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6화 (6/175)

6화 월영초(月影草)

해가 저물 무렵 진료소의 청소가 모두 끝났다.

만약 릴리가 몰래 도움을 주지 않았더라면 시간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묵은 때를 벗겨낸 진료소는 완전히 새로워졌다.

세부 정리엔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환자들이 머무는 대기실과 진료실, 입원실을 포함한 대부분의 공간이 깨끗해졌다.

“이제 언제든 환자를 받을 수 있겠어요. 저기, 선생님. 청소도 끝났는데 시원한 차 한잔 어떠세요?”

반가운 제안이었다. 준이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들만 있을 땐 편하게 준이라고 불러도 된다.”

“예? 그래도 돼요?”

“불필요한 격식은 짐일 뿐이야.”

아그네스와 하룬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래도 될까 하는 의견을 눈으로 교환했는데 하룬이 씨익 웃더니.

“헤이 준!”

저지르고 말았다.

정색한 아그네스가 가차 없이 하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크억!”

“보셨죠? 이런 부작용이 있어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너무 버릇없이 보일 거 같아요. 선생님은 선생님이니까. 아무튼 차 드실 거죠?”

“부탁한다.”

“나도!”

이윽고 진료실에 두 사내만 남았다.

분위기는 자연 어색해졌다. 신경을 쓰는 쪽은 하룬이었다. 준은 두꺼운 책을 펼쳐보며 아예 그쪽에 관심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근데 쌤. 마리는 얼마나 더 치료를 받아야 합니까?”

“못해도 한 달은 꾸준히 진료소에 와야 할 거다. 그 이후로도 안정화 치료가 필요하지.”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군요. 그래도 이제 건강해질 수 있다니 다행입니다. 마리 그 녀석, 우리 마을의 귀염둥이거든요.”

“그런가.”

준은 문득 궁금했다. 갑작스러운 변화를 목격한 마을 사람들이 마리를 어떻게 바라볼까?

“치료를 시작하게 되면 못 알아볼 정도로 훌쩍 클 거야. 병 때문에 억눌려 있던 것들이 풀어질 거거든.”

“헐, 그런 일도 있습니까? 치유술의 세계는 역시 신기하네요. 그럼 마리는 얼만큼이나 자라는데요?”

“글쎄. 아그네스가 몇 살이지?”

“저랑 동갑이니 열여덟이죠.”

“그럼 아그네스와 비슷하게 되겠지. 귀염둥이라는 수식어는 다른 아이에게 양보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하룬의 표정이 나라를 잃은 사람의 그것과 같아졌다. 그제야 준의 시선이 책을 떠나 하룬에게 향했다.

“설마 그런 취향이었나?”

“아하하하하! 취향이라뇨.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 아닙니다. 아녜요 그런 거. 아무튼 안 아픈 게 최고죠. 흠흠.”

또다시 찾아온 침묵.

“너는 아직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아니, 그게…….”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사람을 믿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지 않나?”

“제 머릿속에 들어갔다 오기라도 하셨습니까?”

하룬이 투덜거렸다.

눈앞의 사내는 못 하는 게 없었다. 심지어 청소까지 잘했다. 거기에 수려한 외모는 덤이고 눈치도 빠르니 부러울 수밖에.

“요즘 마을 주변에 몬스터들이 자주 나타나서 다들 예민한 상황입니다. 그 상황에서 외지인이 나타나는 건 썩 반갑진 않죠.”

“그렇군.”

“그래도 뭐, 전 크게 신경은 안 씁니다.”

“왜?”

“음. 글쎄요?”

묘하게 여지를 남기자 준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하룬은 아까 마리를 진료할 때의 준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굳이 무릎까지 굽히며 눈높이를 맞췄던 그 모습에서 진심을 느꼈다.

이 사람은 진짜일지도 몰라.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들었다.

출신도 나이도 모르는 남자가 마을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치유사가 되었다. 자경단 내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하나둘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근데 마을엔 얼마나 머무실 겁니까?”

“아직 안 정했다.”

“우리 마을에 정착한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

분위기가 더 어색해지려던 그때 아그네스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해요? 또 쟤가 선생님 이름 불렀어요?”

“아니다. 그런데 그건?”

“아, 향 좋죠? 우리 마을 전통차예요. 피로 회복에 그만이죠. 감기에도 좋고요.”

주전자에서 흘러나온 투박한 향이 기분을 편하게 해줬다. 고향의 향기라고 해야 할까.

차를 한 잔씩 돌린 아그네스가 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데 선생님. 이제 진료소를 운영하려면 약초를 부지런히 캐야 하지 않을까요? 환자가 없는 건 좋지만 좀 걱정이 돼서요.”

“당분간은 괜찮을 거야. 약재 창고를 보니 재고가 많이 남아 있었어.”

“엄청 오래된 약인데 괜찮을까요?”

“보존 마법이 걸려 있더군. 마법은 희미해졌지만 약효에 큰 문제는 없다.”

“그거 다행이네요.”

그래도 약초 채집은 하는 게 좋다. 추가로 필요한 것들이 있었으니까. 거기에 대한 생각을 하니 절로 몇 가지 문제가 떠올랐다.

“하룬. 이 근방엔 어떤 몬스터들이 나타나지?”

“야생 늑대와 멧돼지, 고블린 정도입니다. 옛날엔 늑대인간도 있었다고 하는데 전설 같은 거고요. 산에 깊이 들어갈수록 강한 몬스터들이 나와요. 코볼트나 대형 거미도 나온다는 얘기도 들었네요.”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는?”

“떼로 덤비지만 않는다면야 아무 문제 없어요. 이래 봬도 검 좀 씁니다. 하핫!”

하룬은 가슴을 툭툭 쳤다. 검술에 대해서만큼은 당신보다 낫다는, 자신감에 찬 행동이었다. 준은 내심 웃겼지만 받아 주었다.

“좋아. 그럼 내일부터 약초 채집을 시작하도록 하지. 아그네스. 받아라.”

“이게 뭐예요?”

“네가 채집해야 할 약초들이야.”

아그네스는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메모를 살폈다. 익숙한 이름도 있었지만 생소한 것들도 많았다. 표정이 난처해졌다.

“잘 모르는 것들이 많네요.”

“그런 것들은 도감을 보면 될 거야.”

“아까 주신 그 책이죠?”

“그래. 마리의 치료에 필요한 약초들은 따로 표시했으니 충분히 채집해 오도록. 뿌리와 열매를 최대한 상하지 않게 하는 게 포인트다.”

“예!”

그렇게 세 사람은 한가롭게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 진료소를 어떻게 운영할 건지, 일은 어떻게 분담할지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러다 보니 해가 저물고 어느덧 달이 밤하늘에 높게 떴다.

하룬은 피곤했는지 의자에 기댄 채 잠들었다. 그에 비해 준은 영롱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림 같은 풍경에 아그네스가 잠시 넋을 잃었다.

“만월인가…….”

그 한마디에 아그네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얼굴이 빨개져 있었지만 랜턴 빛에 가려 티가 나거나 하진 않았다.

이번엔 아그네스가 준의 곁에 섰다. 나란히 서서 함께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준의 말대로 보름달이 떠 있었다.

“보름달에 뭐 숨겨둔 사연 같은 거라도 있어요?”

“갑자기 그건 왜?”

“너무 열심히 쳐다보시는 거 같아서요. 혹시, 애인?”

애인이라는 말에 루치아의 모습이 흐릿하게 떠오르다 사라졌다. 준은 웃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제가 말실수했나요?”

“아니야.”

“선생님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으니까…… 생각해보니 오늘도 진료소 얘기만 했잖아요? 아는 건 이름 한 글자뿐이네요.”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얘기였지만 준은 대답 대신 자리에 앉았다.

굳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필요한 것은 시간이 흐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준이 화제를 돌렸다.

“월영초(月影草)라고 들어 봤나?”

“아까 메모에 있던 약초 이름 아니에요?”

“그래. 약초의 생김새와 특성은?”

“도감을 안 봐서 잘 모르겠는데…… 아, 혹시 보름달과 관련이 있는 약초인가요?”

준은 내심 감탄했다.

겉으로는 어설프게 보여도 훌륭한 직관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를 잘 가르친다면 분명 훌륭한 치유사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만 피는 꽃의 일종이지. 오늘 밤이 마침 그날인 것 같은데.”

“그럼 찾으러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피곤하지 않아?”

“이 정도는 괜찮아요. 청소야 매번 하는 거라 일 축에도 못 낀다구요. 준비할까요?”

“그래.”

아그네스는 채집 도구를 준비했다. 마지막으로 로브를 걸쳤다. 호위 역인 하룬은 일부러 깨우지 않았다.

반면 준은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 미리 띄운 위성과 마나를 이용한다면 월영초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준은 가운을 벗었다.

“아, 옷은 저한테 주세요. 제가…….”

아그네스는 가운을 받아 걸어 놓으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준은 벗은 옷을 하룬에게 덮어 주었다.

의외의 전개였다.

준은 새삼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아그네스에게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쟤…… 선생님께 찍힌 거 아니었어요? 하도 까불어서 혼날 줄 알았는데 옷까지 덮어 주시고.”

“천만에.”

아그네스는 미소를 지었다. 비록 다가가기는 좀 힘들지만, 마음씨는 넓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슬슬 출발하자.”

“옙.”

그렇게 두 사람은 진료소를 나섰다.

마을에서 외진 곳에 위치한 터라 주변이 컴컴했다. 달빛에 의지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는데, 그제야 아그네스는 횃불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창고를 뒤적일 필요는 없었다.

“라이트(Light).”

나직한 시동어와 함께 준의 머리 위로 광원이 떠올랐던 것.

“와아!”

탄성이 절로 나왔다. 아그네스는 예전에 할아버지가 시전했던 라이트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보다 크고 선명했으니까.

* * *

“정말 처음 온 거 맞아요?”

아그네스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준의 뒤를 따라가기만 했는데 그는 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사실 지금 준의 머릿속에선 3차원 지리 정보가 전송되고 있었다. 누아 마을 일대는 준이 미리 쏘아 올린 마법공학 위성으로 탐색이 끝나 있었다.

“길을 잘 찾는 건 중요하지 않아. 길이 없는 곳에 약초가 있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거든. 중요한 건, 옳은 길이든 틀린 길이든 약초가 있는 곳에 정확히 도달해야 한다는 거다.”

“아, 예…….”

“약초학만의 얘기는 아니다. 인생도 그렇지. 그런 의미에서 넌 잘하고 있어. 치유사가 되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으니까.”

“감사해요.”

아그네스의 얼굴에 미소가 꽃폈다.

그녀는 어깨를 펴고 꿋꿋이 준의 뒤를 따라갔다. 평소라면 간간이 들려오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무서웠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준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그만큼 든든했다.

“이 근처일 텐데.”

준이 걸음을 멈췄다.

순간 머리 위에 있던 광원이 다섯 개로 쪼개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치 사방에 횃불을 두른 것 같이 밝아졌다.

“월영초는 어디에 있어요?”

“이제 찾아봐야지. 움직이지 마라.”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졌다. 다섯 개의 광원이 소리 없이 사라진 것이다.

깜짝 놀란 아그네스가 준이 있는 쪽으로 움직이려 했지만 멈췄다. 움직이지 말라는 준의 말을 떠올린 것이다. 무서웠지만 아그네스는 잠자코 기다렸다.

“월영초는 달빛을 양분 삼아 자란다. 그래서 달빛에 그 어떤 것보다 예민하게 반응하지.”

아그네스는 침착하게 생각했다. 달빛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게 왠지 힌트 같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에 띄는 게 있나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연푸른빛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 있어요!”

파앗!

순간 사라졌던 다섯 개의 광원이 다시 빛을 발했다.

아그네스가 가리킨 곳은 큰 바위였는데, 그 밑에 푸른 잎을 지닌 월영초가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잘 찾았다.”

“헤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캐요?”

“마력이 담긴 약초는 캐기 전에 보존 마법을 걸어 두는 게 좋아. 캐는 순간부터 효능이 점점 약해지게 되니까.”

“저는 마법 못 쓰는데, 다른 방법은 없어요?”

“없어.”

“네?”

“없다고.”

너무나도 단호해서 아그네스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럴 땐 이렇게 하는 거야, 라며 다른 방법을 가르쳐줄 줄 알았는데.

“호미.”

아그네스는 바구니에서 호미를 꺼내 준에게 건넸다.

잠시 후 보존 마법이 걸린 월영초는 뿌리까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흙을 털어낸 준은 아그네스의 바구니에 월영초를 조심스레 넣었다.

바로 그때.

바스락―

뒤편에서 무언가가 풀을 밟는 거친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란 아그네스가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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