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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205화 (205/214)

205

13. 에필로그 28

닫히는 접견실 문 사이로 김말숙이 실성한 여자처럼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창백한 형광등 아래 맞아서 얻어터진 얼굴로 미친년처럼 웃고 있으니 혐오감을 넘어 으스스해서 소름 끼쳤다.

-달깍.

문이 닫히자 라희는 진저리를 치며 몸을 돌리고서 복도를 걸었다. 비어 있는 황량한 복도에 울려 퍼지는 조용한 발걸음 소리. 또각또각, 저벅저벅. 다행히 혼자가 아니다. 안심하라는 듯, 어깨를 다정히 감싸는 단단한 손길. 라희는 고개를 반쯤 기울여 바흐의 어깨에 머리를 살며시 기댔다.

묵직한 육체, 은은한 체향이 콧속에 스미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안도감이 몰려온다. 비빌 곳이 있다는 든든함. 이런 때에 바흐도 없이 혼자였더라면 막막하고 더 참담했을지도 모른다.

"……."

머릿속이 복잡하다. 1억이라니. 김말숙은 입술만 피가 터지고 피부에 멍이 들었을 뿐 어디가 다치고 부러지고 상처가 난 게 아니다. 그런데 1억이 가당키나 할까. 복잡한 심경으로 미간을 좁히고 있으려니, 바흐가 어깨를 꾹 눌러 잡았다.

"부인이 좋을 대로 해."

계단을 내려오며 그가 말했다. 나직한 목소리가 높고 좁은 계단 공간에서 반향되어 울려 퍼졌다. 좋을 대로 하라니. 아무리 마음대로 쓰라며 6억을 담담히 건네주었다지만, 힘들게 번 돈일 텐데 이런 식으로 써도 되는 걸까.

놀란 라희는 눈을 들어 바흐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무서워서 감히 눈도 못 맞추던 깊은 눈매와 시선을 마주하니 기분이 묘하다. 오늘따라 유난이 더 짙어 보이는 새카만 눈동자가 라희를 향했다. 서늘한 눈매가 비스듬히 내려다본다. 그가 옅은 미소로 입을 열었다.

"신경 쓰지 말고, 마음 편할 대로."

"…네."

배려해주는 말. 입매를 살짝 올린 미소로 화답한 라희는 시선을 내려 유치인 면회실이라 쓰인 푯말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유치장에 입감된 라현과 김말숙. 라현은 폭행죄로, 김말숙은 상해죄로 둘 다 죄형도 비슷하다. 라희는 둘이 나란히 서 있던 모습을 떠올렸다.

천생연분 찰떡궁합처럼 죽이 짝짝 맞던 두 사람은 한순간 철천지원수가 되어 등을 돌렸다. 오빠를 경찰서에서 원만히 빼내려면 합의를 해야 하고, 합의 조건은 김말숙이 제시한 1억. 공교롭게도 라희가 이유진에게 요구했던 돈도 1억이었다. 그러고 보면 참, 1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닌데 흔히 불린다.

라희는 바흐에게 몸을 밀착해 기댔다.

그때도, 듬직한 이 남자 돈으로 해결했었다. 이유진에게 2억을 건넸다 들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이유진은 바흐 고모님 갤러리 지정 딜러로 수입을 올렸으니, 바흐에게서 추가로 2억을 얻어낸 것에 대해 심적 부담 따위는 없었을 거다.

추가수입이라고 생각했으려나. 바흐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오랜 연인이기까지 했으니 차라리 유진에게 건넨 돈은 그나마 나았다.

조금 전 김말숙이 요구한 1억은 정말 어이가 없다. 상식적으로 가능한 액수인지 헤아려보고서 부른 걸까 싶을 정도다. 시골집에 방문해서 집안 사정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왔던 걸까. 막 던진 1억 합의금.

라희가 놀라 진짜냐고 반문하자,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서 '그럼? 내가 장난하는 걸로 보여? 이 꼴을 하고서?' 라며 싸늘히 조소했었다.

라현에게는 이미 작년 여름 5천만 원이 들어간 상황. 여기서 또다시 바흐의 돈을 추가해 해결해야 할까. 바흐가 무슨 사설 은행도 아니고. 이 정도면 뻔뻔스러움을 넘어 몰염치하다.

"하아……읍."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얼굴을 찡그리며 터져 나오는 짧은 한숨이 순식간에 막혀버렸다. 공기 중 흩어지는 남은 숨결을 모조리 삼켜버릴 듯 뜨거운 입술이 내려앉았다. 맞닿은 입술을 통해 입안 가득 퍼지는 은은한 향기. 촉촉하고 뜨끈한 감각. 짜릿하게 밀착해 부드럽게 빨아들인다.

한순간 얽히고설킨 미로 같았던 머릿속을 깨끗이 비워버리는 아찔한 감촉이 뻗쳐 올라왔다. 턱이 위로 들리고 고개가 점점 뒤로 향했다. 목 언저리를 받쳐오는 뜨끈한 손바닥. 감겨들듯 조여와 흡입하는 나른한 쾌감. 입술이 사르르 녹는 감촉에 눈이 절로 감긴다.

움찔. 입술을 넘어들어온 촉촉한 혀와 혀가 만나서 서로를 미끈하게 탐했다. 맨들맨들 보드라운 감촉. 뒤엉킨 혀가 열기를 피워올렸다. 맞닿은 짙은 호흡을 목안 깊숙이 삼키고 또 삼켰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이 몽롱하면서도 찌릿한 감각들로 채워진 긴 키스가 이어졌다.

"아……."

마침내, 덮어왔던 입술이 아랫입술을 물고 있다가 쪽, 떨어지자, 라희는 감았던 눈을 떴다. 흐릿하게 풀렸던 갈색 눈동자가 깜빡이다가 급히 수축한 것은 눈앞 바흐의 어깨너머 보이는 새카만 물체를 발견한 직후였다. 경찰서 1층 계단 천장 구석에 딸 달라붙어서 감시의 눈을 빛내고 있는 검은 물체.

"CCTV."

라희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여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그가 곁눈질로 천장 구석을 힐끗 보더니 피식 웃었다.

"괜찮아. 부부인걸. 금실 좋다 하겠지."

"……"

"이제 한숨 쉬지 않는군."

가만 서 있는 라희에게 다시 짧게 키스한 바흐가 허리를 감싸 끌어안으며 입을 열었다.

"장모님께 전화, 걸어 봐. 아무래도 오셨을 거 같은데. 내가 걸면 놀라실 테니."

"아. 네…."

라희는 급히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신호음이 울리지만, 응답이 없었다. 두어 차례 더 걸어보고서 어깨를 으쓱 올렸다. 시간상으로 이곳에 도착했을 거다. 전화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필시.

"도착해서 오빠 만나는 중이신가 봐요. 곧 내려오실 거에요."

그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잠시 생각에 잠긴 눈빛이더니 곧 라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숙소는, 일단 근처 스위트 잡아놓았으니까. 그쪽으로 가셔도 되고, 아니면 집에 남는 방도 있으니. 어느 쪽이든 두 분 편안히 지내실 쪽으로 여쭈어 봐."

경황이 없어서 오늘 밤 부모님이 어디서 머무르실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인데, 미리 말해주는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라희는 입매를 올리며 까치발로 바흐의 뺨에 짧게 키스했다.

"고마워요."

***

"아이고, 어쩐다니."

엄마가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쏟아내며 말을 이었다.

"마른하늘에 무슨 청천벽력같은 일이라니. 운전하고 오면서 엄마가 얼마나 기도했는데. 세상에나. 아이고, 아이고……."

경찰서 대기실. 엄마는 딱딱한 나무 의자에서 안절부절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말끝을 흐렸다. 두 눈은 힐끔 저 유리문 너머 바삐 움직이는 경찰관들을 바라보았다.

"이만, 일어나지. 라현이가 오늘 중으로 나오기는 어려우니까."

의자 옆에 서 있던 아버지가 엄마를 보며 턱짓했다.

"그래, 엄마. 앞으로 하루 더 그리고 일이 해결 될 때까지 오빠는 입감되어 있어야 한다니까. 이만 자리를 옮겨. 여기 있어 봤자야. 뾰족한 수가 없대."

엄마는 줄곧 아이고, 아이고를 입안으로 되뇌다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라희를 향해 물었다.

"미현이는! 걔는 왜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니. 만나 봤었지? 아까 만났다며."

"어. 응."

"뭐라고 해?"

"……."

필시 부모님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깜짝 놀랄 거다. 라희는 입을 다물고 우물쭈물 망설였다.

"어서, 말해 봐. 뭐라고 하데? 합의 조건이 뭐래?"

엄마는 눈빛을 세우며 다그쳐 물었다. 난감하다. 김말숙이 말한 곧이곧대로 전해야 하나, 망설여졌다.

지금 이 순간, 그저 눈 한번 딱 감고 바흐 돈을 쓰면 당장에라도 오빠는 풀려날 수 있다. 엄마의 집요한 눈길을 받은 라희는 계속 망설이다가 옆에 묵묵히 서 있는 바흐를 잠시 바라보았다.

바흐는 태연한 얼굴로 눈을 한번 깜빡여 라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의사를 내비쳤다.

"보통은 아닐 건데. 미현이 우리 집에 와서 했던 거 봤을 때 조금 찝찝해서 의심은 들었지만 괜한 기우라고 넘겼는데 진짜 이럴 줄은……."

아버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 좀. 조용히 좀 해봐요. 라희야, 미현이가 뭐래? 아니다, 이름이 미현이도 아니라며. 뭐라더라, 마……뭐랬더라?"

엄마가 흐릿한 기억을 떠올리자, 옆에서 아버지가 명료하게 답했다.

"김말숙."

"그래, 김말숙. 김말숙이 뭐라고 해? 응? 뭔가 조건을 걸었을 거 아니야. 형사님도 합의가 가장 빠른 길이라고 하셨잖아. 응? 말 좀 해 봐. 라희야."

예전 같았으면 등짝이라도 후려쳐서라도 속 시원한 대답을 받아냈을 텐데, 사위 될 사람이 옆에서 서 있으니 애달픈 목소리로 동동거리며 재촉할 뿐이었다.

"그게."

라희의 미간이 살풋 찡그려졌다. 뭉그적거리며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라희가 답답했는지 엄마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치며 외쳤다.

"속 터지겠다. 속이 터지겠어. 어서 좀 말해봐. 내가 지금 면회시간만 끝나지 않았어도 당장 들어가 얼굴 보고 알아내는 건데."

엄마가 조바심 섞인 짜증을 내며 말하자, 라희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오빠에게 들어간 5천. 그리고 이번 1억까지. 사고는 오빠가 내고 당사자가 비켜 있는 순간에 라희가 중간에 껴서 모두다 바흐의 돈으로 해결하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올바른 길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마음 편하자고 해결해 버리면, 또다시 이런 일이 반복될지도 몰랐다.

"엄마."

거의 울상을 짓고 있는 엄마를 향해 라희가 입을 열었다. 엄마는 고개를 들어 라희에게 온 주의를 집중하며 쳐다보았다.

"김말숙이 합의금을 요구했어."

"얼만데? 얼마래?"

엄마는 눈을 크게 뜨고 조급하게 재촉했다. 계속 뜸을 들이다가 후, 긴 숨을 뱉어낸 라희가 마침내 목구멍 가득 찬 말을 토하듯 뱉어냈다.

"1억 달래.“

순간, 들이켜지는 거친 숨소리.

"뭐?"

"뭐라고?"

엄마와 아버지 두 사람이 깜짝 놀라 동시에 경악하며 외쳤다.

"세, 세상에! 미, 미친 거 아니니? 아니, 고 몇 대 맞았다고 1억 달래?"

"아무리 그래도 1억은……."

엄마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가운데 아버지가 어두운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이내 엄마의 입이 다 물리고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일이천이라면 몰라도 현재 집안에 그만한 돈이 있을 리가 없다. 라현의 결혼도 사과 수확이 끝난 가을 무렵에 하자고 했었기에 당장 없던 목돈이 생길 리도 없고. 상황을 가만 지켜보던 바흐가 뭐라 입을 열려 하자, 라희가 급히 손을 뻗어 그의 소맷부리를 잡아당겼다.

'하지 마요.'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말을 하자, 그는 라희를 바라보며 복잡한 심경으로 눈매를 좁히더니 짧은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어쩌면 좋니. 네 오빠……."

긴 탄식과 함께 맥이 탁 풀려 세상 다 산 표정으로 엄마가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흠, 어흠."

뭐라 달리 할 말이 없는 아빠는 죽을 듯 인상을 쓴 엄마를 슬쩍 보다가 괜한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시선을 움직였다. 아버지의 얼굴에도 숨기지못한 당혹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일단, 엄마. 자고 나서 생각해. 김말숙은 내일 오전부터 면회 되니까 가서 만나보던가. 엄마가 정신 차리고 이야기해 봐."

언제까지고 경찰서 대기실을 차지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아버지가 엄마의 팔을 잡아끌었다.

"오빠가 호텔 잡아 놓았으니까. 거기 가서 푹 자고 내일 봐. 지금 어차피 운전하다가는 사고만 날 게 뻔해. 차는 여기다 두고 같이 이동해."

아빠 손에 이끌려 넋 놓은 듯한 눈빛으로 힘없이 일어서는 엄마의 축 늘어진 어깨를 보고 있으려니 마음 한구석이 콕콕 아려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괜한 오지랖은 그만 부려야 했다. 일단 오빠라는 사건 당사자도 있고 가족 내 일이니 한 발짝 물러서서 지켜보기로 결심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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