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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에필로그 21
라현의 격렬한 반응을 보던 라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엄마는 어찌할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오빠의 욱하는 성질이 손님 앞에서 터질까 싶어서 저러는 거다. 바흐는, 그답게도 태연히 라현을 응시했다.
"라현아 그게 아니라, 한 서방은……."
엄마가 조심스레 입을 떼자 라현은 더 인상을 구기며 바흐를 쏘아봤다. 술에 취해 잠을 자다 깨서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평소 짜증내던 성질머리는 온전하게 보였다.
"뭐가 아니야. 결혼하겠다는 소리 같고만. 엄마가 라희한테 말 안 했어? 어젯밤 가을쯤에 하자고 했잖아. 이제 예쁜 손주 보고 싶대며."
엄마를 보며 팍 소리를 내지른 라현은 라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 이딴 식으로 대학 졸업도 안 하고 결혼하고 싶냐? 최소한 졸업은 해야지. 막말로, 지금 홀딱 반해서 결혼했다가 나중에 이혼하면, 대학 다시 다니게? 최악의 경우 애까지 주렁주렁 걸려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상황에서 잘도 대학 다니겠다. 자식 맡긴다고 조손가정 만들어 엄마 고생이나 시키겠지. 그냥 잔말 말고 졸업하고 내년 이후에 결혼하던가 해. 입에 올리지도 말고."
사정없이 인상을 구기며 내뱉는 말에 라희는 눈을 부릅떴다.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해? 사람 기분 나쁘게. 이제 나도 성인이야. 존중은 않더라도 상식선에서 예의 좀 지켜. 우리끼리 있는 자리도 아니고, 손님도 와 계시는데."
라희가 불쾌해하며 말하자 라현이 기분 나쁘게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에 힘을 착 주고 위협적으로 한 손을 위로 휙 올리는 시늉을 하며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예의? 요게!"
라희는 눈을 치뜨고 라현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내가 결혼을 하든, 말든 오빠가 무슨 상관인데? 내가 먼저 결혼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라현은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리다가 입을 열었다.
"와 이게 이제 기어오르네. 지금 믿는 구석이 있다 이거지? 야, 니가 좋아하는 상식적으로 말해볼까? 내가 너보다 손위고 결혼이야기도 먼저 꺼냈어. 올가을에 결혼하기로 했으니까 내가 결혼하고 나면 한동안 부모님 경제적으로 힘 드실 거 그게 그 머리로는 계산이 안 되냐? 경영학과는 뻘로 다녔어? 얼마나 대단한 미시, 거시 경제를 배웠길래 가계 경제는 까막눈이야?"
라희가 뭐라 말하려 할 때, 낮은 목소리가 말을 가로막고 라희 앞을 막으며 끼어들었다.
"반대하는 이유는 그게 전부입니까?"
바흐가 정색하고 낮게 말하자, 라현이 시선을 옮겨 바흐를 노려보았다. 라희를 향했던 불쾌감을 이제는 새로운 대상이 된 바흐를 향해 쏘아냈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곧게 마주 본 바흐는 말을 이었다.
"손위라서 먼저 결혼해야 한다는 것과 경제적인 이유. 이 두 가지 말입니다."
거실에 서 있는 두 남자 사이에 날 선 긴장감이 흘렀다. 싸한 분위기. 팽팽한 대치. 한동안 서로 잡아먹을 듯 똑바로 말없이 노려보다가, 라현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일단은, 뭐. 내 쪽이 먼저 결혼이야기 꺼냈고, 허락도 이미 받았으니까, 요."
마지못해 말투를 순화한다는 식으로 라현이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옆에서 눈빛을 빛내던 미현이 이때다 싶었는지 재빨리 덧붙였다.
"집안 분란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면, 차례를 기다리셔야죠. 엄연히 우리가 먼저니까요. 어머님께서도 남들 다 그렇듯, 순리대로 아가씨를 시집보내고 싶으실 테죠."
서로들 팽팽히 노려보는 가운데 거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엄마가 중재에 나섰다.
"…미현아 라현이 데리고 다시 작은방으로 들어가렴. 자다 깨서 애가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아들, 정신 좀 차리고 나와."
"왜에. 나 멀쩡한데."
라현이 허리에 손을 짚고서 배를 앞으로 내밀고 뻐팅기듯 말하자, 엄마는 미현에게 재빨리 눈짓했다.
"술이 덜 깬 모양이다. 얘가 제 아버지를 닮아 술이 약하잖니. 화장실 얼른 데리고 가서 세수라도 시키렴.“
"…네, 어머님. 오빠?"
미현은 약간 주저하다가 주위 눈치를 살핀 후 라현의 팔을 붙잡아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문으로 들어가는 라현과 미현의 뒷모습을 보던 엄마는 바흐를 향해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애들이랑 먼저 이야기 해놓은 게 있어서 그러는 모양이에요. 라현이가 아예 짝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당장 결혼할 미현이도 있고 두 사람 다 확고한 생각이 있어서 구두로 올가을 결혼시키기로 바깥양반과 상의했거든요. 구체적인 날짜는 차차 잡기로 했고요. 그러니, 한 서방."
생각에 잠긴 표정의 바흐를 향해 엄마가 말을 이었다.
"라희는 제 오빠 식 치르고 나서부터 생각해보기로 해요. 우리 애가 기분 나빠서 말실수는 했지만, 라현이 말마따나, 아직 졸업 전이기도 하고요."
엄마의 간곡한 말에, 바흐는 눈을 낮추며 예의 바르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엄마는 어색하게 입매를 올렸다.
"다행이에요. 라현이도 제 차례라고 생각했다가,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들어서 당황해서 그런 거지 다른 뜻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너그럽게 이해 바라요."
무표정한 바흐를 옆에서 조심스레 바라보는 라희를 향해 엄마가 말을 건넸다.
"어휴, 이제 시간이 곧 저녁이구나. 네 아버지 곧 돌아오시면, 같이 저녁 먹자. 나는 들어가서 저녁 준비해야겠다. 냉장고에 있는 조기 굽고 잡채 좀 할 건데 어떠니?"
바흐가 가리는 음식이냐고 넌지시 묻는 눈짓이었다. 라희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응."
"그래. 그럼, 아버지 오실 때까지 소파에 앉아서 뉴스 보고 있으렴."
엄마는 부엌으로 향했다. 조금 기다리고 있자, 엄마 말대로 아버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화장실에서 나온 오빠와 미현이 아버지에게 돌아오셨느냐는 인사를 하고 작은 방으로 재빨리 모습을 감췄고, 아버지는 바흐와 소파에 앉아서 뉴스를 보면서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곧 저녁 식사가 거실 넓은 상 위에 한가득 차려졌다. 점심때 먹은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나물과 김치 반찬에 신선한 겉절이와 잡채, 조기구이, 그리고 달짝지근한 소불고기가 추가되었다. 국은 맑은 소고기 뭇국이었다.
"먹자."
자리에 앉은 아버지가 숟가락으로 잡곡밥을 뜨며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아까 불쾌한 말이 오고 갔기 때문에 모두가 둘러앉은 식사자리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조용한 거실에는 식기가 부딪치는 작은 소음만 떠다녔다.
"어머, 제가 좋아하는 잡채네요. 이것 봐, 이것 봐, 불고기가 진짜 간이 잘되었어요. 어머님께서 배를 갈아 넣으셨나 봐요. 단맛이 정말 깊어요. 아버님,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미현이 살살거리며 아버지의 비위를 맞췄다. 밖에서 돌아와 별생각 없이 밥을 뜨던 아버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로를 응시하는 바흐와 라현을 힐끗거리며 조금 어색함을 느꼈는지 가만 분위기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나 없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그러자 미현이 생글생글 웃음 지으며 말했다.
"호호. 아까 술기운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꺼낸 말 때문에 서로들 오해해서 그래요. 이제 오해 다 풀렸어요."
"무슨 오해? 너 혹시 한 서방에게 말실수라도 했느냐."
아버지가 라현을 노려보며 엄하게 묻자, 라현은 말없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게 아니라요, 저희가 이번 가을에 결혼하기로 했었잖아요."
미현이 옆에서 조기 구이를 바른 살을 아버지 앞에 접시에 가져다 놓으며 사근사근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랬지."
기억을 떠올리듯 눈을 좁힌 아버지가 짧게 동의했다. 그러자 미현은 눈가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게, 아가씨와 진욱 씨는 듣지 못했나 보더라고요. 오빠가 집안의 장남이니 먼저 결혼하는 게 순서잖아요. 아가씨는 아직 졸업도 안 했고요."
"그렇지."
미현의 부드러운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이야기는 아니고, 내나 그 이야기였어요."
마침내 원하는 답을 들려주어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미현이 눈을 돌려 라희를 보며 만면에 가득 웃음을 띄웠다. 밥상머리의 경직된 분위기가 여전히 이상하다 생각되었는지 아버지는 잠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다가 엄마의 눈짓을 받고 식사를 마저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날 때까지 두 남자는 굳게 입을 다물고 한마디의 말도 섞지 않았다.
저녁을 다 먹고 상을 물리고 나자, 엄마가 주방에서 후식으로 시원한 오미자차를 내왔다. 투명한 유리컵에 담긴 불그스름한 오미자에 사각 얼음이 동동 띄워져 있었다.
"작년에 텃밭에서 기른 거란다. 농약 한번 안 치고 수확해서 항아리에 담가놓았거든, 얼마 전 개봉해서 고운 체에 걸러서 청으로 만들었지. 이제 딱 먹기 좋겠더구나."
엄마는 자랑스러운 듯 말하며 붉은 유리잔을 각자의 앞에 놓았다. 라희가 조용히 기울여 맛보는 가운데 미현이 먼저 호들갑스럽게 맛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머, 어머님, 이거 맛이 아주 진하고 깊어요. 1년 숙성했으면 그야말로 보약이네요. 그치? 오빠."
"어? 어."
동의를 구하듯 눈웃음치며 라현에게 묻자 라현이 내키지 않은 듯 가만있다가 재차 눈짓을 받고서 입을 열어 답했다.
"어때요? 입맛에 맞아요?"
엄마가 조심스레 바흐를 보며 의견을 물었다.
"예. 아주 맛있습니다."
바흐는 마시던 잔을 들고서 정중히 답했다. 그러자 엄마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라희야, 이거 올라갈 때 한 통 가져가련? 한 서방도 입에 맞는 거 같으니, 요즘 같이 더울 때 한잔 씩 타서 마시면 갈증도 가시고 몸에도 좋단다."
"응."
라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미현이 옆에서 재빨리 외쳤다.
"오빠도 엄청 좋아하네요. 저흰 두 통 주세요. 여름 내내 오빠랑 저랑 양껏 마시고 건강해지게요."
"그, 그러렴. 많이 있으니까. 참, 버스 타고 올라갈 거니? 막차가 11시인데. 11시면 너무 늦지?"
엄마가 벽시계를 올려다보며 걱정스럽게 말하자, 미현이 거들었다.
"그러게요. 막차 아니면 9시에 버스가 있는데 오늘 가시려면 서둘러야겠는 걸요?“
"터미널까지 차로 바래다줄 테니 슬슬 짐 챙겨서 나가면 얼추 시간이 되겠구나."
"저흰 내일 늦게 돌아갈 거라 상관없는데. 아가씨는 이제 가셔야겠네요."
어색한 분위기에서 같이 있기 껄끄러우니, 어서 가라는 소리였다. 어차피 오늘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마치 이 집 딸이 저인 양 구는 미현이 저리 설레발을 치니 주객이 전도된 거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김 기사가 오고 있는 거 같아서 라희가 슬쩍 바흐를 보자, 바흐가 입을 열었다.
"차가 오기로 했습니다."
"차요?"
미현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바흐를 흘깃거렸다. 바흐가 조용히 손에 든 유리잔을 기울이자 엄마는 무슨 뜻이냐며 라희를 향해 눈짓했다.
미현도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은 라희가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난감하게 앉아 있는데 지잉. 낮게 울리는 휴대폰 진동소리가 들렸다.
바흐는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양해를 구하며 자리를 옮겼다.
"…음. 그래."
거실 구석에서 들려오는 말로 미루어보아 충주에 도착했다는 김 기사의 전화 같았다. 간단히 통화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바흐는 앉아 있는 라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왔다는군. 가지."
"누가요?"
통화하는 내내 궁금한 눈빛을 빛내던 미현이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라희는 바흐의 손을 잡고 일어서며 미현에게 짧게 답했다.
"오빠 차요."
의아한 표정으로 라희를 보는 가운데, 바흐가 정중히 부모님께 인사했다.
"장인어른, 장모님. 이제 돌아가 보겠습니다."
***
밖은 약간 어둑어둑했다. 대문을 열고 나오니 집 앞에 바흐의 차가 헤드라이트를 훤히 밝히고 세워져 있었다. 낯선 모양의 조금 긴 검은색 세단이 보이자, 가족들은 깜짝 놀란 눈치였다. 이내 운전석에서 정장을 입은 김 기사와 처음 보는 남자가 나와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모시러 왔습니다. 사장님."
호칭을 들은 라현과 미현의 표정은 얼은 듯 굳어졌다. 엄마가 눈을 크게 뜨고 바흐를 바라보았다. 뜻밖의 호칭에 아버지도 조금 놀란 듯 보였다.
"사장님이라니? 한 서방, 자네 말인가?"
"예."
"그럼……."
아버지가 말꼬리를 흐리며 묻자, 바흐가 확답해주었다.
"예. H 매니지먼트입니다."
"어머,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라희는 김 기사가 열어주는 뒷좌석에 올라탔다. 또 오라며 밝게 배웅하는 엄마와 아버지에게 바흐는 나중에 다시 찾아 뵙겠다며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마저 차에 올라탔다. 이내 미끈한 검정 차는 부모님이 손 흔들어 배웅하는 시골집 앞을 벗어났다.
조용한 뒷좌석에서 마침내 단둘이 남게 되자, 바흐는 라희의 손을 감싸 잡고 부드럽게 매만졌다.
라희는 조수석에 앉은 낯선 남자를 조심스레 살폈다. 처음 보는 얼굴. 김 기사의 동생이라고 했던가.
조수석 옆에 놓아둔 기다란 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보니 김 기사와 외곽에 있었다는 말이 생각났다. 전문가용 사진기. DSLR이라고 부르던가? 과 친구 중에 카메라에 관심 있었던 동기가 있었기에 저런 카메라를 지칭하는 용어가 기억났다.
아빠 백통? 엄마 백통? 대충 그런 단어였다. 오늘이 휴일이고 날도 맑아서 어디선가 야외에서 출사라도 하다가 온 모양이었다.
"김준호입니다. 사모님."
시선을 느꼈는지 조수석에 탄 남자가 뒤돌아보며 자신을 정중히 소개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처음 들어보는 사모님 호칭. 라희가 얼떨떨하게 인사를 건네자 남자는 씨익 웃어 화답했다. 바흐와 눈빛을 주고받은 김준호가 고개를 돌려 앞을 보려 하자, 바흐가 나직이 말했다.
"실명, 아닐 수도 있으니."
"아, 예. 알겠습니다."
라희는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둘은 도통 알 수 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실명? 무슨 실명? 잘 모르는 카메라 용어일까 아니면, 이름을 뜻하는 실명일까? 라희가 궁금해하는 표정을 짓자 바흐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단정한 입술을 옅게 올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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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