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시작은 언제나 낯선 곳에서 (2)
문을 열자, 중년 사내가 재빨리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사내 혼자가 아니었다. 사내의 등엔 어린 여자아이가 업혀 있었다.
아론의 미간이 좁혀졌다.
“또 발작이 시작된 겐가?”
“예!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좀 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서 이쪽으로 눕히게.”
사내는 자신의 딸을 침상에 눕혔다.
한눈에 봐도 소녀의 상태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온몸이 창백했고, 붉은 반점이 전신에 꽃처럼 피어 있었다. 숨결도 미약했다.
아론이 소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는 가볍게 마나를 흘려 넣었다.
“으음.”
아론은 가볍게 탄식을 흘렸다. 차마 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을 소녀의 아버지에게 꺼낼 수가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증세가 심각했다.
“내가 지어 준 약은 잘 먹고 있었나?”
“하나도 빠짐없이 먹었습니다. 오늘만 해도 울타리에서 잘 뛰어놀았는데…… 저, 우리 아이는 어떻습니까? 깨어날 수 있을까요?”
“그게…….”
아론은 말을 잇지 못했다.
소녀의 병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기이한 금제(禁制)가 걸려 있었고, 그 영향으로 성장이 멈추고 통증이 찾아오는 병이었다.
고위 신관이라면 모를까. 한때 마법의 길을 걷긴 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병의 원인도 정확히 알아내지 못했으니.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켈세타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걸까요?”
“그건 곤란하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촌장님!”
“진정하게. 이럴 때일수록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게야.”
켈세타가 큰 도시이긴 해도 이 정도의 금제를 치료할 능력을 가진 신관이나 치유사는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치료를 감당할 만한 재력이 없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일단 증세를 가라앉히는 게 우선이야. 그 이후에 방법을 찾아보는 게 좋겠네.”
“촌장님만 믿습니다. 제발…… 제발 딸을 살려 주십쇼! 크흑!”
“이런다고 좋아질 거 없네. 자네는 잠시 나가 있게. 내가 수를 써 보지.”
눈물을 왈칵 쏟은 사내가 방을 나갔다.
촌장은 팔을 걷고 마나를 천천히 끌어 올렸다. 우선 소녀의 몸에 마나를 주입해 금제의 영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소녀의 몸은 다른 사람의 마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기운이 침입하면 강하게 밀어내는 경향을 보였다.
그건 아론의 마나도 마찬가지였다.
소녀의 몸을 중화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좌절되었다. 여느 때와는 다른 강력한 발작이었다.
“포기하지 말거라. 이 할애비도 최선을 다할 테니!”
아론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다시 집중했다. 비록 시골 마을의 촌장 노릇을 하고 있지만 젊은 시절에는 이름깨나 날리던 마법사였다.
하지만 그 명성이 무색하게도 번번이 실패했다.
만약 그가 익힌 마법이 신성 계열의 마법이었다면 그나마 좀 나았을 텐데. 그럼에도 아론은 포기하지 않고 치료에 임했다.
달칵―
뜻하지 않게 문이 열렸다.
방해를 받은 아론은 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의외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소녀의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준이었으니까.
“그 아이, 잠시 제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자네 치유사였나?”
“정식으로 과정을 밟지는 않았지만 어깨너머로 배운 적이 있습니다.”
준은 무수한 세월을 살아오며 치유술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어울리는 힘도 갖추고 있었고 말이다.
물론 그것을 모르는 아론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어깨너머라는 말은 너무 무책임한 게 아닌가? 그 정도로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네. 이 아이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해. 마나를 다룰 수 없다면 손을 떼는 게 나아.”
“그렇다고 딱히 좋은 방법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만. 아닙니까?”
정곡을 찔렀다. 그렇게 잠시 두 사내가 서로를 응시했다.
모 아니면 도인 상황.
결국 아론은 비켜섰다. 준이 그 자리를 차지해 소녀의 안색을 살폈다. 숨은 거의 멈췄고 심장은 미약하게 뛰고 있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서두르겠습니다.”
“해 보게.”
준은 소녀의 손목을 잡았다.
마나를 조금 흘려 넣으니 바로 반응이 왔다. 소녀의 체내에 있던 고강한 기운이 격렬하게 저항한 것.
그 한 번의 시도로 준은 소녀의 상태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건 병이 아니군요. 금제로 인한 폭주 현상……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제대로 봤군. 어깨너머라는 말은 겸손이었구먼.”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어지자 아론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신의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이랬지. 지금까지는 내가 어떻게 다스려 왔지만, 이제는 한계야. 어때. 자네라면 중화가 가능하겠나?”
“한번 해 보겠습니다.”
“부탁하네.”
준은 다시 소녀의 손목을 잡고 마나를 흘려 넣었다.
다시금 강한 반발력이 느껴졌다.
굉장히 정순한 마나였다. 만약 금제가 깨어지고 각성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역사에 이름을 남길 굉장한 마법사가 될지도 모른다.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겠어. 하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금제를 깨는 것이 아니라 깨고 난 이후의 일.
‘힘에는 필연적으로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지. 과연 금제를 깨고 각성시키는 것이 옳은 일일까?’
준은 지금까지 불행한 인생을 보낸 마법사들을 숱하게 봐 왔다. 만약 소녀가 각성하고, 마법적인 재능이 알려진다면 왕국에서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왕국에서 선발해 간다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하지만 교단이나 마탑이 개입한다면 백이면 백 좋은 꼴은 못 본다. 그들은 단체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자들이니까.
수많은 경우의 수가 준의 머릿속에서 피고 지기를 반복했다.
‘좋아. 그렇게 하자.’
결정이 섰다. 준은 소녀의 손목을 통해 한 줄기 마나를 흘려보냈다.
우우웅―
수많은 저항군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준의 마나는 구렁이가 담을 넘듯 능숙하게 그들을 따돌렸다. 순식간에 혈도를 한 바퀴 돌았다.
곧 준의 마나가 소녀의 심장에 도달했다.
“…….”
준은 눈을 감고 집중을 끌어올렸다.
역시 강력한 결계가 심장을 죄고 있었다. 준은 결계를 부수지 않았다. 다만 마나를 퍼트려 그 결계에 자신의 마나가 흡수되도록 했다.
완전한 해소가 아닌 현상 유지를 택한 것이다.
때마침 여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것을 시작으로 소녀의 뺨에 붉은 온기가 돌았다. 온몸에 퍼졌던 반점도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아론이 흠칫 놀랐다.
“자네!”
“이제 됐습니다. 당분간 발작은 하지 않을 겁니다.”
“설마 금제를 깬 건가?”
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음만 먹으면 깰 수 있었지만, 당분간은 지켜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 소녀에 대해서도, 그리고 소녀의 가족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으니까.
“금제를 깨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걸 깨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촌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아무튼 대단해, 정말 대단하군! 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정체랄 것도 없습니다. 길 잃은 여행자일 뿐이지요.”
준은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소녀는 평온한 숨을 내쉬며 깊게 잠들어 있었다.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려 주는 준의 모습을 보며 촌장 아론은 무언가를 결심했다. 마침 그에게 어울리는 장소가 하나 떠올랐던 것이다.
그렇게 누아 마을에서의 첫 밤이 저물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준은 가볍게 산책을 했다. 어젯밤 치료를 받은 소녀는 완전히 안정을 되찾아 아침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전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마을은 다시금 평온을 되찾았다.
‘확실히 재미있는 마을이긴 해. 궁벽한 마을의 촌장이 마나를 다룰 줄 아는 데다 금제에 걸린 소녀까지 있다니. 흥미진진하군.’
씨익 웃은 준이 고개를 들었다.
맑고 투명한 하늘 위로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좋았다. 준은 평온을 만끽하며 천천히 길을 따라 내려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기, 당신이죠?”
청아한 목소리가 준의 발을 붙들었다. 아직 덜 무르익은 소녀의 목소리였다.
멈춰선 준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시골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예쁜 소녀였다. 분홍빛 머리카락과 두 눈이 반짝이고 있다. 손에는 약초 가방이 들려 있었는데, 인근 산에서 약초를 캐온 모양이었다.
“마리를 치료해 준 사람이요. 당신 맞죠? 어제 하룬이 얘기하더라고요. 수상한 여행자가 왔다고.”
“마리…… 하룬?”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앞서 나갔나 봐요.”
훌쩍 뛰어온 그녀는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마리는 아팠던 소녀의 이름이었고, 하룬은 그 껄렁껄렁한 자경단원 친구라고 했다.
“그리고 제 이름은 아그네스예요. 자랑스러운 촌장님이 제 할아버지죠. 자경단장님이 제 아버지고요.”
“그렇군. 그럼 이만.”
“아?”
설마 이럴 줄은 몰랐던 걸까. 아그네스는 벙찐 표정으로 그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자, 잠깐만요! 사람이 말을 걸었으면 좀 들어주셔야죠. 너무 냉정하신 거 아녜요? 혹시 도시에서 왔어요?”
“도시에서 온 것과 냉정한 게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도시 사람들은 용건만 간단히 말하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흔한 편견이지.”
준은 다시 몸을 돌려 길을 걸었다.
아그네스가 은근히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준은 그녀와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아 달라는 촌장의 뜻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아이참. 저기요!”
아그네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새 앞질러 온 그녀는 준의 앞에 섰다. 그러더니 들고 있던 약초 가방을 들이밀었다.
“사실 치유사가 되려고 요즘 이것저것 해 보고 있는데요. 오신 김에 좀 가르쳐 주면 안 돼요? 실력이 굉장히 좋다고 들었어요.”
“미안하지만 난 치유사가 아니야.”
“치유사가 아닌데 어떻게 마리의 병을 낫게 한 거예요?”
준은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고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도 없었다. 믿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준이 대꾸했다.
“넌 마나를 다룰 줄 아나?”
“아뇨.”
“그렇다면 좋은 치유사가 되기는 틀렸군.”
“…….”
“치유술에 관한 책을 읽어 본 적은 있고?”
“아뇨…….”
한마디만 더 하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저것 해 보고 있다는 건 대체 뭘 의미한 거지?”
“헤헤헤. 그게요~”
궁지에 몰리자 오히려 아그네스는 환하게 웃었다. 희한한 성격이었다. 되레 가방에서 약초 무더기를 꺼내더니 자신 있게 말했다.
“자! 봐 주세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약초를 캐고 있어요. 어때요?”
약초를 캐는 솜씨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훌륭하다고 할 만했다. 보통은 뿌리를 많이 상하게 되는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준은 손을 뻗어 붉은 약초를 집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푸른 약초를 집었다.
“이 붉은 약초의 이름이 뭔지 아나?”
“푸이푸이.”
“그럼 이쪽은?”
“음…… 라자이아?”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기본적인 약초학에 대한 지식은 있는 모양이었다.
“양쪽 모두 흔한 약초는 아니야. 하지만 이 두 약초는 같이 보관하게 되면 독성을 만들어 내지. 약으로 써 보지도 못하고 버려야 해.”
“앗!”
아그네스는 재빨리 다른 바구니로 약초를 옮겨 담았다. 그제야 처음처럼 약초가 싱싱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지식을 얻은 대가는 컸다.
준이 물었다.
“이름이 아그네스라고 했던가?”
“네!”
“하나만 묻자. 넌 마을 사람들이 건강하기를 바라나?”
“당연하죠. 가족이나 다름이 없는 분들인걸요.”
“그렇다면 치유술을 배우기 전에 약초학 공부부터 해야겠어. 치유사가 되기도 전에 살인자가 되어 버리면 곤란할 테니까.”
냉철한 지적에 아그네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순진했던 마음에 상처가 된 걸까. 큼지막한 눈망울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살인자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어느새 준은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작은 목소리는 전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