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201화 (201/214)

201

13. 에필로그 24

어수선한 경찰서 안. 머리가 떡 져서 헝클어진 중년의 남자 경찰은 독수리 타법으로 누렇게 변한 키보드를 툭, 툭, 두드렸다. 그 모습이 벌써 몇 분째인지 모르겠다. 말숙은 앞에 앉은 경찰관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따라 오는 여경과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창백한 형광등 조명이 내리쬐는 화장실 안. 에어컨이 돌지 않아서 덥고 눅진하고 습습했다. 세면대로 걸어가, 물 얼룩 흔적이 보이는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추어보았다.

피 딱지. 입술 끝이 터져서 피가 번진 자국이 보였다. 말숙은 터진 뺨을 움켜쥐고 목구멍 안쪽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정말 재수가 없었다. 말숙은 턱을 잡고 거울 속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이리저리 살폈다.

눌러보니 따끔하게 아프다. 여기뿐만이 아니다. 아까는 정말 무지막지하게 처맞아 죽는 줄 알았다.

그나마 경찰서 안이라서 다행이었지, 까닥했으면 오늘 초상 치르는 줄 알았을 정도였다. 후, 말숙은 터진 입술을 샐쭉 오므렸다.

새벽녘 설핏 잠에서 깼다. 습관적인 악몽과 함께 시작된 더럽고 찝찝한 기분은 하루 종일 이런 일을 예고하기라도 하는 듯, 뒷덜미에 묵직하게 매달려 따라다녔다.

오늘은 시작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흐릿한 물 때 자국 덕지덕지 낀 뿌연 거울 속 경찰서 화장실의 하얀 벽면이 비췄다. 한동안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말숙은 오늘 아침에 만졌던 께름칙한 서류봉투를 떠올렸다.

'그래. 그 재수 없는 흰 봉투.'

라현이 회사로 출근하고 나서, 홀로 남은 말숙은 여느 아침처럼 드립커피를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아서, 커피라도 마시지 않으면 정신이 들지 않았다.

치익, 치익, 산소호흡기 낀 환자의 답답한 숨소리 같은 커피 머신 기계 소리가 들려왔다. 말숙은 얼마 전 백화점에서 본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을 떠올렸다.

가격이 200만 원 가까이하던 커피머신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전 같으면 그깟, 2백쯤은 삼사일만 일하면 손에 쥘 수 있던 소액이었지만, 지금은 가게에 출근할 수가 없으니 그림의 떡일 뿐이다.

1년간 보호관찰 대상이라서 유흥업계에 발을 디디는 일은 조심해야 했다.

"후.."

말숙은 또로록 떨어져 내리는 갈색 커피 물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귓가에 거슬리는 소음. 그래도 다행인 것이 대략 5분여만 참으면 된다. 말숙이 코끝을 간질이는 그윽한 커피 향을 맡으며 좁은 부엌의 간이 식탁에 앉아 턱을 괴고 있을 때였다.

-딩동.

현관 초인종 벨이 울렸다. 이른 아침, 더군다나 이쪽 빌라는 노량진보다 월세가 센 만큼 1층에 공동 현관문 도어락이 걸려 있어서 아무나 들어올 수 없었다.

3층 초인종을 눌렀으면, 혹시 택배인가? 말숙은 고개를 갸웃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다시 울리는 초인종 소리. 둥그런 눈구멍을 들여다보며 밖을 보니 검은색 캡 모자를 눌러쓰고 작업복을 입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구세요?"

말숙이 묻자, 남자가 외쳤다.

"택배 왔습니다."

역시, 생각대로 택배였다. 말숙은 요근래 인터넷 쇼핑을 자제하고 있으니 라현이 주문한 것인지도 몰랐다. 현관문을 여니,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손에 든 물건을 쓱 내밀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럼."

남자는 휙, 뒤돌아 빌라 계단을 내려갔다. 말숙은 건네진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봉투. 서류봉투다. 택배라더니, 운송장도 없었다. 수취인 이름만 손글씨로 적혀 있을 뿐이었다. 송라현이겄거니, 생각하며 무심히 이름을 읽어나가던 말숙은 헉, 하고 날카롭게 숨을 집어삼켰다.

[김말숙]

심장이 쿵 하고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 서류 봉투에 적혀 있던 이름은 라현의 이름이 아닌 말숙의 본명이었다. 깜짝 놀란 말숙은 남자가 사라진 계단으로 눈을 돌렸다. 두근 두근. 놀란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현관문을 급히 닫고 식탁 위에 서류를 던진 말숙은 잘게 떨리는 손을 다잡았다. 가을에 있을 결혼식에 대비해 지난주, 가정법원에 들러 김미현으로 개명 신청을 하고 온 차였다.

두 번째 신청이니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앞으로 짧게는 한달, 길게는 삼개월만 기다리면 더는 인연이 없을 거로 생각했던 말숙이라는 본명이 떡하니 쓰인 하얀 서류봉투는 불길했다.

'침착, 침착해야 돼.'

말숙은 법원에 제출한 개명허가 신청서의 신청 사유를 떠올렸다.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 출발 하고 싶다고 적어냈다. 두 번째 개명 신청도 허무하게 반려되면 안 되었기에 기본 서류에 범죄경력 조회서까지 제출했다. 잠시 식탁 위의 하얀 서류봉투를 노려보던 말숙은 손을 뻗어 내용물을 열었다.

두꺼운 사진. 맨 윗장은 라현과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입고 있는 옷과 장소로 보아 이번 주 월요일에 함께 갔던 백화점 근처다.

지난주 말 라현의 집에 방문해 부모님께 결혼 허락받은 일을 함께 자축하기 위해 외식하러 나갔었다. 대체, 왜? 사진은 여러 장이었다.

말숙은 손안에 잡힌 사진을 빠르게 넘겼다. 전부 다 이번 주 라현과 말숙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진이었다.

휙휙, 장수를 넘기던 사진의 맨 마지막에 이르자, 어두운 배경의 사진이 한 장 나왔다. 낯선 장소, 하지만 사진 속 입고 있는 옷으로 곧 알아차렸다.

라현의 부모님께 좋은 인상을 보이기 위해서 평소 입던 쫙 달라붙어 가슴이 푹 파인 옷이 아닌, 펑퍼짐한 티셔츠에 칙칙한 치마를 걸쳤다. 충주 시골집 사진이었다.

사진 속 시간은 어둑어둑한 저녁. 대문 앞에서 밝게 인사하는 라현의 부모님과 라현, 그리고 말숙이 찍혀 있었다.

"이건…."

말숙은 얼굴을 찡그리며 눈매를 좁혔다. 이렇게 모두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찍으려면, 각도가 바로 앞이어야 했는데 당시 충주집 대문 앞에는 ?.

검은 차.

그래. 검은색 차가 세워져 있었다. 라현의 동생 라희가 연예인 같이 잘생긴 남자와 유유히 타고 사라졌던 비싼 외제차. 억세게 운 좋은 년. 라희를 떠올린 말숙의 표정이 구겨졌다. 돈 많은 의사 남자 친구를 차버리고 얻은 약혼자는 눈이 휙 돌아가게 잘 생기고 젊은데다가, 금융회사 사장이라고 했었다.

'재수 없는 년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어떤 년은 술술 풀리고.'

말숙은 혀를 끌끌 찼다. 말숙은 라현의 동생 라희를 알았다. 아니, 알았다기보다는 스쳐 지나가듯 언뜻 봤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지난여름, 일본에서 추방당해 막막한 심정으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쳇."

말숙은 뜨거운 커피를 머그컵에 조르르 따랐다. 커피가 아니라도 이미 잠을 확 달아나버렸지만, 뭐라도 마셔서 정신을 차려야 했다. 부푼 꿈을 가지고 건너간 일본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재수가 없었다. 남들은 죄다 네일샵 하나 차릴 목돈 쥐고 돌아오는데, 말숙은 탈탈 털려서 추방당했다.

원흉은 같은 숙소에서 지냈던 리카라는 년이었다. 한국 브로커의 소개로 룸에서 일하다 일본으로 건너가 일하던 차, 돈이 꽤 모여서 슬슬 귀국이 생각나던 늦은 봄이었다.

마마의 호출을 받은 말숙이 밖에 나가서 지명일을 하고 온 사이, 리카년이 모아둔 돈 8백만 엔을 들고 튀었다. 넓은 일본 바닥에서 홀연히 사라져서 종적을 알 수 없었다.

허탈한 마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공동 숙소에서 하는 일에 회의가 들었다. 이러다 또 돈을 털리면? 말짱 도루묵이 되면? 말숙은 마마를 찾아가 이야기했다. 단독 숙소를 제공해 달라고.

마마는 지금 수입으로는 힘들다면서 지명일 비는 시간에 크라브(호스티스 클럽)를 뛰라고 했다. 외모나 사이즈가 되니 외국인이어도 입 다물고 내내 웃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듣고서 지명이 없는 시간에 크라브로 나가 테이블을 봤다.

일은 힘들지 않았다. 곧 돈도 모이고 희망도 생겼다. 그러다가, 덜컥 불시 단속에 걸렸다.

일본은 관광비자로 입국해서 유흥 쪽 일하면 강제추방이었다. 모아둔 돈과 짐을 챙길 겨를도 없었다.

바로 연행되어 구류되어 있다가 새벽 비행기로 강제추방 당했다. 다행히 실형을 살거나 죗값을 물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5년간 일본 입국 금지였다.

그렇게 빈손으로 돌아와, 정신을 차리니 남은 것은 29이라는 나이뿐. 애당초 화류일이 지긋지긋해 목돈 쥐고 정리하려고 건너간 일본이었지만, 빡치게 털려서 돌아와서 남은 것은 빈손과 몸뚱어리뿐이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고, 애당초 탈 많던 고교 졸업 후부터 본격적으로 배운 일이라고는 화류일 뿐이다.

말숙은 빡세게 다이어트 하고 사이즈를 만들어 여러 가게에 면접을 보러 갔다. 이쪽 일에 몸 담그며 많은 일을 해보았지만, 무난한 일은 역시나 룸이였다.

마침 마음고생도 했던 터라 식욕도 없고 살도 쪽 빠져서 소위 마른 55, 워너비 드림 사이즈가 되었다. 이만하면 빠지지 않겠다고 생각해서, 수준을 높여보기로 했다.

풀사롱이나 퍼블릭이 아닌, 큰 맘 먹고 면접 보러 간 SS클럽. 강남에서 유명한 텐클럽이었다.

실장과 면접 예약을 하고 느지막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미용실에 들러 풀 세팅을 마치고 SS클럽 입구에 들어서려는데, 어두운 복도 안쪽에서 웬 얼굴 하얀 여자애가 마담의 배웅을 받으며 걸어 나왔다. 평범한 옷차림이었지만, 피부도 하얗고 얼굴도 꽤 예쁘장한데도 소위 풀 튜닝을 마친 전형적인 화류계 얼굴은 아니었다.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저게 텐쪽 얼굴인가?'

말숙도 하이 클럽은 처음이었다. 이쪽이 워낙 말이 많았기에 마담의 입에 발린 말을 무심히 흘리며 현관으로 걸어가는 여자의 앳된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새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 여리여리하고 청초한 매력이 풍겨서 뇌리에 깊이 남았다.

결과적으로 면접은 퇴짜였다. 이쪽 일을 하기에는 선호하는 얼굴이 아니라며, 마담은 은근한 눈빛을 흘리며 테이블 위로 성형외과 명함을 내밀었다. 소위 성형대출을 받아 얼굴을 만들어 오면 받아준다는 거였다. 화류계 마이킹(대출)은 그간 충분히 겪어 지긋지긋했기에, 말숙은 그 길로 SS클럽을 나왔다.

그 뒤로 여러 업소를 전전했다. 룸에서 일하다가 2차를 가면 하루에 꾸준히 70 정도를 찍을 수 있었지만, 술이 문제였다. 술 때문에 매일 출근이 불가능했다. 위속 가득 찬 양주 때문에 변기를 붙잡고 개같이 토하던 어느 날, 말숙은 업종을 바꿨다. 이번에는 오피(오피스텔)였다.

"큭."

말숙은 피식, 웃었다. 술 안 마시고 돈 되는 오피, 그것도 참 더럽게 재수가 없었다.

처음 몇 주는 잘 나갔다. 그러다가 불시에 단속에 걸렸다. 이미 과거에 동종 전과가 있던 말숙이었기에, 가중 벌금 500을 맞았다.

어차피 충분히 겪어봐서 벌금 집행까지 한 달여 여유가 있기에 개의치 않고 가게를 바꿔 일했다. 벌금 낼 돈은 벌어야 하지 않겠는가? 쳇, 그게 문제였다. 또 걸렸다.

광역풍속 2팀 사복 수사관에게. 재수도 더럽게 없지.

오피 단속 나오면 그 가게 NF(뉴페이스)에게 몰아준다더니 딱 걸렸던 모양이었다. 증거를 압수한 경찰과 함께 서에 가서 조서를 쓰고 조사를 받았다.

당연히 벌금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웬걸. 상습이라고 1년간 보호관찰이란다. 사회봉사 40시간과 함께 무슨 강의까지 들어야 했다. 그리고 불시에 담당 경찰로부터 위치확인 전화가 왔다.

재수 없는 년. 어쩐지 작년 부터 슬슬 그만두고 싶더라니. 일본 부터가 망테크였다.

"훗."

재수가 없던 요 몇 년간을 떠올린 말숙은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자취방을 서울 시내에서 그나마 저렴하다는 노량진과 신림동으로 옮길까 고민하다가, 노량진으로 택했다.

거기서 일반인들이 하는 낮일이라도 할까 싶어서 어슬렁거리다가 들어간 카페에서 할 일 없이 비비적거리고 있는데, 말숙을 향하는 곧은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웬 멀끔하게 생긴 남자였다. 남자의 눈빛에서 말숙은 바로 알아차렸다. 이래 봬도, 화류계에 입문해 남녀 연애로만 10여 년간 먹고 살았던 말숙이다. 그간 스폰도 만나봤고 공사도 쳐봤고 선수에게 농사도 당해봤다. 그래서 결국은 빈털터리지만.

말숙은 남자를 보며 생긋 웃었다. 남자가 한눈에 반한 눈빛 정도는 자다 깬 흐릿한 눈으로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저 남자는 지금 말숙에서 홀딱 반했다. 멍한 남자를 은밀히 바라보던 말숙은 찬찬히 남자를 훑었다.

얼굴 자체는 잘 생긴 편이었지만, 선이 약해서 남자답기보다는 유약하게 생겼는데 풍기는 분위기는 외골수 느낌이 났다. 딱 봐도 노량진 학원가에 공부한답시고 이리저리 떠도는 아싸(아웃사이더)였다.

"저……. 시간 있으세요?"

같은 카페에 드나든 지 일주일 정도 되었을까, 남자가 말을 건네왔다. 말숙은 폼으로 들고 다니던 토익책을 덮고서 방긋 웃어 보였다.

"…왜요?"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다. 자신을 송라현이라고 밝힌 남자는 아싸답게 순진했다. 말숙은 적당히 이름과 나이를 맞춰서 불렀다. 솔직히 앞으로 어찌 되든 상관없었으니까. 깊게 엮일 인연도 아니고.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처음에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순진한 라현은 말숙에게 색달랐다. 닳고 닳은 화류계 놈팡이들과 행동이 달랐다.

마침, 남자도 고팠기에 일반인 맛은 어떠랴 싶어서 처음 안면 튼날 우연을 가장해 같이 잤다. 그런데 요놈이 물건이었다. 속궁합이 잘 맞았다.

나름 잠자리가 만족스러웠던 차라서 그날부터 집세도 아낄 겸 함께 지냈다.

말숙이 카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토익이나 쳐서 취업해야겠는데 워낙 공부에 소질이 없다고, 시험 쳐봤자 신발사이즈를 성적표로 받을 것 같다며 울상을 짓자, 라현이 대뜸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하면서 앞일은 걱정하지 말라며 호언장담했다.

라현은 믿음직했다. 그리고 단순해서 다루기 쉬웠다. 남자 심리에 빠삭한 말숙이 살살 비위를 맞춰주면 뭐든지 해주었다.

라현을 믿고 몇 달 놀다 보니, 이렇게 살아도 꽤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안 풀린 화류계 퇴물들은 일반인과 결혼 못한다.

나이 40 넘어서 까지 이 짓을 하면서 기껏해야 실장이나, 삐끼, 호스트 선수, 그저 그런 사회 쓰레기들과 섞여 만났다 헤어졌다 하면서 살았다.

라현이 첫 월급을 받아 통째로 갖다 주던 날, 말숙은 월급 일부를 떼어 벌금을 갚았다. 말숙이 돈을 어디다 쓰는지 일절 물음이나 터치가 없었다.

묵묵히 월급 통장을 맡겼다. 라현의 급여통장을 받아든 말숙은 이참에 그냥, 정착해 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라현 같은 단순한 타입은 입안에 혀처럼 굴며 성질만 잘 맞춰주면 만사형통이다.

한참 결혼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무렵 갑작스레 집을 방문한 라현의 모친을 만났다. 이목을 따지면서도 아들에게는 꼼짝 못하는 어수룩한 아줌마다.

라현의 말에 쩔쩔매는 모친을 보면서, 저런 시모 자리도 괜찮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모처럼 가족과 함께 밥이나 먹자고 나간 한정식집에서 뜻밖의 얼굴을 마주했다. 지난여름 봤을 때처럼 하얀 얼굴, 붉은 입술, 여리여리하면서 청초한 분위기.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식사 자리에 나타나 동생이라고 소개받은 여자는, 작년 SS클럽 앞에서 스쳐 지나간 그 여자였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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