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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4화 (4/175)

4화 낡은 진료소와 새로운 치유사 (1)

‘분명 여기라고 했는데.’

고개를 갸웃한 준은 주변을 다시 한번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눈앞의 허름한 집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이 살 것 같진 않았다. 폐가에 가까운 곳이었는데, 갈라진 벽과 지붕을 덮은 덩굴이 으스스한 느낌을 주었다.

이곳은 촌장 아론이 한번 가 보라고 권한 곳이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기에 산책 겸 바로 이쪽으로 온 것이다.

‘한번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기도 뭐하고.’

준은 거리낌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발을 내딛자 먼지가 훅 일었다. 인적이 끊긴 지 한참이나 지난 곳 같았다. 모서리 부분엔 거미줄이 여러 겹 걸쳐 있었다.

넓은 거실에 방이 몇 개 딸려 있었다. 준은 차분히 방을 오가며 내부를 살피고 나서야 촌장의 저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진료소로 사용하던 곳이구나.’

방 안에는 각종 진찰 도구들이 가득했다.

그뿐이 아니다. 실험실로도 쓰였는지 다양한 실험 기구가 준비되어 있었다. 플라스크는 물론 비커와 가열용 램프, 수조, 호스 같은 것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준은 흥미로운 눈으로 기구를 하나씩 살펴보았다.

액체가 마른 흔적들이 먼지에 덮여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적어도 최근에 사용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찬장을 열어 보니, 말린 약초들이 갈색 병에 보관되어 있었다. 병에 붙은 종이에 이름과 효능이 날림체로 적혀 있었다. 준이 모두 알고 있는 약초들이었다.

‘지식이 풍부하군. 꼼꼼하기도 하고. 꽤 실력 있는 치유사가 머물렀던 게 틀림없어.’

약초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보통이라면 이런 실험 기구까지 사용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약을 조합하기 위해 사용하던 장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끼릭.

출입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준은 손에 쥔 약병을 제자리에 내려놓고 그쪽으로 나갔다.

“어떤가. 마음에 드나?”

촌장 아론이었다. 준은 손에 묻은 먼지를 털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치된 지 오래된 진료소 같은데, 얼마나 닫혀 있었던 겁니까?”

“15년은 넘었지. 알라르 그 사람이 우리 마을을 떠난 지 그쯤 되었으니까.”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준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알라르라는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기억 속에 남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내 그 이름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준이 말했다.

“그 정도로 오래됐다면 그동안 마을 주민들이 꽤 불편을 겪었겠군요. 촌장님께서 직접 돌봐 주시긴 했겠지만 말입니다.”

“가벼운 것들은 내 손에서 어떻게 할 수 있었지만 큰 병은 그러지 못했지. 켈세타에 가서 치료를 받는 수밖에 없었네. 하지만 이제는 마을 사람들이 좀 편하게 여길 오갈 수 있게 되겠어. 자네가 있으니까.”

아론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준을 바라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듯이.

잠시 고민한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해 주신다면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겠습니다. 아픈 분들이 있다면 틈틈이 진료를 해 드리죠.”

“허허허! 그 말만 기다리고 있었네. 말이 잘 통해서 마음에 드는구먼.”

“하지만 잠깐입니다.”

“잠깐?”

“이곳에 정착한다는 결정을 내린 건 아니니까요. 무엇보다도 마을 주민들이 아직 저를 신뢰하지 못하고 계실 겁니다.”

준은 어제 자경단원 하룬이 자신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떠올렸다.

아마 그게 일반적인 마을 사람들의 인식일 것이다. 외진 마을일수록 폐쇄적인 경향이 더 심하다는 걸 오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촌장 아론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겠지. 너무 걱정하지 말고 편히 머무시게.”

“예.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허허허. 그나저나 안이 너무 지저분하구먼. 오늘 오후에 청소를 도와줄 아이들을 보내 주겠네.”

“괜찮습니다. 제가 쓸 곳이니 제가 정리하지요.”

“무슨 소린가? 이 넓은 곳을 혼자 치우려면 고생깨나 할 거야. 안 그래도 혼자 치유사 일을 하기는 어려울 테니 조수를 붙여줄 생각을 하고 있었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으시게.”

일방적인 통보였지만 준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촌장식의 배려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때, 나가려던 아론이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런데 자네의 경지는 어디까지 올랐나? 얼핏 느끼기에 4서클의 초입 단계는 넘어선 것 같은데 말일세.”

“잔재주를 부리는 정도입니다.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잔재주라? 허허.”

아론은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의 경지를 훨씬 뛰어넘은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도 잔재주라고 표현하다니. 가면 갈수록 준의 정체가 궁금해지는 그였다.

* * *

촌장이 떠나고, 준은 다시 산책길에 올랐다.

미리 띄워 둔 위성 덕분에 마을의 지리는 모두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다르기에 그는 마을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폈다.

그 와중에 몇몇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

준을 처음 본 사람들의 반응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인사를 받아 주는 사람도 있었고, 경계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와는 관계없이 준은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나마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건 촌장의 배려도 있었지만 마리 덕분이기도 했다.

마리를 치료해 준 사람이 당신이냐고 물으며 흥미를 보인 사람들이 몇 있었다. 작은 마을인 만큼 소문이 빨리 퍼지는 모양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다.’

해가 머리 바로 위에까지 올랐다. 오후에 청소를 도울 사람들을 보내 주겠다는 촌장의 말을 떠올린 준은 다시 진료소로 걸음을 옮겼다.

진료소는 고요했다. 아직 사람들이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준은 도구함을 열어 청소 도구가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도구는 있었다.

먼지떨이를 집은 준은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묵묵히 가구와 창틀에 쌓인 먼지를 털기 시작했다.

그때, 옆에서 환영이 일었다.

「이거 실화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릴리. 하지만 준은 반응하지 않고 계속 청소를 이어 갔다.

「이봐요, 마스터.」

“왜?”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해요? 그냥 손가락 한 번 튕기면 싹 정리되잖아요. 아니면 평소처럼 날 부려먹든가 하면 되지. 왜 직접 청소를 해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내가 언제 부려먹었다고 그래?”

「흥. 원래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기억하는 법이죠.」

“술 덜 깼으면 들어가 잠이나 자라.”

준은 정말 열심히 청소를 했다. 구석구석.

릴리는 자신의 힘으로 먼지를 모조리 없애 버리려 했지만, 오히려 그러는 게 방해가 되는 것 같았다. 청소를 하는 준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였으니까.

릴리는 어렴풋이 준이 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그저 남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사는 것.

그래서일까. 작은 요정은 떨어지는 먼지가 바닥에 쌓이지 않는 정도로만 손을 썼다. 어쩌다 보니 준의 청소를 돕는 꼴이 됐다.

「여기가 그렇게 마음에 드나요?」

“아직 잘 몰라. 사람들을 다 만나본 건 아니니까. 가 보지 못한 곳도 있고.”

「흐응~ 느낌적인 느낌이지만 왠지 여기에 꽤 오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네요.」

“뭐, 시간은 충분하잖아.”

그때였다. 릴리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동시에 인기척과 함께 두 남녀가 진료소 안으로 들어왔다. 준은 잠시 먼지떨이를 내려놓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오, 형씨! 이런 곳에서 또 보네?”

“안녕하세……요.”

두 사람 모두 면식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남자는 자경단원 하룬이었고, 여자는 촌장의 손녀인 아그네스였다. 하룬은 여전히 껄렁거렸고 아그네스는 잔뜩 풀이 죽은 표정이었다.

하룬이 싱글벙글 말했다.

“이야,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형씨가 그 형씨였어요? 마리의 병을 치료해 줬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누아 마을에서는 치유사를 형씨라고 부릅니까?”

하룬이 움찔 당황했다.

“아, 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하하하! 왜 이리 팍팍해요? 구면인데. 아, 맞아! 내가 어제 돌아가려는 거 말리지 않았더라면 벌써 늑대밥이 되었을 거라고.”

“그건 늑대를 상대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겠지.”

단호한 한마디에 하룬은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해했다.

겉으로는 어른 행세를 하지만 아직 열여덟 살이었다. 앳된 얼굴로 폼을 잡는 모습이 준의 눈엔 굉장히 우스웠다. 마치 어린아이의 재롱을 보는 것 같은 느낌.

금방 꼬리를 내린 하룬을 뒤로 한 채 준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하룬과는 정반대로 풀죽은 표정을 한 아그네스의 모습이 보였다. 준은 그녀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청소를 도와주러 온 건가?”

“예. 일단은요. 그리고…….”

아그네스는 머뭇거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준은 차분히 뒷말을 기다려 주었다.

“실은 할아버지께서 선생님의 일을 도와주라고 하셨어요. 일단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하셔서.”

목소리에 자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산책길에 만났을 때 했던 말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모양이다. 별다른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는데 준은 실수를 했나 싶었다.

준이 물었다.

“일을 돕는다면 견습 치유사로?”

“그렇긴 한데요. 그게…… 제가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분을…….”

“얼마나 오래 머물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잘 부탁한다.”

“예?”

“잘 부탁한다고.”

큰 눈을 끔뻑거린 아그네스의 얼굴에 드디어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폴짝 뛸 기세였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헤헤헤.”

“회복이 빠른 친구라 다행이군.”

“그게 제 장점이죠!”

분위기가 다시 밝아졌다.

하지만 준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테이블에 올려 둔 책을 집어 아그네스에게 건넸다. 미리 아공간 창고에서 꺼내 놓은 약초학 서적이었다.

“글을 읽을 줄 아나?”

“당연하죠. 치유사 지망생인데.”

“그럼 이 책을 모조리 외워. 일주일을 주지. 그 뒤에 시험 볼 거니까 제대로 읽어.”

“시……험을요?”

“왜. 자신이 없나?”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건 기회였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할게요. 일주일, 아니 닷새면 충분해요!”

“무슨 자신감이야?”

“저 이래 봬도 머리 쓰는 건 자신 있다구요.”

근거 없는 자신감인지 아닌지는 일주일 뒤면 판가름이 날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준은 이번에 하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그네스와 관계 정리를 마쳤으니 이제 그의 차례인 것이다.

다행히 눈치가 없는 친구는 아니었다.

자세가 달라졌다. 삐딱한 게 바로 섰다. 하지만 달라진 건 자세뿐만이 아니었다. 반말을 섞어 쓰던 어투도 정중히 바뀌었다.

“저도 촌장님께서 진료소 일을 도우라고 명하셨습니다. 약초 캐러 갈 때 호위가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요. 요즘 뒷산에 몬스터가 자주 나타납니다.”

“전 괜찮습니다.”

“형씨는, 아니지. 죄송. 선생님은 괜찮으실지 몰라도 네아는 아니잖아요. 호위가 필요할 겁니다.”

“네아?”

준이 되묻자 하룬이 설명했다. 아그네스의 애칭이라고. 덧붙여 소꿉친구라고 했다. 그 설명만으로도 준은 두 사람의 관계를 단번에 파악했다.

턱을 괸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하지요. 그리고 다른 일들도 좀 도와주면 좋을 거 같고.”

“구체적으로 어떤 일입니까?”

“힘쓰는 일이나 기타 심부름 같은 것.”

힘쓰는 일이라는 말에 하룬은 가슴을 툭 치며 자신감을 보였다. 예상대로라 준은 웃었다. 참 다루기 쉬운 친구인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옙.”

“아그네스와 친구라고 하니 앞으로 말은 편하게 하겠다. 이의 있나?”

“하하하! 없습니다. 저 뒤끝 그런 거 없어요.”

“앞으로 잘해 보자.”

준은 손을 내밀었고, 하룬은 당당히 그 손을 잡았다. 왜 하룬하고만 악수를 하냐는 불만에 준은 아그네스와도 손을 잡아야 했다.

“그럼 슬슬 청소를 시작해 볼까? 거실 청소는 대강 끝났으니 진료실은 아그네스가 맡아. 환자들이 치료를 받는 곳이니 신경 써서 해야 해.”

“예. 깨끗이 해 놓을게요!”

“그리고 하룬. 너는 좀 다른 일을 해 줘야겠다.”

“다른 일이요?”

고개를 끄덕인 준이 조용히 말했다.

“어제 내가 촌장님 댁에서 치료한 그 아이, 이름이 마리라고 했지?”

“맞습니다.”

“그 아이의 부모에게 전해. 시간이 될 때 아이를 데리고 진료소로 와 달라고.”

“왜요?”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았거든.”

준이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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