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낡은 진료소와 새로운 치유사 (2)
준은 대기실에 있는 집기 정리를 끝내고 진료실을 살펴보았다.
‘기대 이상인데?’
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그네스는 청소를 정말 열심히 했다. 실험 기구와 약병을 꼼꼼히 닦는 그 장면 하나로 그녀가 얼마나 성실한지를 알 수 있었다.
밝고 순수하지만 여린 마음을 지녔다. 아마 감수성이 풍부하리라. 이런 산골 마을과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아그네스는 커다란 실험 기구 청소에 도전했다. 유리와 목재로 되어 있었는데, 구조가 복잡해서 분리가 쉽지 않아 보였다.
“으으. 왜 이렇게 안 빠지지?”
부속품을 쥐고 끙끙거리던 그때 아그네스가 고개를 들었다. 준과 눈이 마주쳤다. 아그네스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손을 뗐다.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셔요?”
“그냥 잘하고 있나 싶어서.”
그 한마디에 아그네스의 표정에 구름이 끼었다. 어깨도 축 처졌다. 처음 준을 만났을 때 있었던 일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약초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그러면서 배움을 청했던 게 부끄러웠다. ‘살인자’라는 표현이 머릿속에 떠다녔다.
“제가 그렇게 미덥지 못하신 건가요…… 하긴, 저라고 해도 그럴 거 같아요. 할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거든요. 어떤 일이든 다른 사람과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라고.”
“과연 훌륭한 촌장님이야.”
어느새 아그네스 앞에 선 준이 말을 이었다.
“아까 내가 한 말이 신경 쓰이는 건가?”
“신경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죠. 처음엔 화도 났는데 결국엔 선생님 말씀이 맞는 거 같아요. 약을 잘못 쓰게 되면 주민분들의 목숨이 위험해지니까요.”
“보기보단 똑똑한 친구네.”
“그거…… 칭찬으로 들어도 되죠?”
“좋을 대로. 푸이푸이와 라자이아가 독성을 만들어 내는 건 사실이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아. 가벼운 복통을 일으킬 뿐이지.”
“그런데 살인자라는 말씀까지 하신 거예요?”
“일종의 비유법이라고 할까.”
가볍게 대꾸한 준은 손을 내밀었다.
아그네스는 준의 손을 내려다보며 큰 눈을 깜빡거렸다. 무슨 뜻일까. 한참 뜸을 들이자 준이 손을 좀 더 가까이 뻗었다.
“그거, 손에 든 거 줘 보라고.”
“아.”
아그네스는 실험 기구를 넘겨주었다.
딸깍. 끼리릭.
준은 마치 자기가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능숙한 솜씨로 기구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아그네스는 멍한 눈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실수하지 않고 성장하기는 어려워. 누구에게나 처음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렇다고 실수가 용납되는 건 아니지.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어렵네요. 어깨가 무거울 것 같아요. 휴.”
“치유사가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요.”
“네가 선택한 길이야. 한 번뿐인 인생인데 어깨가 무겁지 않다면 의미가 있을까?”
준은 가볍게 손을 털고 진료실을 나갔다.
아그네스는 두 번 놀랐다.
하나는 잠깐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실험 기구가 모조리 분해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씻고 닦기 좋게 작은 크기로 말이다.
나머지 하나는 준이 마지막에 한 말이었다.
비중을 따지자면 그쪽이 좀 더 컸다.
지금까지 치유사가 되면 사람을 돌보고 치료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치유사는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어떤 숭고한 사명을 띤 게 아닐까 싶었다.
“아직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아그네스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곧 알 수 있게 되겠지?”
저 멀리 보이는 준의 모습을 보며 아그네스가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실험 기구의 부속을 하나씩 꼼꼼히 닦기 시작했다.
작업이 모두 끝나고 한숨 돌릴 무렵, 그녀가 뭔가를 떠올렸다.
“맞다! 그걸 깜빡했구나?”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아직 청소가 모두 끝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떠오른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첫 환자가 올지 알 수 없으니.
아그네스가 뛰어나갔다.
“선생님! 저 잠시 할아버지 댁에 좀 다녀와도 될까요?”
준은 그런 걸 왜 물어보냐는 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꾸벅 인사한 아그네스는 흥겨운 발걸음으로 진료소를 나섰다.
* * *
잠시 후 다시 진료소로 돌아온 아그네스가 건넨 것은 하얀 가운이었다. 옷을 받아 든 준은 그것을 보며 물었다.
“이게 뭐야?”
“치유사가 입는 옷이에요. 할아버지께서 준비해 주셨어요. 선생님은 이제 우리 마을의 치유사님이니까 받아 주세요.”
대부분의 치유사들은 하얀 가운이나 그 계통의 옷을 입는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결정적으로 하얀색엔 신성력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준은 묵묵히 옷을 펼쳤다.
새 옷은 아니었다. 입은 흔적이 있고 조금 오래되어 보이긴 했지만 깨끗이 세탁되어 있었다.
“저…… 마음에 안 드세요? 너무 구식인가?”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조마조마했던 아그네스의 얼굴이 환하게 폈다.
“그럼 어서 입어 보세요! 잘 맞을 거라고 하셨어요.”
“늘 신세만 지네.”
“마리를 안 아프게 해 주셨는데 이 정도는 해 드려야죠.”
준은 가운을 걸쳤다.
아론의 예상대로 딱 맞았다. 입기 전엔 조금 긴 느낌이 있었는데, 키가 큰 터라 오히려 잘 어울렸다.
그 모습을 본 아그네스가 입을 가리며 눈을 빛냈다.
“우와! 정말 잘 어울리셔요! 마치 치유사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느낌?”
“칭찬이 지나친데.”
“정말이라니까요? 선생님도 보심 깜짝 놀랄 거예요. 잠깐만요. 거울이 어딨더라.”
진료소 안을 분주히 헤집고 다니던 아그네스가 결국 큰 거울을 들고 나타났다. 아그네스는 준이 잘 볼 수 있도록 그의 앞에 거울을 놓았다.
준은 별 감흥 없는 눈으로 거울을 응시했다.
수만 년을 살아온 그였다.
드래곤의 비늘로 만든 갑옷도, 여신이 자아낸 실로 만든 의복도 입어 본 그였다. 그런 그에게 이런 별 볼 일 없는 가운이 의미가 있을 리가…….
그때, 준의 눈빛이 변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기에.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좋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목숨을 거두는 위치가 아니라 살리는 위치에 서게 됐으니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 든다.
“어때요? 괜찮죠?”
기대 어린 눈으로 준의 표정을 관찰하던 아그네스가 환하게 웃었다. 준도 따라 웃었다.
“그래. 마음에 든다.”
“잘됐네요! 할아버지도 기뻐하실 거예요.”
준은 가볍게 가운을 고쳐 입었다. 아그네스는 마치 자신의 일인 양 호들갑을 떨었다.
진료소의 문이 열린 건 바로 그때였다.
인기척을 느낀 준과 아그네스가 진료실을 나섰다. 하룬이 임무를 마친 모양이었다. 중년 부부, 그리고 마리가 들어왔다.
“분부하신 대로 환자분 모셔왔습니다요.”
하룬은 다소 못마땅한 어조로 투덜거렸다. 자신의 주특기는 검술이었는데 재능이 엉뚱한 데 쓰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그네스의 반응은 달랐다.
“드디어 첫 환자분이 오셨네요!”
가운을 일찍 챙겨 오길 잘했다고 생각한 그녀였다. 아그네스는 마리의 부모와 친한 모양인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 와중에 준은 마리를 바라보았다.
어린 소녀는 겁을 먹었는지 아버지의 뒤로 모습을 감추며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준은 싱긋 웃으며 진료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아그네스가 마리 가족을 진료실로 안내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남편한테 들었어요. 우리 마리를 살려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마리의 어머니가 정중히 인사했다. 준은 별일 아니라고 대꾸했다. 이미 감사의 말은 마리의 아버지에게 충분히 들었으니까.
“인사는 이제 괜찮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그리고 아그네스.”
“예.”
“잠시 아이를 데리고 나가 있도록 해.”
“알겠어요. 마리. 언니랑 잠깐 나가 있을까?”
마리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네스가 마리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아그네스를 마치 친언니처럼 잘 따랐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나니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준이 나직이 말했다.
“마리의 병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죠? 촌장님께서 설명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예.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요.”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일단 앉으시죠. 그렇게 서 계시지 마시고. 자, 이쪽으로.”
준은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마리의 부모가 지나치게 긴장을 하는 것 같아 준은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하지만 마리의 아버지는 달랐다. 여전히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선생님. 혹시 딸애의 병이 더 깊어진 겁니까? 어제 발작은 처음 볼 정도로 심했거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마리의 심장엔 강력한 금제가 걸려 있습니다. 상당한 마력이 응축되어 있고, 그 결과로 신체에 문제가 생기는 거지요. 성장이 멈춘 것뿐만 아니라 말도 못 하지 않습니까?”
“예. 맞습니다.”
“그렇다면 거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봐야 합니다. 다시 발작이 생긴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금제를 해제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지요.”
“후, 역시 그렇습니까.”
마리의 부모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금제를 해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에 금제를 해제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하지만 저희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모아 둔 재산도 없고…… 정말 제 스스로가 한심하군요. 마리가 귀족가의 여식으로 태어났다면 금방 병을 고쳤겠지요?”
“아뇨.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딸을 위한 마음은 저도 충분히 느꼈으니까.”
“선생님…….”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무상으로 마리의 금제를 풀어 드리지요.”
“저, 정말입니까?!”
너무 놀랐는지 두 부모가 벌떡 일어났다. 준은 온화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안정시켰다.
“사실 진짜 문제는 금제를 푸는 게 아닙니다. 그 이후의 일이죠.”
“비슷한 말씀을 촌장님께서 해 주시긴 했지만, 사실 정확히는 모릅니다. 금제가 풀리면 마력이 강해진다고만 알고 있는데…….”
“마력이 강해지면 마리를 탐내는 자들이 늘어날 겁니다. 교단이나 마탑에서 데려가려 할 수도 있겠죠.”
교단과 마탑. 그 두 글자만으로 마리의 부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두 단체의 어두운 면을 단번에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때는 손을 쓸 수 없을 겁니다. 그들과 싸우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좀 고민해 봤는데, 금제를 단번에 푸는 게 아니라 천천히 풀어 볼까 합니다.”
“천천히요?”
고개를 끄덕인 준이 설명을 계속했다.
“갑작스럽게 금제를 깨게 되면 마나에 대한 감응력이 떨어져 부작용이 생깁니다. 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거지요. 그래서 금제를 천천히 해제하고, 마리가 성장하면서 자신의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할 겁니다. 그렇다면 교단이나 마탑에서도 쉽게 마리에게 손을 댈 수 없겠죠.”
“그 말씀은…….”
“한마디로 마리를 마법사로 키울 생각입니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아!”
뜻밖의 제안이었다. 두 부부는 서로를 보며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는 귀한 직업이었다.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그때 뭔가를 깨달은 마리의 아버지가 물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곧 마을을 떠나시지 않습니까?”
“그건 아직 결정하지 않은 부분인데… 혹시라도 제가 떠난다면 촌장님이 대신 봐 주실 겁니다. 마법에 대한 지식은 풍부하시니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촌장님과 이야기를 나눴으니 문제없습니다.”
“그렇군요.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신의 축복을 받은 느낌입니다…… 흑흑…….”
두 부부는 함께 흐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이었다. 부모의 마음이란 어떤 걸까. 준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따님의 실제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올해로 열여섯입니다.”
“열여섯. 알겠습니다. 이봐 아그네스. 밖에 있나?”
밖에서 대기하던 아그네스가 잽싸게 들어왔다.
“부르셨어요?”
“마리를 데리고 오도록.”
“넵!”
곧 마리가 아그네스의 손에 이끌려왔다. 하지만 머뭇거리며 앞으로 쉬이 나서지 못했다. 아그네스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고 나서야 준의 앞에 섰다.
준이 무릎을 굽혀 마리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제 네 병을 치료해 줄 거야. 앞으로는 아프지 않을 거란다. 말도 할 수 있게 될 거고.”
“…….”
“우선 키부터 좀 잴까?”
준이 진료실 구석에 있는 기둥으로 가 손짓했다.
머뭇거리던 마리가 천천히 걸어가 기둥에 등을 기댔다. 준은 의료용 칼날로 마리의 키에 맞게 홈을 팠다.
실제 나이는 열여섯이지만 키는 여섯 살 꼬마보다도 못했다.
“좋아. 이제 됐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면 약을 만들어 주마. 약을 먹으면 점점 나아질 거야. 그러니 밥 잘 먹고 건강히 지내야 한다. 알았지?”
“…….”
마리는 멀뚱히 준을 바라보았지만, 곧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