무시는 거 아니었어? 2층으로 올라가시네.”

“잘 모르겠어. 여기가 편하셔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까 빈 방에 가 보니 선생님 짐이 있더라. 거길 사용하시려나 봐.”

“하긴, 촌장님이 말수가 좀 많으시긴 하지. 나라도 피곤하겠다.”

“이른다?”

“아야야야!”

하룬이 붕대를 감은 다리를 붙들고 소리를 질렀다. 효과는 굉장했다. 아그네스가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

“왜? 어디 아프니?”

“상처가 엄청 쓰린데? 뭐 잘못된 거 아냐?”

“이상하네. 선생님께서 이제 안 아플 거라고 하셨는데…… 잠깐만 기다려 봐. 선생님 모셔 올 테니까.”

“진료 끝났다고 올라간 사람을 모셔 와서 뭐 하게? 네가 어떻게 좀 해 줘 봐. 쓰린 것 정도는 어떻게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혹시 엄살 피우는 건 아니지?”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그네스는 하룬의 상처를 살폈다.

작전은 성공했다. 이런 상냥한 모습은 꽤 오랜만인 것 같았다. 하룬은 가끔은 꾀병을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길었던 밤이 흐르고, 아침이 밝았다.

* * *

어슴푸레한 방 안이 갑자기 환해졌다. 창문 너머로 햇살이 쏟아졌고, 따가운 기운이 아그네스의 얼굴을 두드렸다.

그녀의 눈이 조금씩 열렸다.

누군가 커튼을 정리하고 있었다. 책상에서 몸을 일으킨 아그네스는 눈을 비비며 그쪽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어. 선생님? 언제 오셨어요?”

“지금. 하룬은?”

“어젯밤에 병실로 옮겼죠.”

“별일 없었나?”

“갑자기 상처가 아프다고 난리를 쳐서 혼났어요. 붕대를 풀고 다른 약재를 쓰니까 좀 가라앉더라구요.”

아그네스는 하룬의 상처 이야기만 했다. 조금 다른 일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그네스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치료했는지 안 물어보시네요?”

“알아서 했겠지.”

“와아! 저 하루 만에 인정받은 건가요?”

내심 기대감을 표했지만, 준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하룬이 난리를 친 이유야 너무 뻔했으니까.

입을 씰룩인 아그네스가 이어 말했다.

“아무튼 재우고 진료실 좀 정리하려고 내려왔는데 깜빡 잠들었나 봐요.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도 안 나네요.”

“그래.”

준은 아그네스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책을 주목했다. 어제 공부하라며 준 약초학 관련 책이었다. 그 늦은 밤에 책을 펼쳐 본 모양이었다.

준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걸렸다.

‘노력이 실력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고 있어. 어쩌면 그것도 이 아이의 재능일까?’

아직은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잘 키운다면 한 사람 이상의 몫을 해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비비고 하품을 하는 아그네스의 모습은 꽤 귀여웠다. 하지만 기특함 이상의 감정은 허락되지 않았다. 준은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햇빛이 찬란했다. 소풍을 가지 않으면 서운할 것 같은 좋은 그런 날씨.

마찬가지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아그네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래서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저 당직 섰으니 오늘은 쉬어도 되죠?”

“네가 쉬면 누가 조수를 해?”

“너무해…….”

아그네스는 책상으로 풀썩 엎어졌다.

하지만 주먹을 꽉 쥐고 몸을 일으켰다. 여기에서 포기할 거면 처음부터 치유술을 가르쳐 달라고 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 마음을 읽은 걸까. 한차례 웃은 준이 지나가듯 말했다.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든지.”

“됐어요. 열일할 거예요!”

“훌륭한 치유사 후보생이군.”

“비꼬는 거 아니죠?”

“설마.”

그때 진료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준은 하얀 가운을 걸쳤고, 아그네스는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환자를 맞으러 갔다.

“어서 오세…… 어? 아버지?”

아버지라는 말에 준이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가죽 갑옷에 검은빛 철판을 덧댄 날렵한 갑옷을 걸친 중년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 잔 게냐?”

“예. 하룬 녀석이 다쳐서요. 밤새 간호했어요.”

“상태는?”

“너무 괜찮아서 탈이랄까요?”

근엄한 표정이던 아그네스의 아버지가 인상을 풀었다. 하룬이 야밤에 독침에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온 길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가. 녀석은 어디에 있냐?”

“위층에요. 걱정돼서 오신 거예요?”

“험멜 녀석이 하도 호들갑을 떨지 뭐야. 영 안 좋은 곳에 맞았다면서. 그런데 자네는…….”

그제야 아버지가 준에게 관심을 두었다. 아버지의 시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의심과 불신이 서린 그런 눈빛이었다.

“혹시 이번에 새로 왔다던 치유사인가?”

“촌장님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준입니다.”

“바이런일세. 아버지께 대강 얘기는 들었네.”

하지만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그 흔한 악수 한 번 하지 않았다.

찬바람을 풀풀 날리며 준을 지나친 바이런은 2층으로 올라갔다. 갑작스러운 냉대에 당황한 아그네스가 그 뒤를 따라 올라갔다.

그때 릴리가 흐릿하게 나타났다.

「이 마을 뭔가 있네요.」

“너도 그렇게 느끼고 있구나.”

「예에. 어쩜 이렇게 재수 없는 사람들이 많은지……. 터가 안 좋은 게 분명해요. 짐 싸요, 마스터. 여긴 빨리 뜨는 게 상책이에요.」

피식 웃은 준은 턱을 괴었다.

‘바이런. 저 남자도 보통내기가 아니야. 촌장의 기운을 이어받은 건가?’

걸음걸이나 자세, 그리고 지니고 있는 기운이 범상치 않은 사내였다. 이런 한적한 마을에서 자경단장으로 일할 그릇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준의 관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두 부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관심을 끊고 진료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두꺼운 책을 펼쳤다.

* * *

병실에 들어가기 전 아그네스가 나섰다.

“아버지.”

“왜 그러냐?”

“있죠. 그…… 선생님을 너무 매정하게 대하시는 거 아녜요?”

병실의 문을 열려던 바이런이 코웃음을 쳤다.

“녀석도 참. 잘생긴 청년이라 마음이 설렜던 거냐?”

“그,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저는 그냥…… 저를 가르쳐 주고 계신 분이니까 어느 정도는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진심이냐?”

바이런이 근엄히 딸을 추궁했다. 아그네스는 슬쩍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가 봐도 어색했다.

“실력 좋은 분이에요. 마나도 다룰 줄 아시고. 공부하라고 책까지 주셨는걸요.”

“사람의 호의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유가 없는 호의는 성자들이나 하는 짓이지.”

“아버지.”

“넌 아직 어려서 몰라. 세상은 말이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바꿔 생각해 봐라.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이런 궁벽한 시골 마을에는 왜 왔을까?”

아그네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의 말도 일리가 있었고, 많은 자경단원들이 준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바이런이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자라면 큰 화를 당할 수도 있다. 우리 마을 자경단원들이 용감하다고는 하지만, 일개 기사단이 몰려온다면 막을 수 없겠지. 죄인을 숨겨 둔 죄목으로 모조리 학살당할 수도 있다.”

“그건 말도 안 돼요!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계시잖아요.”

“세상에 강한 사람은 많아.”

“아무튼 나쁜 분 같지는 않았어요.”

가만히 아그네스를 바라보던 바이런이 손을 뻗었다. 딸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타이르듯이.

“얘야. 모든 사람은 가면을 하나쯤은 가지고 사는 법이란다.”

“그럼 아버지는…….”

아그네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의 갑옷에 달린 검은빛 철판을 보니 자연스레 입이 다물어졌다. 왕도에서 잘나가던 아버지가 귀향한 것도 그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겠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원하던 것은 아니었는지 헛기침을 한 번 내뱉은 바이런이 말을 돌렸다.

“아버지께서 괜찮다고 하시니 내쫓지는 않겠지만 당분간은 예의주시해야 할 것 같구나. 너도 몸가짐 바르게 하거라. 무슨 일 있으면 바로 하룬에게 얘기하고. 알았니?”

“그래서 하룬을 진료소로 보낸 거였어요?”

“뭐, 그런 이유도 있지.”

그제야 인자한 미소를 보인 바이런이 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멍하니 누워 있던 하룬이 벌떡 일어났다.

“단장님!”

“이 멍청한 녀석! 내가 널 어떻게 가르쳤는데 기껏 고블린 놈들이 쏘는 독침에 맞고 다니나?”

“죄송합니다!”

“쯧, 죄송할 짓을 왜 하는 건지 모르겠군. 아무리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지만…… 그런데 어디에 맞은 거냐? 이쪽이냐?”

“우악!”

“엄살 피우지 마라.”

“죄, 죄송합니다.”

한숨을 내쉰 바이런은 하룬의 상처를 살폈다. 그런데 그의 손길은 말처럼 험악하지 않았다. 걱정이 담긴, 그런 부모의 자상한 손길 같았다.

“좋아. 오늘 훈련엔 문제가 없겠군. 짐 싸라. 가자.”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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