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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에필로그 31
“시일이 촉박하니만큼, 오늘은 두 분께서 힘 좀 쓰셔야겠는데요?”
L호텔 웨딩 디자인 컨설턴트. 속칭 웨딩 플래너가 밝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수지킴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플래너는 떨떠름하게 앉아 있는 라희 앞 테이블 위로 고급스러운 천으로 마감된 하드커버 파일을 여러 개 건네 놓았다.
“일단, 예식룸은 36층 벨뷰스위트, 시간은 이번주 일요일 오후 3시. 예정인원은 100명. 패키지는 안 하시고, 개별 진행. 스튜디오와 메이크업은 역시 저희에게 일임하셨구요. 으음. 지금 당장 결정하실 일은….”
수지킴은 바흐와 나란히 라희를 보며 부드럽게 입매를 올렸다. 평일인데도 바흐는 회사 출근 대신, 오전부터 예약이 잡힌 L호텔 웨딩 사무실에 라희의 손을 잡고 방문했다.
어제 저녁 식사 이후 결혼준비를 위해 L 호텔 스위트에서 잠을 주무신 부모님은 체크아웃하고 잠시 오빠네 집에 갔다가 점심 때 와서 합류하기로 했다.
“두 분께서 치르실 웨딩홀 컨셉을 정하는 거에요. 테마, 꽃 장식, 식사메뉴, 부대사항, 웨딩 케이크와 답례품이네요. 그 이후, 점심을 마치시고 나서 가장 중요한 웨딩드레스, 부케, 헤어 메이크업, 슈즈를 고르실 거고, 한복은 드레스 초이스 시 명장님께서 직접 오셔서 선택을 도와주시고 치수를 재실 겁니다.”
수지킴은 자신의 손에 든 A4 서류를 살피다가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급히 말을 꺼냈다.
“아, 청첩장이 가장 급선무네요. 지금 당장 할 일은 청첩장 초이스입니다. 오늘 고르시면 인쇄해서 내일 중으로 발송될 겁니다.
오늘 밤까지 사무실로 주소 리스트를 보내주시면 저희가 봉투작업을 완료하고 발송해서 금요일 혹은 늦어도 토요일까지 받아보실 수 있도록 조율해보겠습니다. 자, 그럼 청첩장 디자인과 글귀를 골라주시겠습니까.”
두꺼운 하드커버 파일을 하나 건네주었다. 그 안에는 고급스러운 디자인과 문양의 각종 청첩장 표본들이 가격표와 함께 실물로 정리되어 있었다. 파일 맨 끝장에는 A4로 정리된 글귀가 주륵 나열되어 있었다.
-여기 두 사람 소중한 순간들이 사랑으로 엮여….
-두 사람이 만나 하나의 매듭이 되고 하나의 길이 되어….
-살기 좋은 집처럼 포근한 남편이 되겠… 몸에 맞는 옷처럼 편안한 아내가 되겠….
-아침에 눈 뜨면 보고 싶은 얼굴이…우리 결혼합니다.
-두 집안이 가약을 맺고자….
-여러 어른과 친지들을 모시고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새 인생을….
-부부의 깊은 연으로 거듭나려….
“어떤 걸로 할까요.”
라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부인이 마음에 드는 걸로 하지.”
나지막한 목소리가 답했다.
글귀들을 살펴보던 라희는 눈으로 글귀들을 따라가다가, 가운데 멈췄다. 손가락으로, 아침에…로 시작하는 글귀를 가리켰다.
「아침에 눈 뜨면 보고 싶은 얼굴이 바로 내 옆에 있습니다. 우리 결혼합니다.」
선택된 글귀 번호를 수첩에 적어 체크하던 플래너가 싱긋 웃었다.
“요즘 젊은 부부들이 선호하는 문구에요. 결혼이 집안과 집안의 결합인 것은 맞지만, 실상 중심은 두 사람이니까요. 보고 싶은 사람과 항상 함께한다는 거, 그게 결혼의 가장 큰 의미 아닐까요. 글귀도 군더더기 없이 심플하고 명료하죠.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영업의 목적에 충실한 입에 발린 말이었지만, 이렇듯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문구를 고르고 파일을 넘겨 청첩장 디자인을 고르는 일은 난감했다. 전부 다 호텔 웨딩용으로 선별된 제품이니만큼 세련되고 고급스러울 뿐만 아니라 화려하고 품격 있는 디자인이 대부분이었다.
“청첩장은 결혼식을 알리는 정중한 첫 인사이니, 부디 마음에 쏙 드시는 걸로 선택해주세요. 가격은 보시다시피, 가장 고가가 앞에 있고요 뒤로 갈수록 저렴하답니다.”
옆에서 사교적인 미소를 입가에 띤 수지킴이 말했다. 계속 뭘 고를까 고심하는 라희를 향해, 한참 지켜보던 바흐가 단정한 입술로 귓가에 속삭였다.
“엘리자베스라면, 이런 일에서 고민하지 않을 거 같군.”
엘리자베스? 라희는 런던에서 만난 차갑고 오만해 보이지만 실상 가까워지면 배려심 많은 쾌활한 소녀 같은 엘리자베스를 떠올렸다. 같이 헤러즈 백화점에 들렀을 때, 바흐의 아멕스 카드를 손에 들고 기뻐하던 모습까지. 바이 어포이트먼트에서 퍼스널 쇼퍼가 내민 코트들 사이에서 고민하던 엘리자베스는 평소 쇼핑 철학이 담긴 말을 했었다.
-그냥 가격순으로 고르는 편이 무난할 거 같았어요. 비싼 건 항상 비싼 값어치를 하거든요.
오랜 친우의 동생이니, 엘리자베스의 쇼핑 스타일을 알고 있었던 걸까. 바흐를 보며 눈을 맞추니 그가 옅은 미소 띤 눈매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이거요.”
가장 앞에 진열되어 있던 청첩장을 골랐다. 황금빛 벨벳의 촉감에 수제 리본, 그리고 촘촘히 하트모양을 따라 박은 큼지막한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로 장식된 제법 화려한 청첩장이었다. 라희가 고른 청첩장을 수첩에 적어 넣던 플래너는 흡족한 미소를 만면에 가득 올리며 행복해했다.
“역시 안목이 남다르십니다. 정말, 격조 높은 선택이세요.”
그다음 선택사항은 앞서 언급한 웨딩 테마였다. 수지킴은 싱긋 웃으며 다른 파일 집을 건넸다.
“벨뷰스위트는 프라이빗하고 고급스러워서 소규모 행사장으로 선호된답니다. 특히 벨뷰스위트는 전체 전망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종로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요, 이를 더 돋보이게 해줄 행사 디자인 시안들이 여기 준비되어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테마인 화이트, 블루, 블랙, 그레이, 레드, 와인, 핑크의 컬러테마로 꾸밀 수 있습니다. 그리고 뒤쪽을 넘겨보시면, 러블리, 큐트, 로맨틱, 엘레강스, 모던의 테마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천천히 보시고 상의해서 알려주세요.”
라희는 파일을 넘겼다. 전체적인 예식장 내 실내장식을 정하는 것이 테마 설정이었다.
색깔을 일단 선택하면 예식장 테이블보나 버진 로드에 깔린 천 그리고 벽과 실내 장식이 전부 그 색상으로 준비되고 그 밖에 자잘한 분위기를 아기자기하게 할 것인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할 것인지를 정할 수 있었다. 라희가 화이트를 가리키자, 바흐가 고개를 저었다.
“웨딩드레스가 하얀색이니까, 버진 로드는 부인이 돋보일 수 있는 다른 색깔이 나을 거야.”
바흐의 말을 듣고보니, 신부 웨딩드레스는 온통 흰색인데 주변까지 흰색이면 묻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심 끝에 라희는 와인& 엘레강스를 골랐다. 수지킴은 이내 다른 파일을 내밀었다.
“자, 다음으로는 꽃장식입니다. 플라워 더케레이션은 테마에 맞춰서 진행될 예정인데요, 본질적이고 세련된 취향과 고급스러움을 더한 디자인이 요즘 인기랍니다.
보시다시피, 절제된 컬러, 깔끔한 라인이 특징이지요. 자개, 대리석, 앨러배스터(설화석고)등의 최고급 소재와 어우러져 예식의 품격을 높인답니다. 거기에 더해 은은한 촛불, 유리, 돌과 어울어진 화려함과 모던함이 특징이지요. 특히, 길게 뻗은 버진로드는 플라워 데커레이션으로 더욱 빛난답니다.
두 분께서는 본식에서 메인으로 사용할 꽃을 고를 시면 됩니다. 결혼식에서 자주 쓰는 로즈, 백합, 카라, 수선화, 풍성한 수국, 히아신스, 요즘에는 아네모네도 인기랍니다.
아니면 모두 다 골고루 섞어서 부케식으로 진행하셔도 되고요.”
파일 안에는 홀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각기 다른 테마의 꽃장식 시안이 담겨 있었다. 결혼식에 들어가는 꽃의 양이 어마어마했기에 잠시 아연실색해져서 눈을 들어 바흐를 보니 그는 유심히 수국 사진을 보고 있었다.
“수국으로 할까요? 크고 탐스러워 보여요.”
라희가 말을 건네자 바흐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돼.”
“네? 여태 관심 있어서 보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요?”
“흐음. 아니. 꽃말이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어서.”
꽃말? 라희는 수국의 꽃말을 몰랐다.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경청하고 있던 수지킴이 입을 열었다.
“수국이 여름꽃인데다가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어서 요즘 결혼식 데코로 선호되는데요, 신랑님 말씀대로 꽃말은 결혼식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답니다.”
라희가 궁금한 눈으로 보고 있자, 수지킴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수국은 색깔별로 꽃말이 다 달라요. 푸른색은 냉정함과 거만, 하얀색은 변덕, 변심 그리고 핑크색은 소녀의 덧없는 꿈이거든요. 꽃말까지 신경 쓰신다면 유희라는 뜻을 가진 히아신스나, 배신을 뜻하는 아네모네 등은 피하셔야겠네요. 결국, 로즈, 백합, 카라에서 고르시는 수밖에 없네요.”
꽃말이라, 꽃이란 그저 보기에 예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의외였다.
“로즈는 사랑이고, 백합은 순결 혹은 변함없는 사랑, 카라는 천 년의 사랑이라는 뜻이 있답니다.”
“카라로 하겠습니다.”
수지킴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흐가 바로 말하며 라희의 의견을 살폈다. 그가 처음으로 고른 항목이었기에 라희는 밝은 미소로 답했다.
“카라라면 와인& 엘레강스 테마와 잘 어울리겠군요. 차분하고 격조있는 분위기의 화이트 플라워와, 미러 소재의 꽃병 그리고 다양한 오브제로 화려함을 더 하겠습니다. 세련된 느낌까지 함께요. 플라워와 캔들이 오브제에 비치면 블링블링해서 감각적인 느낌이 색다르거든요. 카라를 메인으로 그리고 안개꽃과 튤립을 서브로 장식하겠습니다.
데커레이션 테마는 화이트 앤 블로썸. 세팅은 세련되고 깔끔하게.”
수지킴은 예식장 대관비와 맞먹는 고가의 꽃장식에 관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은 다음, 자신이 들고 있던 수첩의 다음 리스트를 확인했다.
“이제 식사 메뉴가 남았네요. 식사 메뉴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한식, 중식, 양식이 준비 되어 있고요. 단언코, 예식 식사는 L호텔 서울만의 P 프렌치 레스토랑 특별 웨딩메뉴가 인기가 높습니다. 미슐랭 3스타의 P웨딩 코스요리는 샐러드, 수프, 스테이크, 디저트, 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P레스토랑이라면, 작년 바흐와 함께 갔던 곳이다. L호텔 신관에 위치해 있는데 같은 호텔이라서 웨딩 메뉴를 선택할 수 있었다. 바흐는 망설임 없이 P 웨딩 코스 요리로 골랐다.
“웨딩음악으로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의 클래식 3중주와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색소폰의 재즈 3중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보컬도 그에 맞춰서 준비됩니다.”
바로 결정할 수 있었다. 당연히 바흐의 취향은 클래식이니까. 클래식 3중주를 고르고 나자, 수지킴은 잠시 서류를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주례가 없는 결혼식이네요?”
“네. 그렇습니다.”
“주례가 없으면 식순이 간소화되기 때문에 여러 콘테츠를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는 사회자가 중요한데요. 사회자를 아직 정하시지 않으셨으니 저희 호텔에서 인기 높은 아나운서 A씨가 어떠신가요.”
바흐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은 웨딩케이크를 골라야 했다.
역시나 디자인도 많고 2층 케익, 3층 케익등 수도 없이 종류가 다양했다. 이 부분은 엘리자베스의 쇼핑 철학에 충실히 따랐다.
계속되는 오전 결정 사항 중 마지막은 답례품만 남았다. 답례품은 파일 북을 넘기다가 추천에 의해 바로 결정했다.
비행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양주병과 L 호텔 수제 초콜릿이 4구 들어간 상자였다. 언약의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음각 문구가 새겨진다 들었다.
결혼식 준비를 속성으로 하다 보니, 선택해야 할 것이 산더미였고 오전 일정만 마쳤는데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수지킴이 이제까지 결정한 사항에 대해 하나하나 짚으면서 마지막 컨펌을 받았다.
마지막 확인 작업을 모두 마친 라희가 넋 나간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자, 바흐가 손을 힘주어 잡고서 흰 뺨에 짧게 키스했다.
“고마워.”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뺨 위에 스며들었다. 빙그레 가벼이 미소로 답한 라희는 그가 이끄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루 일정 중 고작 반을 마쳤을 뿐이다. 더 길고 복잡할게 뻔한 오후 일정이 남아 있으니 이제 부모님과 만나서 점심을 먹고 힘을 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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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