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212화 (212/214)

212

13. 에필로그 35, 최종편.

"신부님, 오늘 너무 아름다우세요!"

수지킴이 호들갑스럽게 말하며 신부대기실 주위를 둥글게 종종걸음쳤다. 두 명의 웨딩 헬퍼가 세팅해놓은 드레스 주름들을 눈으로 점검하면서 연신 손에 든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날카로운 눈으로 예식장 내 모든 일이 주문 사항대로 처리되었는지 살피고 있었다.

"야, 너무 한 거 아냐? 무려 바흐 선배라니!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딱 너다. 너! 이 앙큼한 고양이 같으니라고."

라희 옆에 서 있던 미라가 짓궂게 농을 던졌다. 뾰족한 어투와 반대로 얼굴은 활짝 웃음을 머금었다.

"세상에, 처음 연락받았을 때는 장난치나 의심했었는데, 여기 오니 실감이 난다. 얘. 결혼하는구나. 진짜."

"응, 엊그제 전화 통화에서도 이야기했었지만, 나도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이라서. 지금도 얼떨떨해."

미라는 따스한 눈길로 다소곳이 앉아 있는 라희를 바라보면서 입매를 싱긋 올렸다.

"예뻐. 누구라도 미녀로 변신 가능하다는 신부화장 때문이 아니더라도, 진짜 눈부시게 예쁘다. 넌 원래 미인이니까. 크. 역시, 여자는 얼굴이 예뻐야……."

"분장에 가까운 화장 때문이야. 이거, 메이크업과 헤어만 한 시간이나 걸렸거든."

라희는 미라를 향해 입매를 올렸다. 오후 예식에 맞춰서 스케쥴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훨씬 서두른 아침부터 헤어세팅과, 메이크업, 예식 리허설, 그리고 엄마인 혼주 화장까지. 정신없이 반나절이 흘렀다. 미라와 속성 결혼식 진행의 고충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신부 대기실 입구 쪽에서 빼꼼, 아는 얼굴이 살짝 보였다가, 수줍은 듯 문기둥 뒤로 쏙 사라졌다가 이내 여러 사람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언니!"

밝게 부르는 목소리. 라희는 대기실로 들어오는 수진과 뒤에 보이는 일행들을 보며 방긋 미소 지었다.

"수진아! 어, 안녕?"

"언니, 진짜 예뻐요! 라희 언니, 오늘 진짜 드라마에 나오는 신부 같다. 그치?"

뒤따라 들어온 아이들은, 모두 결혼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며 밝게 재잘거렸다. 결혼식이라서 한껏 멋을 부리고 왔는지 예쁜 원피스 차림이었다.

"나 혼자 와서는 테이블 차지하고 앉아서 뻘쭘할 거 같았는데, 애들 데려와도 된다고 해서 고마워요. 언니. 여긴 영미, 지혜, 혜진이 알죠? 그리고 여기 우리 옆방 수미."

다들 같은 과 1년 후배로, 수진과 친한 아이들이었다. 특히 수미는 기숙사 옆방에서 지내서, 종종 같이 밥을 먹거나 야식을 주문해 함께 먹었다.

"당연, 알지. 와줘서 고마워. 방학이라서, 내 동기들은 대부분 연락이 안 되더라."

"지영 언니도 오늘 왔으면 좋았을걸. 남자친구랑 스위스에 있다던데 왔으면 정말 좋아했을 거 같아요. 그리고 호텔 결혼식 와보는 건 처음이라서 우리가 더 고맙죠! 언니."

수진이 라희의 동기 지영을 떠올리며 아쉬운 표정을 짓다가 말을 이었다.

"라희 언니 아니면 언제 이런 데 와보겠어요? 그것도 연예인들이나 식 올리는 특급호텔인데. 우와. 진짜 좋네요. 언니도 진짜진짜 거짓말 하나 안 하고 정말 예쁘세요. 아까 저쪽 입구에서 신랑님 봤는데, 와. 언니 대박."

"그쵸? 어찌 된 게 신부보다 신랑이 더 멋있어."

옆에 잠자코 있던 미라가 덧붙이자, 수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 말이요, 라고 대화를 시작했다. 중간에 유명호텔이니만큼 외국인도 보이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던 미라가 수진 일행에게 라희가 Y대 최고 킹카를 채 간 거 아느냐며 눈을 흘기며 몇 마디 웃음 띤 농담을 건넸다.

모두가 모여서 즐겁게 이야기 나누는 장면을 업체에서 고용한 비디오 카메라맨이 돌아다니면서 분주히 찍었다. 그 사이 식장을 점검하러 잠시 자리를 떠난 수지킴이 신부 대기실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예식이 곧 시작됩니다. 친구분들, 이제 대기실에서 나가주시고. 신부님은 식전 촬영을 하죠."

결혼 앨범에 담길 식전 사진을 찍으려는 모양이었다.

"이따 봐, 떨지 말고."

"언니, 화이팅!"

"언니, 결혼 축하해요!"

미라와 수진들이 한마디씩 응원멘트를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구석에 서 있던 카메라맨이 다가와 의자 옆에 놓아둔 풍성한 카라 부케를 건네며 촬영을 시작하자고 했다.

***

투명한 통 창밖으로 탁 트인 서울 시내의 찬란한 오후 전경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예식홀. 예식장 앞쪽 구석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를 필두로 한 클래식 3중주의 은은한 선율이 감미롭게 깔렸다. 영화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귀에 익은 선율이 기분 좋게 흘러나온다. 예식장 바깥은 리허설 촬영한 결혼사진 액자가 감각적으로 예쁜 꽃과 촛불 장식에 어우러져 진열되어 있었다. 실내 곳곳에 보이는 단아한 하얀 꽃. 예식장은 온통 풍성한 카라 꽃의 근사한 향기로 뒤덮였다.

활짝 열린 예식장 실내 가운데 녹색 곧은줄기가 쭉 뻗어 올라간 순백의 카라가 와인빛으로 펼쳐진 버진 로드의 주변을 하얗게 채웠다. 그 옆으로 갖가지 식기와 장식이 올라간 둥근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 예식장 입구 쪽으로 기대에 찬 눈길을 던졌다.

조금 전 실내에 울려 퍼진 위풍당당 행진곡과 함께 버진로드를 따라 환한 스포트라이트가 빛을 발했다. 그 위로 턱시도를 입은 훤칠한 신랑이 입장해 눈이 호강했는데,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얼마나 예쁠지 궁금하다는 눈빛이었다.

"예쁘구나."

작게 말을 건네며 하얀 레이스 장갑 낀 손을 위로 올려 잡은 아버지는 한껏 긴장한 기색이었다. 같이 버진로드를 걸어야 할 신부 아버지다운 깔끔한 정장 차림. 본인도 어색한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라희를 향해 겨우 입매를 올려 온화한 웃음을 지어보려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 듯 보였다. 실내에 깔린 음악이 우아한 결혼행진곡으로 바뀌었다.

"이제 신부 입장 시작합니다."

수지킴이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라희는 눈을 들어 곧게 뻗은 와인빛 버진로드를 보면서 심호흡을 했다. 쭉 뻗어 나간 저 끝, 결혼식 단상 위에 예복을 갖춰 입은 바흐가 늠름하게 서 있었다. 아니, 바흐가 아니다. 신랑의 이름은 한진욱. 이제 남편이니 진욱의 본명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되뇌었지만, 마음속 멋대로 부르던 별명이 뇌리에 끈덕지게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이제,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 아름다운 신부님께서 입장하시겠습니다. 모두 힘찬 박수로 맞이해 주시길 바랍니다. 신부 입장."

유명 아나운서 A씨가 아나운서 특유의 명료한 발음과 능숙한 말솜씨로 결혼식을 진행했다.

"가자꾸나."

잔뜩 상기된 표정의 아버지가 짧게 건넨 말과 함께, 보폭을 맞춰서 한발 한발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버진로드 주위에서 연신 잔잔한 물결 같은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진욱의 얼굴이 보였다. 깊은 눈매에서 뻗어 나온 곧은 시선이 라희를 향해 쏘아졌다. 그는 눈매를 약간 좁히며 응시하다가 잠시 멍하게 라희가 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내 눈가가 따스하게 휘면서 단정한 입매를 올려 부드럽게 웃었다.

훤칠한 그가 단상을 내려와 버진로드를 걸어 라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잘 생긴 얼굴, 큰 키, 단단한 어깨. 우아하게 뻗은 긴 팔다리. 마치 동화 속 무도회에 참석한 늠름한 왕자님의 모습 같다.

몇발짝 앞으로 다가온 진욱이 라희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모든 하객의 시선이 버진 로드 한가운데 집중되었다. 그는 예의 바른 몸가짐으로 정중히 아버지께 인사했다.

"한 서방, 라희를 부탁하네."

진욱을 향해 말을 하던 아버지의 손이 맞잡은 라희를 꾹 쥐었다가 놓았다. 낮게 잠긴 아버지의 목소리. 고개를 돌려 라희를 바라보는 눈가에는 촉촉한 물기가 어려 있었다.

"예. 장인어른."

아버지가 아쉬운 듯 고개를 낮게 끄덕이며 잡았던 라희의 손을 진욱에게 넘기자 사람들의 뜨거운 박수소리가 크게 터져 나왔다. 따스하게 맞댄 든든한 손을 잡고 걸으며 예전, 낯선 타국에서의 겨울을 떠올렸다. 뉴욕의 고모님 댁에서 마주한 유진과 나란히 서 있던 완벽한 왕자님. 멀거니 바라만 보았던 그의 손을 잡고 지금 라희가 걷고 있었다. 멋진 예복을 차려입은 눈부신 왕자님과 잘 어울리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다름 아닌 라희 자신. 스스로도 꿈인지 생시인지 믿어지지 않는다.

처음 만남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제 것이 아니라 생각했던 그의 옆자리. 국가가 공식적으로 보장하는 확고한 지위, 법적인 배우자, 부인.

"오늘 예식장을 화려하게 장식한 그 어떤 꽃도 신부님보다 더 아름답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더불어, 진짜 동화 속 왕자님이 질투할 신랑님도요. 여러분, 다시 한 번 뜨거운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회자가 말하자, 장내는 다시 큰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 이제 두 사람의 맞절 순서가 있겠습니다. 신랑 신부는 서로 마주 보고 정답게 서 주시길 바랍니다."

단상 위에 나란히 올라 서 있던 라희와 진욱은 서로를 바라보며 섰다.

"오늘은 신랑, 신부가 처음으로 내빈 여러분을 모시고 정식으로 인사드리는 의미 있는 날입니다. 첫 상견례이니만큼, 서로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엄숙하고 경건하게 맞절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인사."

사회자의 말과 함께 서로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하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졌다. 아나운서의 덕담 어린 멘트가 이어지다가, 다음 차례인 혼인 서약 순서가 되었다.

"오늘 결혼식 중 가장 중요한 신랑, 신부의 혼인 서약이 있겠습니다."

오전에 리허설 한대로, 진욱이 먼저 혼인 서약을 시작했다. 진중한 눈빛으로 바로 마주 보고 선 라희를 내려다보는 진욱의 낮은 목소리가 식장에 깔렸다.

"나 한진욱은, 송라희를 아내로 맞아 지금부터 죽는 날까지 함께하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불편할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변함없이 사랑하고 항상 존중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맹세합니다."

말을 마친 그가 라희를 향해 단정한 입매를 올렸다. 라희는 떨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입술을 벌려 작게 목소리를 냈다.

"나 송라희는 한진욱을 남편으로 맞아 지금부터 죽는 날까지 함께하며 변함없이 사랑하고 존경하며 항상 존중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맹세합니다."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마지막에는 모두에게 들리도록 용기를 내 크게 말했다.

"자, 이 아름다운 선남선녀께서 두 사람이 영원히 하나 됨을 귀빈 여러분 앞에서 당당히 언약하였습니다. 신랑 신부가 오래도록 행복하게 알콩달콩 사는 모습을 앞으로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사회자는 말을 흐리며 잠시 마이크를 내렸다가 손에 든 종이를 들여다보고서 눈매를 설핏 좁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이어지는 순서로는, 성혼 선언이 있겠습니다. 신랑님의 절친한 친우분이신데, 외국인이시군요. 제임스 K. 팔머 씨입니다. 오늘 결혼식을 위해 멀리 영국에서 급히 오셨다는군요. 우렁찬 박수로 환영해주시길 바랍니다."

사회자의 소개말이 끝나자마자, 뒤쪽에서 훤칠한 키의 외국인이 손에 흰 종이를 들고 예식 단상으로 걸어왔다. 약간 처진 눈, 반반한 이마를 훤히 드러내며 단정하게 빗어 넘긴 금발머리, 절도 있는 몸가짐으로 앞으로 걸어 나와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넘겨받은 제임스는 놀란 라희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진욱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자네의 두 번 결혼식에 전부 참석할 예정이니, 말리지 말게."

영국식 억양이 들어간 멋들어진 영어로 재빨리 중얼거린 제임스는 손에든 A4 지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하객들을 향해 건조하게 웃어 보이고는 목소리를 가다듬는 짧은 헛기침을 했다.

"안, 으음, 아뇽하쎄요. 제임스 K. 팔머라고 함미다."

외국인 특유의 억양이 잔뜩 들어간 어색한 한국말이 들리자 하객들은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제임스는 입매를 올리며 손을 작게 저어 그만하라는 동작을 취해 보이고서 손에 든 종이를 읽어 나갔다. 한국어로 쓰인 게 아닌, 영어로 대강의 발음기호만 적어 놓은 듯 보였다.

"오오느을 저으이 친구 미스터 한, …노노. 한진욱으이 웨딩을 셀레…추, 추카하며 준비하안 디클레… 성혼서언너을 하겠슴미다."

영어로는 유창하고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데, 생경한 한국어를 발음하려니 힘든 모양이었다. 하객들이 다시 응원 박수를 보내자 제임스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시로 …대처 대체? 하게슴미다. 제가 주비한 시는 페이모스 잉글리쉬 시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임미다."

곤혹스러웠는지 후, 하고 긴 숨을 내쉰 제임스가 다시 짧은 숨을 들이켜고는 하객들을 향해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평소의 여유롭고 거만한 눈빛으로 좌중을 나른히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 SONNET 116 (소네트 116)."

마침내 모국어인 영어라서 저리 당당한 태도였나 보다. 제임스의 멋들어진 영국 억양이 거침없는 운율을 타고 흘러나왔다.

"Let me not to the marriage of true minds Admit impediments. Love is not love Which alters when it alteration finds, Or bends with the remover to remove:

O no; it is an ever-fixed mark, That looks on tempests, and is never shaken;

It is the star to every wandering bark, Whose worth's unknown, although his height be taken.

Love's not Time's fool, though rosy lips and cheeks Within his bending sickle's compass come;

Love alters not with his brief hours and weeks, But bears it out even to the edge of doom."

(나는 진실된 마음의 결혼에 방해물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변화가 생길 때 변심하고

떨어뜨린다고 해서 없어지거나 휘어진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절대로요.

사랑은 영원한 이정표로서, 휘몰아치는 폭풍을 바라보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는 모든 방랑하는 돛단배를 위한 밤하늘의 북극성과 같습니다.

고도는 측정할 수 있으나, 가치는 알려지지 않았지요.

사랑은 시간의 바보가 아닙니다.

사신의 굽은 낫이 장밋빛 입술과 뺨을 베어내지만.

사랑은 짧은 시간, 세월에 변하지 않습니다.

단지, 운명의 최후까지 버틸 뿐입니다.)제임스는 거기까지 읊고서 잠시 말을 끊었다가 하객들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띄웠다.

" If this be error and upon me proved, I never writ, nor no man ever loved.

-1609. William Shakespeare."

(만약 이것이 그릇된 생각이고 내가 그렇다고 입증한다면, 나는 절대로 글을 쓰지 않을 것이고 그 어떠한 인간도 결코 사랑이란 것을 하지 못할 겁니다. -1609년, 윌리엄 셰익스피어.) 유려하게 소네트 암송을 마친 제임스는 훌륭한 연주를 마친 지휘자처럼 손을 앞으로 우아하게 뻗으며 멋들어진 인사를 했다.

"Thank you. 캄사하미다."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내는 하객들에게 인사말을 던진 제임스가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는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넘겨주기 전 고개를 돌려 재빨리 진욱과 라희를 향해 축하의 말을 건넸다.

"Congratulations on your wedding. May your marriage be blessed with love and happiness."

(결혼 축하하네. 두 사람의 축복받은 결혼에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길.)제임스는 그 길로 단상을 내려가 신랑 측인 버진로드 오른쪽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거기에는 역시 익숙한 얼굴의 외국인이 활짝 웃으며 앞에 선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제임스의 동생 엘리자베스였다.

"와, 멋진 낭송이었습니다. 정말 원어민의 발음으로 듣는 영시는 멋집니다. 뜻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결혼을 축복하는 시 같군요. 용기 내어 단상에 올라주신 팔머 씨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따라, 사람들은 잔잔한 박수를 보냈다.

"바로 이어서, 신랑님께서 신부님을 위해 이벤트를 준비하셨다고 하는군요. 저기 옆에 보이십니까? 예, 멋진 그랜드 피아노가 보이시죠? 신랑님께서 사랑하는 신부님을 위해 직접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시겠다고 합니다. 좀처럼 결혼식에서 만나보기 어려운 드문 이벤트지요? 자, 큰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임스의 등장과 마찬가지로, 오전 리허설 당시만 해도 식순에 없던 이벤트였다. 사회자의 눈짓을 받은 진욱은 놀란 라희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고는 단상 옆 구석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로 발걸음을 옮겼다.

-따다 단, 따다, 단. 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이 뇌리에 각인된 도입부.

에릭 사티(Erik Satie), 쥬 뜨 브 (Je te veux)다.

이어서 피아노 건반 위를 타고 움직이는 길고 단정한 손가락의 끝에서 감미로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손끝으로 하나하나 그려내듯 선율을 따라 섬세히 두 손이 움직였다. 하지만 진욱의 깊고 검은 눈매는 때때로 건반이 아닌, 줄곧 단상 위 홀로 서 있는 라희를 향했다.

예식장 내 테이블마다 앉아 있는 하객들이 모두 숨죽여 진욱의 연주를 지켜보는 동안 멋진 연주자의 뜨거운 눈빛에 라희의 뺨은 발그레하게 물들어 갔다. 오늘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을 새카만 검은 눈동자에 깊게 아로새기려는 듯 진욱은 피아노 연주하는 내내 라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침내 연주를 마치고 긴 손가락이 매끄러운 흑백의 건반 위에 완전히 정지했다. 실내를 타고 흐르던 달콤한 음악이 멎자,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 듯 식장 안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깜빡였다.

"멋진 연주였습니다. 마치 결혼식이 아니라 연주회에 참석한 듯한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그동안 많은 결혼식에 참석해 사회를 봐왔습니다만, 정말 오늘 결혼식은 외국 영화의 한 장면 같군요. 특별한 순간을 준비해 준 신랑님께 열렬한 축복의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실내를 가득 채운 끊이질 않는 박수 소리. 연주를 마친 진욱이 피아노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그대로 라희향해 걸어왔다. 사회자의 결혼식 진행 멘트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멍멍하게 귓가를 울리는 가운데, 라희 앞에 멈춰선 진욱은 다정히 내려다보며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라희가 수줍게 시선을 올려 달아오른 분홍빛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손을 앞으로 뻗자, 진욱이 힘주어 맞잡으며 한 발 짝 바짝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천천히, 라희의 보드라운 뺨에 입술을 비스듬히 댄 진욱이 나직이, 하지만 똑똑하게 들리도록 또렷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와 그녀와 그와 나, 최종 완결.>

============================ 작품 후기 ============================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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