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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화 (프롤로그) (1/175)

1화 프롤로그

폭풍이 몰아치는 듯했다. 그만큼 두 존재의 싸움은 격렬했다.

쿠르르릉!

그들은 다시 한번 부딪쳤고, 승패가 분명해졌다. 절대악 케이아스의 가슴에 거대한 상처가 남았다.

그에 비해 검을 휘두른 젊은 청년은 멀쩡했다.

그는 절대악의 상처를 확인했다. 검은 입자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치명타였다.

“망할! 인간 따위가 감히!”

절대악의 분노가 창공을 휩쓸었다.

그러나 젊은 청년, 강준은 검을 갈무리하고 조용히 손을 뻗을 뿐이다.

화르르륵!

손에 검은 불꽃이 휘감겼다. 그 불꽃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거대한 형상을 만들어갔다.

완성된 그것은 또 다른 검이었다.

프라가라흐(Fragarach).

그 정체를 확인한 절대악의 눈에 절망감이 서렸다.

“슬슬 끝내자.”

훌쩍 다가온 준이 검세를 취했다. 절대악은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준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파지지지직!

시공이 갈라지며 검흔을 남겼고, 절대악의 육체도 강렬한 파열음을 내며 깨끗이 소멸되었다.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갔다.

변한 것은 그뿐이 아니다.

거짓말처럼 어둠이 물러나고 한줄기 빛이 구름을 뚫고 나왔다.

‘드디어 끝인가? 이번 임무는 좀 길었어.’

짧게 한숨을 내쉰 준은 무기를 거두며 주변을 살폈다. 어두컴컴했던 하늘이 점점 밝아지며 사방에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파멸 직전에 몰린 세계가 점차 생명력을 되찾았다. 부서진 땅이 빠른 속도로 복구된다. 절대악이 완전히 소멸했다는 증거.

보기 힘든 진기한 광경이 펼쳐졌지만, 준의 눈은 왠지 허망해 보였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거지? 분명 퀘스트는 완벽하게 달성했는데.’

요즘 부쩍 공허감이 늘었다.

차원의 지배자이자 절대악 케이아스를 물리치라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그리고 오랜 추적과 싸움 끝에 절대악을 쓰러트렸다.

그는 신의 대리인이었다. 퀘스트를 달성하고, 강해지며, 또다시 퀘스트를 수행하는 존재다.

처음에는 나약한 인간이었지만 천 번의 환생을 거친 지금은 절대자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먼 옛날 이 일을 막 시작할 때는 짜릿한 쾌감이 있었다. 퀘스트를 완료했을 때 묘한 달성감과 충족감이 가슴을 채웠으니까.

하지만 천 번의 환생을 거치면서 모든 게 무덤덤해졌다. 감정이라는 것이 손에 쥔 모래처럼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

‘언제쯤이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다만 쉬고 싶었다.

몸에는 언제나 활력이 넘쳤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언젠가부터 진한 고독이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 원인을 깨달은 준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

좌절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신의 은총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품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 거지. 아무리 천 번을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준은 시선을 내렸다.

온갖 상처와 굳은살이 박인 자신의 손바닥이 보였다. 이 손으로 얼마나 많은 존재의 목숨을 거두었던가.

끝을 알 수 없는 허무감이 밀려오기 시작하던 바로 그때.

파팟!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준이 즉시 몸을 돌렸다.

공간이 일렁거렸다. 거대한 기운을 품은 존재가 그 틈으로 날아들어 사뿐히 착지했다. 익숙한 얼굴이었기에 준은 검을 꺼내지 않았다.

“임무를 달성했군요! 축하해요. 이번 퀘스트는 굉장히 위험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친 곳은 없어요?”

“뭐, 보다시피.”

“역시 당신은 강하군요. 강한 남자가 매력적인 법이죠.”

새하얀 날개를 지닌 천사였다.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몸매를 얇은 천으로 감싼 아름다운 여인.

그러나 그녀를 향한 준의 눈빛은 무심했다.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나?”

“그럼요.”

“그거 악취미야. 됐고, 다음 퀘스트는?”

“없어요.”

준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없다니?”

“그런 벙찐 표정은 오랜만인데요? 처음 저와 만났을 때였던 것 같은데. 세월의 풍파 때문에 변화가 없어 보일지 몰라도 제 눈을 속일 수는 없죠. 나름 안목이 있는 전령이니까.”

이어지는 침묵.

준은 진실을 말하라는 듯 천사를 바라보았다. 루치아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이것으로 당신의 임무는 모두 끝났답니다.”

“모두…… 끝나?”

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파멸에 가까운 절대악의 공격도 피해 낸 그였다. 하지만 루치아의 그 한마디만큼은 피하지 못했다.

모든 것엔 끝이 있는 법.

하지만 그 순간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사냥을 마쳤으니 개요리가 될 시간인가?”

“상상력이 뛰어나시네.”

루치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에요. 당신은 천 번의 환생을 거치며 위업을 달성했어요. 위대한 공로를 치하하며, 주신께서는 당신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실 거예요.”

“소원…….”

“그래요. 소원. 자, 말해 보세요. 무엇이든.”

루치아는 유혹하는 눈빛으로 준을 응시했고, 준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하고 싶은 것, 그 하나만 말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윤회의 사슬을 끊겠다.”

“뭐…라고요?”

루치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준을 바라보았다.

그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준이 쐐기를 박았다.

“더 이상 환생은 하지 않아. 불멸의 삶은 필요 없어. 조용한 곳에 정착해 여생을 마치고 싶다. 이게 나의 마지막 소원이야.”

“잠깐만요! 당신은 반신(半神)의 반열에 오른 존재예요. 그런데 그 특권을 포기하다니…… 이해할 수 없네요. 진심이에요?”

“그래. 진심이다. 불로불사야말로 최고의 고통이지.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루치아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웃었다.

“당신은 정말 흥미로운 사람이에요.”

“왜지?”

“당신을 끊임없이 시험했는데도 그분을 증오하지 않으니까요. 그 한마디 불평도 없이 천 번의 환생을 견뎌 내다니. 처음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은.”

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겉으로 보기에 표정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루치아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준이 대꾸했다.

“절망에 빠졌을 때 손을 내밀어 준 유일한 분이니까. 이 정도라면 충분히 보답했다고 생각한다.”

“알겠어요. 그 소원, 접수하지요.”

그때 루치아의 눈에 광채가 명멸했다. 인간계에 존재하지 않는 신비한 빛.

신의 뜻이 내려왔다.

그녀는 그 빛을 인간의 언어로 옮겼다.

― 신의 이름으로 그대의 자유를 허하노니. 기적의 빛이 그대를 인도하리라.

기적이 펼쳐졌다.

준은 주변 세계가 서서히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정신이 점차 아득해짐도 느꼈다. 눈을 감으면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자신과 자신을 제외한 공간이 분리되고 있었다.

“어디로 가게 되는 거지?”

“그건 나도 몰라요. 오로지 그분의 뜻이니까. 조용한 곳에 정착해 여생을 사는 게 당신의 소원이었으니…… 그렇게 되겠죠?”

루치아의 눈동자에 깊은 애정이 담겼다. 이별의 슬픔과 그리움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래서 준은 쉽게 눈을 감지 못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사이였다. 대리인과 전령이라는 관계를 넘어 특별한 감정이 싹트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리라.

“이제 더는 못 만나나?”

“서운하죠?”

“글쎄.”

“이제 곧 마지막인데 조금은 솔직해져도 되지 않아요?”

준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루치아도 마찬가지였다.

“몸조심해요. 인연이 닿는다면…… 언젠가 또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인연이 닿는다면.”

“그래요. 인연이 닿는다면.”

그녀의 희미한 미소가 점점 멀어져갔다. 더 이상 수마를 이기지 못했고,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준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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