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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에필로그 22
주말에 충주 집에 다녀온 후. 하계 계절학기 마지막 주인 3주째는 정신없이 바빴다. 중간고사는 분량도 적고 한 과목은 아예 리포트로 대체가 되었는데, 기말고사는 전부 시험이었는데다가, 이제까지 공부한 한 권 전체가 시험 범위여서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수님이 시험 대비 예상문제를 찍어주어도 챕터가 많다 보니 벼락치기는 벅찼다. 과목도 3과목이나 되니 출석 일수가 완벽하다고 해도 B 이상 받기 위해서는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야 했다.
거기다 마지막 리포트까지 과목당 1개씩 총 3개가 금요일까지 제출기한이어서 주중에는 꼬박 도서관에 살 수밖에.
오전부터 오후까지 이어진 계절학기 수업을 마친 라희는 도서관에서 과제와 기말대비 공부를 하다가 바흐가 퇴근하면 같이 평창동 집으로 귀가해 임 여사가 정성스레 차려 놓은 저녁밥을 먹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작은방 소파에 앉아 회사에서 가져온 두꺼운 A4 출력물을 살폈고, 라희는 그 옆에 비스듬히 기대 손에 펼쳐 든 교재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뜩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알몸으로 침대 위에 바흐와 함께였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나면 깊은 잠을 자다 깬 아침이었다.
일주일이 그런 식으로 눈 깜짝할 새 없이 흘렀다. 금요일에 마지막 과제 리포트까지 제출하고 나니, 이제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에 있을 기말시험만 치르고 나면 바로 진정한 여름방학의 시작. 다음 주가 되면 계절학기로 바빴던 그 동안 보다는 물리적, 심리적으로 여유가 생길 것 같아서 내심 들뜨기까지 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중앙 강의동을 나와 길을 걷던 라희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따갑게 쏟아지는 밝은 햇살에 눈매를 가늘게 떴다.
'이제 방학이면 뉴욕으로 가야겠지.'
맑게 갠 여름날이라서 강의실 밖으로 나오자 엄청난 더위가 느껴졌다. 시원한 에어컨이 빵빵한 도서관을 찾아 걷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한주의 수업도 끝난데다가 살인적인 높은 기온과 방학 때문인지 대학 캠퍼스 내부는 한산했고 도서관 앞도 붐비지 않고 한적했다. 언덕배기 도서관 옆 길로 한 무리 학생들이 우르르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 길을 따라가면 중문이 나온다. 중문은 학교 밖 지하철역과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이 내려가서 텅 빈 샛길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라희는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어차피, 금요일.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시험만 치면 캠퍼스는 당분간 안녕이었다. 거기다가 오늘 마지막 과제물을 제출하고 났더니, 손에 들린 지긋지긋한 교재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라희는 도서관 현관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샛길 계단을 내려갔다.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책을 붙들고 자리만 차치하고 앉아 있느니 조금 먼저 집으로 돌아가서 푹 쉬는 편이 나았다. 바흐가 귀가할 때까지 푹신한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고 싶었다.
"오셨어요, 사모님."
현관문을 열어준 임 여사가 깍듯이 인사했다. 사모님이라는 호칭은 맨 처음에는 굉장히 낯설더니, 요 며칠간 들어버릇하다가 귀에 익었다. 라희는 공손히 인사했다.
"네. 다녀왔습니다."
"일찍 오셨네요."
"선희 씨는요?"
라희는 임 여사 옆 빈자리를 눈짓하며 물었다. 항상 귀가하면 같이 나와 인사하곤 했던 임 여사 딸, 선희가 보이지 않았다.
"위층에서 정리 중이라서요."
"아. 네."
"시원한 레몬차를 드릴까요, 아니면 지난번 댁에서 가져오신 오미자차를 내올까요?"
거실을 지나쳐 계단을 향하는 라희를 향해 임 여사가 물었다. 지하철을 타고 마을버스를 타고 이동하느라 목이 탔다. 둘 다 맛은 새콤달콤했지만, 조금 덜 달고 청량한 느낌의 오미자가 나을 성싶었다.
"……오미자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곧 내오겠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마친 라희는 계단을 올랐다. 계단 위를 오르니 새로 교체한 첫 번째 방문이 보였다.
위층 방은 리모델링 공사가 마무리 단계였다. 원래 두 개였던 방의 가운데 벽을 허물어 커다란 한방으로 재구성했다.
오늘이 공사 마지막 날이라더니, 일찍 끝났나 보다. 새것같이 번쩍이는 방문은 공사소음이나 인기척도 없이 굳게 닫혀 있었다.
가만 서서 방문을 보고 있으려니, 뒤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작은 기척이 들렸다.
"오늘 오전에 공사가 끝나서 오후에 가구가 들어왔습니다. 선희가 작은 방에 있던 짐들을 옮기는 중이었습니다. 들어가 보시겠어요?"
3층 계단 앞 테이블에 들고 있던 쟁반을 올려놓은 임 여사가 굳게 닫힌 방문을 열었다. 새로 바뀐 공간을 미리 시안으로 만나보긴 했지만 이렇게 컴퓨터 구상 시안과 똑같이 펼쳐질 줄이야. 라희는 놀란 얼굴로 리모델링된 방을 둘러보았다.
화이트 톤으로 꾸민 드레스룸이 입구부터 복도처럼 쭉 펼쳐져 있고, 안쪽은 욕실, 그리고 그 옆으로 조금 열린 침실 문이 보였다. 침실 쪽에서는 인기척이 들렸다. 임 여사 딸이 바지런히 방을 정리 중인 모양이었다.
"어머, 오셨네요?"
침실에 들어서는 라희를 발견한 선희가 밝게 인사를 건넸다. 선희는 방 한쪽 구석 벽면, 책장 앞에 놓인 책상 위를 정리 중이었다. 라희는 미소 지어 화답해 인사하고는 리모델링된 침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방 한가운데 위쪽을 차지한 침대를 기준으로 왼쪽은 티브이와 소파가, 오른쪽은 책장과 책상이 테라스로 통하는 창가 바로 옆 벽면으로는 하프시코드가 놓여있다. 그전 바흐방과 다를 게 없는 구성이었지만, 넓어진 방안으로 소파와 테이블이 3인용으로 커졌고 책상과 책장이 새로 들어왔다.
앤티크한 하프시코드를 제외하고는 방안의 모든 물건이 화이트나 펄감 섞인 그레이 톤으로 세련되고 밝은 느낌이다.
"오늘 기온이 높아서 굉장히 더운데, 집까지 오시느라 힘드셨을 거 같아요. 작은 방에 있던 서류와 책, 그리고 옷은 다 정리해 두었습니다. 나머지 자질구레한 짐들은 차차 옮겨 놓을게요."
선희가 말을 하며 눈짓하자, 임 여사는 새로 들인 대리석 소파 테이블 위에 오미자 차가 담긴 유리잔을 옮겨놓았다.
"저희는 이만 내려가보겠습니다. 새로운 방에서 푹 쉬세요."
"아, 네. 고맙습니다."
두 사람은 라희에게 눈으로 인사를 하고서 조용히 방을 나갔다. 마침내 혼자 남게 되자, 라희는 푹신한 흰색 소파로 가서 털썩 주저 앉았다.
긴장과 피로가 확 풀리는 기분. 실내 가구 선택시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추천했던 이태리 디자이너의 소파로 보드라운 면피 속 내장재가 거위털과 라텍스라더니 과연 침대처럼 안락하고 편안했다.
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얼음이 동동 띄워진 시원한 오미자 차를 기울이고 있으니 아침부터 차곡차곡 누적된 하루치 피곤이 말끔히 씻기는 기분이었다. 느릿하게 방안을 배회하던 시선이 조금 전 선희가 정리를 마치고 나간 책상 위에 머물렀다.
바흐가 저녁시간이면 들여다보곤 했던 A4 출력물들이 한쪽 구석에 높게 쌓여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 위로 문뜩 눈길을 잡아끄는 낯선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서류 봉투.
서류 봉투? 바흐가 보던 보고서는 서류가방에서 바로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기에 봉투 안에 들어있지 않았다. 도통 못 보던 물품이라서, 슬며시 호기심이 들었다. 눈매를 좁히며 유심히 서류 봉투를 보고 있던 라희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김말숙
봉투 위에 적힌 깔끔한 손글씨. 각이진 모양으로 보아 남자 필체다. 그런데 김말숙. 사람 이름인가?
라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손을 뻗어 봉투를 집어 들었다. 제법 묵직한 봉투 안에는 A4 서류와 그 반만 한 사진이 두껍게 들어 있었다.
먼저 책상 위로 꺼내 펼친 A4 서류에 적힌 내용은 다양했다. 대부분 주민등록 등초본과 호적 등초본, 가족관계부 등 개인 신상 명세에 관한 문서였다. 서류 마다 전부 김말숙이 적혀 있는 걸로 보아서, 김말숙의 신상자료인 듯 보였다.
본인 김말숙. 생년월일 xx년 1월 21일 (만 29세). 경기도 고양시…….
부 김형춘. 모 강말자. 조모 황옥진. 제 김재준.
이름과 생년월일, 나이는 전부 낯설었다. 김말숙이 누굴까. 라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골똘히 손에든 서류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동생이라고 적힌 김재준의 나이는 만 27세였다. 올해로 스물여덟인 라현과 동갑이긴 했으나 재준도 낯설고, 바흐보다 한 살 어린 말숙도 처음 보는 이름이다.
툭툭.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서류를 손끝을 세워 두드리던 라희는 서류 봉투를 세워 들어 안에 있던 사진 뭉치를 꺼내 들었다.
"어?"
절로 튀어나온 외마디. 순간적으로 눈에 확 들어온 사진 속 선명히 찍힌 인물은 라희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김미현.
'김미현이 왜?'
라희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사진을 휙휙 넘겨 확인했다. 첫 장부터 찍혀 있는 김미현은 같은 장소에서 연속으로 관찰하며 찍은 듯, 계속 보였다. 그러다 사진 더미의 중간쯤 이르니, 어두운 배경의 낯익은 장소가 보였다.
'시골집.'
확실히 충주 집이었다. 시골집 대문 앞에서 찍힌 김미현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옷차림새로 보아, 라희의 뇌리에 마지막으로 기억된 그 모습. 어두운 배경의 사진 아래쪽으로 서류 봉투 겉면에 적혀 있던 똑같은 필체로 쓰인 글자가 보였다.
-실명 아닐 가능성이 있음. 확인 필수.
'설마?'
라희는 재빨리 지난주 토요일을 상기했다. 충주 시골집 앞에서 대기 중이던 차에 올라타자, 바흐가 조수석에 앉은 김 기사 동생과 주고받았던 기묘한 대화가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실명, 아닐 수도 있으니.
-아, 예. 알겠습니다.
분명, 바흐가 그리 말했었다. 두 귀로 똑똑히 들었으니까. 그렇다면.
라희는 하얀 서류봉투 겉면에 쓰인 글씨와 사진 아래에 적힌 글씨를 나란히 놓고 번갈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 글자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김미현이 김말숙. 둘은 동일 인물.'
세상에. 머릿속이 새하앴다. 너무 놀라 벌어진 입에서 새어나오려는 날카로운 비명을 손바닥으로 가까스로 막아 눌렀다. 크게 떠진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가 A4 문서 위에 멈췄다.
김말숙(만 29세).
엄마에게 직접 전해듣기로는 김미현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재가하고 할머니 손에 컸는데 할머니도 성인이 되자마자 돌아가셨다고 했었다. 하지만 서류에는 그 어디에도 사망이라는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라현과 나이가 같은 남동생까지 있었다. 김미현, 아니 김말숙이 말한 모든 것이 거짓.
'맙소사.'
놀란 눈이 책상 위에 그대로 못 박은 듯 고정되었다. 맨 아래쪽 서류의 끝에 적힌 손글씨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통보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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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