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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에필로그 26
"에이 x팔. x나게 재수 없지."
말숙은 희뿌연 거울 속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화장실 밖에서 기다리는 여경이 지겨운지 발끝을 세워 구두 앞 코로 톡톡 바닥을 두드렸다.
재촉하는 소리 같아 기분이 더 더러워졌다. 젠장. 화장실 안에서 있는 시간까지 감시를 받아야 하다니. 해도 너무했다.
여경의 옆모습에 눈길을 가늘게 흘리던 말숙은 다시 거울을 쳐다보았다.
'이게 왜 이리 꼬이게 되었더라…….'
그래, 그놈의 낙지집. 말숙은 거울 속 찡그려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폈다. 가뜩이나 나이 먹은 것도 서러운데, 주름까지 더해지면 노 답이지. 암. 그렇고말고. 뚫어지게 거울을 바라보던 미현이 좀 전까지 생생한 기억을 되돌렸다.
창계천 근처 무교동에서 40년도 넘었다는 유명한 실비집. 2층짜리 건물 외관과 똑 닮은 새빨간 낙지볶음과 둥글게 부푼 노오란 계란찜을 뚝뚝 떠서 밥에 비벼 먹다가, 세트메뉴인 시원한 모시조개탕에 소주를 기울였다. 이미 아침에 한 병 원샷해서인지 맛 들인 술이 달았다.
말숙은 술잔을 같이 기울이는 라현에게 콧소리를 내며 교태를 부렸다. 둘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연신 술잔을 비웠다.
배도 거하게 부르고 취기도 알딸딸하게 올라서 이제 요 앞 청계천이나 야경 감상하며 걷다가 집에 들어가면 얼추 뜨거운 불금에 걸맞을 거 같았다. 마지막 잔을 추켜들고서 이제 이것만 비우고 나가야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야시시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혼또니! 스고이데스네."
(정말 멋지군요.)일본어였다. 한때나마 일본에 갔었기 때문일까? 귀에 익은 듯 쏙쏙 들어와 박혔다. 서울에서 유명한 맛집이니 외국인 관광객도 심심찮게 오는 모양이었다.
"오이시이! 오이시데스요!"
(맛있어요)
"오오. 우마이."
(맛있군)
"좃또 카라쿠나이데스까?"
(조금 맵지 않아요?)
"이-에."
(아니)
일본인 남자와 여자였는데, 남자는 확실히 많이 듣던 일본어 억양이었다. 여자의 억양은 조금 어색했지만, 이상하게 귀에 착착 감기는 음색이었다. 무시하고 마저 잔을 비우려고 술잔을 기울이는데, 일본인 남자의 한마디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리카짱."
순간, 말숙은 고개를 홱 돌려 뒤를 돌아봤다. 50대로 보이는 일본인 왜소한 남자와 그에 비해 새파랗게 젊은 여자. 일본풍 헤어스타일인 샤기컷과 골드블론드를 하고 있었지만, 얼굴은 길쭉한 한국인. 둥그런 일본 여자들과 애초부터 골격이 다르다.
여자와 눈이 딱 마주쳤는데, 그 찰나에 여자의 눈이 부릅떠지더니 휙 턱을 돌려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상대를 알아본 말숙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선 상태였다.
"너!"
말숙이 크게 소리쳤다.
"리카! 리카 맞지?"
"?……다레?"
(누구?)
리카년이 모르는 척 눈을 껌뻑이며 알량한 일본어로 중얼거렸다.
-촤악.
손에 들고 있던 소주가 흩뿌려진 것은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너, 이 쌍년! 내 8백만엔 내놔!"
말숙은 손을 뻗어 리카의 결 고운 골드블론드 생머리를 한가득 움켜쥐고 잡아 뜯을 듯 낚아챘다. 리카는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저항했다. 팔을 내저어 떨어지려는 리카와 절대 놓지 않으려는 말숙 때문에 식당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개년! x팔, 니년 때문에 얼마나 재수가 옴 붙은 줄 알기나 해?"
말숙이 달려들어 죽일 듯이 머리카락을 잡아 뜯자, 리카가 비명을 지르다가 한국말로 외쳤다.
"놔, 놓으라고! 미유키. 말로 해, 제발, 말로 해!"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주위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일어서서 비켜 피했다.
"잡년아,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아악. 미유키!"
일본에서 천만엔. 한국 돈으로 1억 정도를 모으려 했다. 소형 테이크 아웃 커피숍 창업비용이 그 정도 된다고 들어서 대학교나 학원가 목 좋은데다가 커피숍을 차리고서 화류일을 접고 정상적으로 살아볼까 생각하며 부푼 꿈을 안고 행복해했던 돈이었다.
말숙은 거세게 발길질을 하며 손가락 끝에 잡힌 머리채를 이리저리 쥐고 흔들었다. 퍽퍽, 날아오는 거센 발길질에 팔을 십자로 교차해 안면을 방어하던 리카를 보니 분이 더 솟구쳤다.
이년 때문이다. 미래가 어긋난 것은. 이년만 돈을 들고 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떵떵거리며 커피숍 사장님이 돼 있었을 테고, 아침부터 날아든 기분 나쁜 협박 봉투 따윈 받을 일도 없었을 거다. 모든 게 이년 탓이었다.
"꺄아! 살려 주세요!"
말숙은 이미 취기로 놓아버린 이성을 우주 밖으로 날려버리고서 비명을 지르는 리카년의 안면을 무릎을 세워 갈겼다.
퍽, 무릎 뼈가 아플 정도의 충격이 가해지고, 리카의 코에서 터져 나온 피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말숙의 손끝에 붙잡힌 머리채가 하느작거리는 지푸라기마냥 붙들려 이리저리 휘둘렸다. 마침내 벌러덩 뒤로 쓰러진 리카년 위에 올라타 피로 얼룩진 뺨을 손바닥으로 짝짝 갈겼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문뜩 뒤에서 잡아 끌어내는 강한 힘에 정신을 차렸을 땐, 신고 받고 출동한 경찰차 안이었다.
"이름. 황선자 XX년생……."
경찰들이 바글거리는 경찰서 안. 조서를 작성하는 경찰관이 독수리 타법으로 툭툭 누런 기름때 낀 키보드를 두드렸다.
"전 한 대도 안 때렸어요. 가게 안 CCTV 확인해 보세요."
리카, 아니 황선자가 얼음주머니로 얼굴을 찍어 누르며 가련하게 말했다. 낙지집에 함께 왔던 일본인은 어디론가 내뺐는지 보이지 않았다.
"안 때렸으면 일방 폭행이고, 한 대라도 때렸으면 쌍방입니다."
중년 경찰관은 사무적인 말투로 툭 내뱉었다. 말숙은 취기로 알딸딸한 눈을 끔뻑이며 낡은 철제 의자에 앉아 선자를 노려봤다. 선자는 고개를 휙 돌려 시선을 피했다.
"황선자, 이름도 뭣 같네. 개년. 지은 죄가 있으니 떳떳하지는 않은가 보지?"
말숙이 쓴웃음을 흘리며 앉아 있는데 옆에서 걱정스러운지 어깨를 초조하게 매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쓱 눈을 들어 위를 쳐다보니, 믿음직한 라현이었다. 라현은 걱정 말라는 듯이 난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다정함은 딱 거기까지였다.
"김말숙. XX년 1월 21일생. 맞지요?"
건너편 모니터 너머의 경찰관이 말숙을 보며 건조하게 이야기하자, 라현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갔다. 아차 싶었지만, 이어지는 질문 때문에 미처 라현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황선자씨와는 어떤 사이입니까?"
"아무 사이도 아니래도요. 이 여자 미친 여자예요. 술도 이빠이 마셨고요. 동네 미친 주폭이라고요!"
경찰관이 무심한 눈으로 묻자, 옆에 앉은 선자가 높게 소리쳤다. 말숙은 콧바람을 큭, 들이마시고는 입맛을 다셨다. 저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개년을 빵에 쳐 넣어야 했다. 절도죄로. 그렇게라도 그간 당한 불운의 분풀이를 해야 했다.
"일본에서 저년이 내 돈 8백만 엔을 훔쳐갔어요."
말숙은 황선자를 매섭게 쏘아보며 말했다.
"거짓말! 난 저 여자 몰라요!"
선자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말숙은 푸훗, 냉소를 흘렸다.
"CCTV 돌려보세요. 날 모른다는 저년이 내 일본 이름 미유키는 어찌 알고 불러댔는지."
중년의 경찰관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설왕설래하는 말 가운데 묵묵히 굵직한 질문을 던지며 키보드를 두드려 조서를 작성했다. 이쪽에 이골이 난 전문가다운 솜씨였다.
말숙은 일방폭행으로, 선자는 절도죄로 걸려들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린 경찰관이 모니터를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선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황선자씨, 단순 절도가 아니군요. 상습절도로 실형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네요."
그러자 선자가 씩씩거리며 말숙을 삿대질했다.
"저년은 깨끗할 줄 아세요? 김말숙이도 어서 전과를 조회해보세요. 저년 완전 범죄자라니까요."
툭툭, 경찰관은 키보드를 두드렸다.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서 한참 모니터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김말숙 씨는 지금 보호관찰 중이네요?"
"네?"
옆에서 불쑥 끼어든 남자의 어리둥절한 목소리. 경찰관은 눈을 들어 올려 말숙 옆에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라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쪽은 상습 절도, 이쪽은 상습 성매매네요. 지난번 벌금 500만 원도 분할 납부 중이고요. 아니다, 이번 달로 납부가 완료되었네요."
"오, 오백만 원요? …뭣 때문입니까."
라현이 사색이 되어 물었다.
"보자, 음. 음악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3건. 이건 노래방이나 가라오케이니 성매매는 아니고, 성매매알선등행위의처벌에관한법률 위반, 이건은 총 9건이네요."
경찰관이 단조롭게 대꾸한 말이 끝나자 라현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말숙이 조서를 쓰다 지쳐 잠시 쉬기 위해 파출소 모퉁이 휴게실로 나갈 때까지 한마디 말도 않던 라현은, 휴게실로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둘렀다.
"니가, 감히……!"
혐오감으로 얼룩진 눈을 부릅뜨고 무참히 날아드는 주먹질. 남자의 폭력은 여자와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나를 속여?"
연달아 박히는 돌덩이 같은 주먹질에 순식간에 하늘이 노래지면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분노로 입술을 씰룩거리는 라현이 오물이라도 토해내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더러운 갈보년이……!"
얼굴에 틀어박히는 주먹질과 함께 팔꿈치가 가슴팍에 와 박혔다. 너무 아파 신음소리 조차 나오지 않았다.
"커헉……!"
머릿속이 아득해지고 눈앞이 핑핑 돌았다. 거기에 발길질까지 더해지자 몸이 비틀리면서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파져 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온몸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무자비한 폭력으로 변했다. 일방적인 구타. 눈앞에 번개가 쳤다. 분노에 찬 폭력이다. 너무 고통스러워 기절할 것만 같았다.
"누, 누구 없어요! 꺅, 꺄아!"
말숙은 있는 힘을 다해 살려 달라 비명을 질러댔고, 소리를 듣고 뛰어나온 경찰관 셋이 라현을 잡아 뜯어내 폭력 행위 현행범으로 체포할 때까지 딱, 죽기 직전 뒈지지 않을 만큼만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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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