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7화 (7/175)

7화 심각한 합병증?

“꺅!”

“으악!”

놀란 것은 아그네스만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사내도 화들짝 놀랐다. 아그네스가 비명을 지를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달빛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하룬이었다.

그가 버럭 화를 냈다.

“아이씨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하루 이틀 보는 사이도 아닌데.”

“못생긴 게 갑자기 풀숲에서 나타나니까 그러지!”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진 사람은 누구고? 쪽지라도 남기지 그랬어. 그런데 선생님? 호위도 없이 이 밤중에 여기에서 뭐 하시는 겁니까?”

의심의 화살이 준에게로 돌아갔다.

준은 물끄러미 하룬을 바라보았다. 호흡을 차분히 고르고 있지만, 전력으로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준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와중에 하룬은 간간이 아그네스를 훔쳐봤다. 자신보다는 그녀가 걱정되어 달려온 것이리라.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준은 들고 있던 호미를 아그네스에게 건네며 대꾸했다.

“보다시피 약초를 캐고 있었지.”

“약초요? 얘기 좀 하고 나가시면 어디 큰일이라도 납니까? 선생님이나 네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단장님께 작살난다고요.”

“그러기엔 너무 맛있게 자고 있어서.”

준의 일침에 하룬이 입술을 씰룩였다. 확실히 잠든 것은 자신의 탓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하룬이던가.

“어, 그건 뭐…… 그런데 약초는 내일부터 캔다고 했잖습니까?”

“보름달이 떠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마리의 치료약 중 하나를 구해야 해서. 만월에만 피는 꽃인데 효과가 아주 좋지.”

“그런 게 있어요? 흐음. 수상한데.”

“이것 봐. 월영초라는 건데 굉장히 귀한 약초래. 태어나서 처음 봐. 어때? 예쁘지 않니?”

아그네스가 친절하게 약초 가방에서 월영초를 보여 주었다.

연푸른빛을 간직한 약초가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하룬은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다 갑자기 정색을 했다.

“아무튼 밤늦게 행동하는 건 자제해 주십쇼. 요즘 몬스터들이 자주 나타나는 편이니까. 시간이 날 때 검술을 익혀 두시는 것도 좋겠는데. 어때요? 제가 특별히 지도해 드리죠.”

“검술 지도를?”

하마터면 준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누군가에게 검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검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굳이 첨언하지 않았다. 자신은 아무런 무장도 없이 누아 마을에 ‘운 좋게’ 도착했고, 하룬을 만났다. 그가 오해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준이 가만히 있자 아그네스가 대신 나섰다.

“하룬! 너 선생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대책이 있으시니까 이 밤에 나오신 거겠지. 설마 아무런 대비도 없이 나오셨겠어? 그쵸?”

“딱히 대책 같은 건 없었어.”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아그네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대체 자신은 무얼 믿고 여기까지 온 것일까.

덕분에 하룬이 의기양양해졌다.

“거봐. 내가 뭐랬어? 아무튼 이건 말버릇이 아니라 조언이라고. 네아 너도 마찬가지야. 호신술 정도는 배워 둬. 숏 소드는 다루기도 쉽고 배우기도 쉬우니까. 누아의 차기 자경단장인 내가 특별히 가르쳐 줄 의향이 있는데. 어때?”

“흥. 너한테 배우느니 차라리 아버지한테 배우고 말지.”

차가운 한마디에 하룬의 맥이 탁 풀렸지만, 그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튕기지 말고 쫌! 단장님은 바쁘시잖아. 어차피 나도 단장님 밑에서 배웠고. 얼마 전에 내가 몬스터 때려잡으며 깨달은 바가 있다고.”

“그놈의 깨달음 얘기가 네 번째인 건 아니?”

“야야, 사람 말은 좀 끝까지 들어봐. 어? 이번엔 좀 다르다니까.”

하룬은 자신의 경험을 버무려 검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건 1할 정도였고, 나머지는 자기 자랑이었다. 누가 들으면 누아 마을에 소드마스터가 온 줄 알겠다.

준은 그런 허세를 즐기고 있었지만, 자신의 하수인은 아니었나 보다. 릴리가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저렇게 건방진 놈은 처음 보네요. 뒤통수를 콱 그냥! 어휴, 헬파이어로 조져 버려요! 운석을 떨어트리든지! 당장!」

‘술 덜 깼나?’

「어? 냄새 나요?」

피식 웃은 준은 한창 투닥거리는 두 소꿉친구를 말렸다. 이러다가는 날이 샐 것 같았다.

“그만 됐다. 하룬의 말도 일리가 있어.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후후.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내려가는 길의 호위는 네게 부탁하마.”

“맡겨만 주십쇼!”

하룬이 기세 좋게 앞서 걷기 시작했다. 아그네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하룬을 바라보았지만, 지금은 그에게 의지해야 했다.

아그네스가 고개를 준 쪽으로 돌렸다.

“근데 선생님. 실례되는 질문일지 모르겠는데…… 공격 마법은 익히지 않으신 거예요?”

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그는 마나의 극의에 도달한 존재였다. 배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걸 배우지 않았다고 이해한 아그네스는 약간 실망한 표정이다.

하지만 이해했다.

치유 마법은 공격 마법과 상극이다. 그 묘리를 깨우치며 동시에 익히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치유사가 공격 마법을 익히게 되면 치유 마법의 효율이 떨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치유사들은 마나를 다루면서도 공격 마법을 익히지 않는다. 끽해야 움직임을 방해하거나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보조 마법을 배우는 게 전부였다.

“실망했나?”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아까 라이트 마법이 너무 강력해서 공격 마법도 익히신 줄 알았어요.”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마라. 사람마다 잘하는 일이 있고,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니.”

“네!”

‘나는 강하다’라는 핵심은 없지만, 묘하게 믿음직한 한마디에 아그네스는 미소를 되찾았다.

그때 하룬이 걸음을 멈췄다.

“잠깐. 뭔가 있다. 뒤로 물러서!”

사라락!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풀숲에서 고블린 두 마리가 튀어나왔다.

하룬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걸린 장검을 뽑았다. 발검 속도가 빨랐다. 검세도 저 정도면 봐 줄 만했다. 좋은 스승에게 제대로 배운 느낌.

하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생각보다 빨리 왔는데?”

“그게 무슨 소리니?”

“하핫! 내 멋진 실력을 보여 줄 순간이 빨리 왔다고!”

아그네스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중에 준에게 허세병을 치료할 수 있는 조제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룬이 있어서 든든한 면은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수제자였다. 어려서부터 검술에 재능이 있다고 여러 번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겁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눈 크게 뜨고 잘 보십쇼. 누아 마을의 에이스가 어떻게 몬스터를 때려잡는지!”

조명이 없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고블린들의 장비는 투박했다. 돌도끼와 녹슨 검이 다였다.

하지만 그것은 하룬과 아그네스의 시야에서였고, 준은 달랐다.

그의 날카로운 눈이 빛났다.

‘한 마리 더 있다.’

다른 고블린이 숨어 있었다. 뒤편 바위, 교묘한 위치에서 독침을 하룬에게 겨누고 있었다.

쐐액!

그때, 앞쪽에 있던 고블린에게 무언가가 날아갔다. 하룬이 던진 단도였는데, 돌도끼를 든 고블린의 목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쿠엑!”

괜찮은 실력이었다. 준은 문득 아그네스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하룬은 기세를 살려 검을 휘둘렀다.

“퀘엑!”

남은 한 마리도 손쉽게 해치웠지만 바위 뒤에 숨어 있는 고블린을 인지하지 못했다.

평소였다면 이렇게 방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주변을 더 살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방심하게 된 것이다.

‘꽤 위험한데.’

준의 눈매가 좁아지는 순간.

푸슛!

독침이 하룬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갔다. 동맥이 있는 자리였다. 강한 독은 아니겠지만, 적중한다면 후유증이 크게 남을 수도 있다.

준이 반사적으로 마나를 일으켰다.

놀랍게도 독침의 궤적이 살짝 바뀌었다.

“윽!”

왼쪽 다리에 짜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준이 인위적으로 독침의 궤적을 바꿔 그쪽에 박히게 한 것이다. 아예 빗나가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하룬은 고블린의 독침이라는 것을 인지한 순간 이를 꽉 깨물었다.

낭패였다.

“하룬!”

“걱정 마! 가시에 찔린 거니까. 제길. 이래서 내가 산을 안 좋아한다니까.”

하룬은 주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몸을 가린 채 전진했다.

독침이 박힌 방향을 살피니 대강 위치가 나왔다.

확실히 방심을 벗어던진 하룬의 실력은 날카로웠다. 곧 끔찍한 소리가 들렸고, 하룬은 마지막 남은 고블린의 피를 털어 내며 검을 갈무리했다.

주변 정찰을 끝낸 하룬이 두 사람에게 돌아갔다.

“어디 다친 데는 없니?”

“이 정도야 누워서 떡 먹기지. 어떻습니까? 제 실력이. 든든하죠?”

준은 대답 대신 하룬의 안색을 살폈다.

이미 독이 퍼지고 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독침이 박힌 다리의 감각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서 있기도 힘들어졌다. 식은땀도 비 오듯 흘렀다.

“크윽.”

“왜 그래?”

아그네스가 휘청거리는 하룬을 부축하려 했지만, 늦었다.

털썩.

하룬의 몸이 허물어졌다. 깜짝 놀란 아그네스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분명 어딘가 다친 것 같은데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준이 나섰다.

하룬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네 꿈은 기사가 되는 거였지?”

“윽…… 그게 지금 상황에서 할…… 소립니까?”

“왕립기사단에 이런 규율이 있다. 부상당했을 경우 그 부위와 상태에 대해 소상히 설명할 것. 말할 수 없는 경우는 기록으로 남길 것. 왜 그럴까?”

“…….”

“그래야 후방으로 수송되었을 때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싸우다 입은 부상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 명예로운 일이지. 치유사들의 수고를 덜 수도 있고.”

준은 돌려 말했다. 자존심을 세우는 것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곧 그 의미를 깨달은 하룬이 입을 열었다.

“왼쪽 다리에…… 독침을 맞은 것 같습니다. 뒤쪽에 한 마리가 더 숨어 있었어요.”

“이쪽?”

“어. 그쪽.”

아그네스가 재빨리 하룬의 왼쪽 다리를 살폈다. 잘 안 보였는데, 그때 환한 빛이 뒤에서 쏟아졌다. 준이 라이트 마법을 일으킨 것이다.

곧 시퍼런 독침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있어요!”

투박한 독침이 제대로 틀어박혀 있었다.

아그네스는 먼저 독침을 제거한 다음 약초를 바르려고 했다. 그때 준이 손을 뻗으며 막았다.

“우선 허벅지를 묶어 독이 올라오는 시간을 늦춰. 치료는 진료소에서 하자.”

“마법으로 치료해 주시는 게 더 빠르지 않아요?”

질문을 받은 준은 묘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영리했던 아그네스는 그 미소의 의미를 눈치챘다. 자신은 마나를 다루지 못하니까, 만약 준이 없다면 약으로 치료를 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 편이 네게 좋은 경험이 될 거다. 일단 업혀.”

그렇게 하룬은 무사히 진료실에 업혀 왔고, 아그네스는 바로 치료에 들어갔다.

여전히 독침은 다리에 꽂혀 있었다.

그러나 하룬의 불만은 부상 말고 다른 곳에 있었다. 왠지 실험체가 된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반면 치료를 준비하는 두 사람은 화기애애했다. 준이 아그네스에게 얇은 고무장갑을 건넸다.

“앞으로 치료할 때는 이 장갑을 쓰도록. 상처 부위의 감염을 막아 줄 거다.”

“예. 그럼 시작할까요?”

“좋아.”

아그네스는 준의 가르침에 따라 독침을 제거했다. 다행히 독침 끝이 단순한 형태로 되어 있어 빼내기가 어렵지 않았다.

이어 준이 설명했다.

“독이 퍼지는 걸 막으려고 상처를 더 내서 피를 빼는 경우가 있는데, 전혀 도움이 안 돼. 그러니 독침을 빼고 약초를 쓰는 게 훨씬 낫다.”

“그렇군요.”

준은 찬장에서 말린 약초병 몇 개를 꺼내 배합했다. 배합 재료와 원리도 아그네스에게 세세히 설명했다.

“상처에 잘 스며들 수 있도록 곱게 빻는 게 우선이야. 다행히 재료가 손질이 잘 되어 있어서 수월하구나.”

문득 알라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누아 마을의 전직 치유사.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준은 왠지 익숙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아그네스의 손길을 향하고 있었다.

“자, 그럼 치료 시작합니다.”

“아악! 야! 살살 좀 해!”

“가만히 좀 있어! 그래야 약이 잘 스며들지.”

“너…… 나한테 원한 있냐?”

“원한만 있으면 다행이게?”

핀잔을 준 아그네스가 문득 궁금증이 들어 준에게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고블린 독은 마비 효과가 있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아파하는 거예요?”

“심각한 합병증이 생겼으니까.”

두 사람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약병을 찬장에 하나씩 넣으며 준이 덧붙였다.

“엄살.”

아그네스는 웃음을 터트렸고, 하룬의 얼굴은 시뻘겋게 물들고 말았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놀림거리가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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