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시작은 언제나 낯선 곳에서 (1)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똑.
이슬 한 방울이 이마에 떨어지자 눈이 떠졌다. 온통 푸른 세상이 펼쳐졌다. 그뿐이 아니라 진한 풀내음도 느낄 수 있었다.
‘여기는…… 숲?’
준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몸은 상처 하나 없이 가뿐했다.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상쾌했는데, 루치아의 마지막 배려가 있었던 것 같았다.
‘어디인지 감조차 안 와. 일단 주변을 좀 둘러볼까.’
완전히 몸을 일으킨 준은 길을 찾기 위해 주변을 탐색했지만 여전히 나무와 바위만 나타날 뿐이었다.
아우우우!
그때,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뿐이 아니라 노을을 따라 해가 저물고 있었다. 곧 숲은 어둠에 휩싸일 것이고, 위험한 것들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게 된다.
마지막 생을 허무하게 끝내고 싶지 않았던 준은 바위에 걸터앉아 내력을 일으켰다.
순도 높은 마나가 심장 주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뭐야?’
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에.
‘내가 가진 힘은 사라지지 않은 건가?’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 마나가 느껴졌다. 프라가라흐를 소환할 정도로 웅혼하지는 않았지만, 웬만한 인간이 넘볼 수 없는 그런 힘이 깃들어 있었다.
순간 준의 두 눈에 이채가 서렸다.
‘잠깐. 혹시 그렇다면?’
그는 즉시 손을 뻗었다. 차원의 틈이 열리더니 창고가 입을 벌렸다. 준은 그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한마디로 거대하고 휘황찬란했다. 지금까지 준이 모아 뒀던 각종 희귀품과 전리품, 보석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굶어 죽는 일은 없겠어.”
「그러게 말이에요. 이 정도 보물이면 작은 나라라도 하나 사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지 않을까?」
뜻밖의 목소리에 준이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작은 요정의 모습이 보였다.
“릴리?”
「왜 그래요? 처음 보는 사람처럼.」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냐고요? 흥! 어딘가의 누군가가 바보 같은 소원을 빌어서 이렇게 됐죠. 어휴, 주인 한번 잘못 만났다고 팔자가 이렇게 꼬이니!」
칭얼거림은 여전했다.
힘을 완전히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나머지는 모두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자신의 하수인도 그대로 따라오는 게 당연한 순리.
동료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릴리.”
「이제야 좀 정신을 차리셨네. 왜요?」
“혹시 여기가 어딘지 짐작이 가나?”
「흥. 알 게 뭐예요? 누구 때문에 페어리 퀸이 되기는 틀렸는데. 길 잃고 헤매다가 늑대한테 궁뎅이나 콱 물려 버려랏!」
귀여운 악담을 끝으로 릴리는 멋대로 종적을 감췄다.
아무래도 많이 토라진 모양이었다. 그런 릴리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아무런 상의 없이 어마어마한 결정을 내려 버린 거니까.
‘릴리를 달래는 건 나중 일이고. 일단 마을을 찾아봐야겠어.’
무작정 돌아다니는 것보다 도구를 이용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은 다시 아공간 창고를 뒤적였다. 그때 이목을 끄는 물건이 하나 보였다. 그쪽을 향해 손을 뻗자 물건이 휙 하고 딸려 나왔다.
준은 바람을 불어 먼지를 털어 냈다.
언제인지도 모를 먼 옛날에 전리품으로 얻은 장치였다. 마법공학의 결정체로, 장치에 마나를 흘려 넣으면 렌즈를 통해 주변을 살펴볼 수 있게 된다.
‘이걸 하늘로 띄워 위성처럼 사용한다면 지도로 써먹을 수 있겠지.’
준은 즉시 실행에 옮겼다. 지면에 수직으로 장치를 세우고 마나를 일으켰다.
피우웅!
로켓처럼 쏘아진 장치가 하늘로 솟구쳤다. 잠시 후, 반짝이는 빛과 함께 주변의 지리 정보가 시각화되어 준에게 전송되기 시작했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주변 지형을 모두 파악한 준이 몸을 돌렸다.
잠시 후 사람의 흔적이 남은 숲길이 나타났다. 준은 그 길을 따라 걸었다. 그 와중에 아공간에서 배낭을 꺼내 여행자로 분장했다.
‘근처에서 확인된 마을은 하나뿐이야. 일단 그곳에서 쉬면서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봐야겠어.’
고향인 지구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 봐도 안다. 익숙한 지형도 아니었고, 그곳은 여기처럼 마나 농도가 짙지 않으니까.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수천, 아니 수만 년 동안 다양한 세계를 오가며 경험을 쌓은 그였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게 강하진 않았다.
그렇게 준은 부지런히 걸음을 걸었고, 해가 지기 전에 작은 산골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용하면서도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아이들이 울타리를 넘나들며 뛰놀고 있는 풍경이 보였다.
‘나쁘지 않은데?’
멈춰선 준은 마을을 좀 더 살폈다.
입구에 켜진 횃불 주위로 무장한 젊은 사내 두 명이 서 있었는데 가죽 갑옷과 검을 걸치고 있었다.
준은 걸음을 옮겨 그쪽으로 향했다. 두 젊은 자경단원은 눈썰미가 좋았다. 이미 준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잠깐. 처음 보는 얼굴이네?”
“숲에서 길을 잃었는데 간신히 마을을 찾았네요. 좀 쉬어 갈 수 있겠습니까?”
“여행자라고?”
두 사내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준을 살폈다. 만약 어디에서 왔냐는 질문이 나온다면 대답할 수가 없다. 이곳에 대한 지식이 없었으니까.
그중 키가 큰 자경단원 하룬이 껄렁거리며 동료에게 물었다.
“야, 우리 마을에 마지막으로 여행자가 온 게 언제였더라?”
“몰라. 기억도 안 나는데.”
“뭔가 수상하지 않냐?”
“그렇긴 하지. 안 그래도 요즘 몬스터들이 하나둘 기어 나오는데 말이야.”
두 자경단원의 의심이 점차 커졌다.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지만 준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두 자경단원의 실력이 출중하지 않다는 건 이미 간파한 뒤였다. 일이 틀어진다면 조용히 잠재우고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준이 계획을 세우고 있을 그때, 하룬이 가까이 다가오며 거들먹거렸다.
“쉬어 가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근데 형씨. 질문 하나만 합시다. 무기도 없이 숲을 어떻게 통과한 거지?”
“이곳까지는 안전하다고 들었습니다만.”
“잉? 어떤 미친놈이 그래? 최근에 고블린 무리들이 날뛰기 시작했다고. 명줄이 기네. 켈세타에 전령을 보냈는데 소문이 안 퍼졌나?”
준은 익숙한 단어 두 개를 포착했다. 고블린과 켈세타. 하나는 몬스터의 이름이고 하나는 지명.
‘분명 이곳은 와 본 적 있는 세계야.’
곧 준의 머릿속으로 하나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조용히 마을로 들어갈 수 있을 자신이 생겼다. 준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켈세타 길드에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데 운이 좋았나 보네요. 어쨌든 전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 의심이 풀리지 않으시다면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조용한 마을에 누를 끼치고 싶지는 않으니.”
“워워, 잠깐만!”
준이 돌아가려고 하자 하룬이 나서며 막았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대로 돌아가면 늑대밥밖에 더 돼? 성질 급한 형씨네. 일단 들어와. 곧 완전히 어두워질 테니까. 무기도 없이 돌아다니는 건 미친 짓이지.”
준은 못 이기는 척 다시 마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뒤쪽에서 지팡이를 쥔 노인이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아, 촌장님!”
하룬이 고개를 숙였다. 긴 수염에 풍채가 좋은 노인이 하룬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숲에서 길을 잃은 사람인데,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길을 잃었다?”
노인의 눈빛이 준을 훑었다. 순간 준은 직감했다. 겉으로 보기에 너무나도 평범한 노인이었지만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마나 유저인가?’
평범한 외양에 비해 제법 강한 마나가 느껴졌다.
하지만 노인은 준의 수준을 가늠하지 못했다. 워낙 내력의 차이가 크기도 했고, 준이 자신의 힘을 완벽하게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허허, 그렇구먼. 훤칠하게 생겨 어디 큰 도시에서 온 귀한 분인지 알았지 뭔가. 아무튼 우리 마을에 온 걸 환영하네. 나는 아론, 이 마을의 촌장이지.”
“강준입니다.”
“강준? 희한한 이름인데. 먼 동방에서 온 보물 사냥꾼인가?”
“그건 아닙니다.”
풍부한 연륜이 있었던 아론은 진실을 읽었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하긴, 이 시골 마을에 숨겨져 있는 게 뭐가 있겠나. 아무튼 오랜만에 마을에 온 손님인데 괜찮다면 우리 집에서 며칠 묵도록 하시게. 바깥소식이 좀 궁금하구먼.”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젊은 사람이 그렇게 겸손하면 못 쓰는 게야. 날 따라오게. 여기서 멀지는 않으이.”
아론은 몸을 돌려 길을 걷기 시작했다. 준은 고민 없이 바로 뒤를 따랐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두 자경단원은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촌장님은 사람이 너무 좋으셔서 탈이란 말이지. 아무래도 좀 수상한데…….”
자경단원 하룬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 * *
“정착을 하고 싶다고?”
빵을 집은 아론이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산골 마을답게 저녁상은 간소했고, 마주 앉아 저녁을 먹던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떠돌이 인생은 이제 지겨워서요. 조용한 곳에 정착해서 여생을 보낼까 합니다. 그래서 적당한 마을을 찾아다니는 중이었지요.”
“한밑천 잡은 모양이로군. 요즘 젊은이들은 다들 도시로 나가기 바쁜데 신기해.”
껄껄거리며 웃는 아론. 그러면서도 그는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자네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연륜이 느껴지는구먼. 마치 오랜 시간을 살아온 사람처럼 말이야. 여행을 오래 한 탓인가? 아니면…….”
“아마 그럴 겁니다.”
준은 짧게 대꾸하며 그의 의혹을 잘라 냈다. 보기와는 다르게 호락호락한 노인장이 아니었다.
“아무튼, 여행이라. 좋지. 나도 젊었을 적에는 대륙을 떠돌아다니곤 했으니. 아, 혹여라도 우리 손녀딸을 만난다면 도시 이야기는 접어 두게나. 매번 도시로 떠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아이라서 말이네.”
손녀딸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이 작은 집에는 촌장 혼자 머무는 듯했다. 하지만 별 흥미가 없어 굳이 묻진 않았다.
“귀한 자식일수록 여행을 보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게 내 이야기라면 달라지지 않겠나.”
말이 끊겼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마치 오래도록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침묵을 즐겼다. 어느새 그릇에 담긴 빵이 모두 사라졌다.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후식으로 마실 것을 내온 촌장이 나직이 물었다.
“어떤가. 우리 마을에 온 소감은?”
“노을이 무척 예뻤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마을에 들러 봤지만 이렇게 마음이 포근해지는 곳은 처음이네요. 고향 같다고 할까요? 마음에 듭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정착해 보는 건 어때?”
뜻밖의 제안이라 준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오늘 밤을 보내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결정할 생각이었기에.
아론이 덧붙였다.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건 없네. 우리 마을은 작지만 생각 외로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지. 소소한 재미가 있을 거야.”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젊은이치곤 너무 조심스럽다고 할까…… 혹시 목에 현상금이라도 걸린 건 아니겠지? 허허허. 농담일세. 농담이야. 아무튼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어서 쉬게. 저쪽 방을 쓰면 돼.”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신세는 무슨. 신경 쓰지 말고 내 집이다 생각하고 지내게. 마침 혼자라 적적하던 차였으니.”
그렇게 자리를 파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준은 작고 아담한 방에 몸을 뉘었다. 몸과 마음이 아늑해졌다. 얼마만의 여유인 건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정말 소원이 이루어진 모양이야.’
만족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릴리가 생각난 준은 그녀를 호출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평소라면 날개를 펄럭이며 눈앞을 날아다녀야 할 텐데, 지금은 몸을 돌린 채 무릎을 껴안고 앉아 있었다.
“뭐 해?”
「보면 몰라요? 속상해서 술 마시지.」
확실히 작은 병이 그녀의 옆에 놓여 있었다. 요정도 술을 마셨던가. 아무래도 진짜인 모양이다. 릴리의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으니까.
“미안하다. 멋대로 결정해 버려서.”
「이미 지난 일인데요 뭐. 주인 잘못 만난 내 팔자를 탓해야지 누굴 탓하남…… 휴우. 그나저나 여기가 마음에 드나 봐요? 요즘 되게 우울해 보이던데 얼굴이 활짝 폈어요.」
“그래?”
준은 미소를 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찬란한 별빛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조용하고 좋은 곳이야. 이런 곳이라면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편히 쉴 수 있겠지.”
「설마 여기에 정착하려는 건 아니겠죠? 아공간 창고에 보석을 산더미처럼 쌓아 뒀는데, 큰 도시로 가서 돈 뿌리며 흥겹게 살아야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마스터의 마지막 인생이니까요.」
마지막 인생.
짧지만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신의 선택을 받은 이후로 오래도록 함께해 온 사이였다. 툴툴거리긴 해도 릴리는 그가 행복하길 바랐다.
하지만 준이 생각하는 행복의 의미는 조금 달랐다.
“그러니까 조용히 살고 싶다는 거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내가 쓸모가 없어졌다면 미안하다. 원하면 계약을 파기해 주마. 새로운 계약자를 찾는다면 언젠가 너도 페어리 퀸이 될 수 있겠지?”
「아이고 의미 없다…….」
고개를 내저은 릴리가 모습을 감췄다. 여전히 제멋대로 구는 것을 보면 정말 화가 난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준은 침상에 누운 채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쿵쿵쿵!
“촌장님! 촌장님! 계십니까?”
바깥 출입문을 힘껏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다급한 목소리에 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뭔가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