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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에필로그 20
둘이서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조금 전의 여파로 몸이 나른했다. 아래에 남아 있는 열기가 가시지 않아서 야릇하고 이상한 기분. 내딛는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웠다. 그런 라희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손길에 의해 껑충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나와 사과밭을 벗어났다.
시골집까지 쭉 이어지는 지방도를 걷던 바흐는 대문이 멀리 보이자 발걸음을 멈추고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손에 들었다. 라희가 가만 기다리는 가운데,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김 기사.”
조금 전 편히 가겠다더니, 역시나 김 기사에게 전화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그 편이 나았다. 지금 당장 시골집으로 들어가 대충 씻더라도, 전신 샤워를 하고 싶었으니까. 한여름의 숲에서 나온 몸이 온통 찐득거렸다. 특히. 아래가.
"음."
전화하며 라희를 건너다보던 바흐가 충주 집 주소를 물었다. 작게 답하자 김 기사에게 주소를 전해 주었다. 휴대폰으로 새어나오는 김 기사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충주로 곧 출발하겠다는 내용 같았다.
“음. 그래. 그럼, 이쪽에서 보지. 아, 그리고.”
전화를 끊기에 앞서, 바흐가 라희를 힐끗 내려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준호도 함께 오지. 그래. 다시 문자로 보내주지. 알겠네.”
통화를 끝내고서, 바흐는 가만 서서 기다리던 라희의 손을 붙잡았다. 자연스레 듣게 된 전화 내용 중, 준호라는 이름이 낯설었다. 혹시 회사직원일까? 함께 오라는 소리는 충주까지 데리고 오라는 걸까? 지금은 늦은 오후이니, 이제 곧 해가 저물 거다.
김 기사가 도착할 때쯤이면 어두워지겠지. 한데 토요일 저녁에 직원을 왜 호출한 걸까.
“저기. 준호라는 분.”
라희가 궁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묻자, 바흐는 시선을 맞추고서 입매를 옅게 올렸다.
“왜.”
라희는 괜한 말을 꺼내나 싶어서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전화를 엿들으려던 것은 아닌데요. 준호라는 분도 지금 충주까지 온다는 건가요? 다른 날도 아니고 토요일인데요.”
의아한 듯 말하는 라희를 가만 보던 바흐는 다시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준호는 김 기사 동생이야. 지금 같이 외곽에 나와 있다 갈래 함께 와도 괜찮다는 말을 한 거지.”
“아. 동생분이시구나. 전 또 다른 분인 줄 알고요.”
라희가 수긍하자, 바흐는 시골집 대문을 향해 눈짓했다
“걱정하고 계실지도 모르겠군.”
뒷산에서만 얼추 반시간 가량 있었으니 그럴지도 몰랐다. 잠깐 전 일을 떠올린 라희는 얼굴을 붉혔다. 축축한 아래가 화끈거린다.
“아마 아빠는 자리에 안 계실 거고. 오빠는 자고 있을 거 같아요. 아까 보니 정신이 없던데 아마 저녁 시간 되어야 깰 거에요. 그리고.”
라희는 곧 입을 다물었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다른 한 사람의 언급은 피했다.
김미현. 아까 바흐 맞은편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은근한 웃음을 흘리던 모습이 뇌리에 불쾌하게 남았다. 갑자기 한껏 달았던 몸이 싸하게 식는 느낌이다.
라희는 하려던 말 대신 짧은 숨을 내 쉬고 대문을 열었다. 라희의 뒤를 따라 바흐가 발걸음을 옮겼다.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자 바로 거실이 보였다.
둘이서 자리를 비운 동안 말끔하게 치워진 거실에서 김미현과 엄마가 앉아 대화하고 있었다. 술상과 밥이 널려있던 소파 테이블 위에는 하얀 커피잔이 놓였다. 취기를 다스리려고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나 보다. 미현은 현관에 서 있던 두 사람을 발견하고서 반갑게 소리쳤다.
“어머, 아가씨 산책 갔다가 돌아오셨네요. 진욱 씨도요.”
가시지 않은 술기운 때문인지 조금 풀린 목소리였지만, 커피 때문인지 정신은 멀쩡해 보였다. 주량이 세다던 말이 사실인듯했다. 어쩌면, 일부러 취했던 척 한걸지도. 설사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런 의심까지 들 정도로 미현의 존재 자체가 불쾌했다.
“한 서방. 와서 편히 앉아요. 라희도.”
엄마가 소파를 가리켰다. 라희와 바흐가 다가가 나란히 소파에 앉자, 미현이 관심 있는 척 물어왔다.
“밖에 엄청 덥지 않아요? 에어컨에 익숙해서인지 저는 나다닐 엄두가 안 나던 걸요.”
“그렇게 심하게 덥지는 않아요.”
미현의 눈초리가 라희를 유심히 살폈다.
“흐응. 아가씨는 화장을 옅게 해서 편하겠네요. 저는 이런 여름에 땀이라도 흘릴라치면 온통 얼룩자국이 남아서 번거롭거든요. 수정화장이 필수예요. 저기 귀 쪽에.”
미현이 라희의 귓가를 눈짓하며 손으로 자신의 귀를 매만졌다. 라희가 뭔가 싶어서 눈을 깜빡이고 있자, 옆에 있던 바흐가 귓가를 매만져 뭔가를 가볍게 털어냈다.
“꽃가루.”
바흐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까 숲에서 빠져나오다가 묻은 모양이었다.
바흐가 손에 묻은 꽃가루를 가만 보고 있자, 라희는 왠지 모르게 민망했다. 조금 전 까지 저 곧은 손가락에 매달렸던 일들이 떠올라서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라희의 얼굴을 슬쩍 바라본 바흐가 살풋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라희는 바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 걸 지켜보던 미현이 눈매를 좁히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세요. 그런데 아가씨 기숙사 사신다고 들었거든요? 밖에서 데이트하다가 막상 헤어지면 아쉽겠는데요?”
은근한 말투였다. 신체 접촉이 자연스러운데, 어찌 떨어져지내는냐고 묻는 듯한. 옆에 앉아있던 엄마도 그런 기색을 느꼈는지 라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
라희는 눈을 낮추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냥,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심 했다. 어차피 늦던 빠르던 밝혀질 일이었으니까.
“아니에요. 기숙사 나왔어요. 지금은 진욱 씨와 함께 지내고 있어요.”
“어머.”
미현은 과장되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한손을 들어 일부러 벌린 입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미현이 의도적인 곁눈질로 엄마를 쳐다보자, 엄마는 조금 난처한 표정이었다.
약혼했다고 통보 받은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기숙사를 나와 남자와 동거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난감한 듯 보였다. 외지에서 공부하는 대학생 딸의 행실이 새언니 될 사람 앞에서 드러나자 마음에 걸리는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셨네요. 하긴, 약혼도 했으니까요. 그래도 의외에요. 아가씨는 참, 얌전하고 조신해 보였든요. 저와 달리요.”
라현과 동거중인 자신과 비슷하다는 투로 말하는 미현에게 막상 할 말은 없었다. 미현은 미간을 약간 좁히고 앉아있는 라희의 표정이 마음에 드는지 입매를 싱긋 올리며 말을 이었다.
“어머님께서 아가씨 자랑을 많이 하셨어요.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해왔다구요. 행동거지도 얌전해서 집과 학교 밖에 모르고 학원이나 과외를 끼고 하지 않았는데도 인서울 대학에 무난히 합격했다고 들어서, 속으로 아가씨는 참 똑똑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정말 어머님 말씀이 옳으신 거 같아요. 이렇게 때 되니 멋진 사윗감도 데려오셨잖아요? 그렇죠? 어머님.”
“어?, 어. 응. 그렇구나.”
엄마가 떨떠름하게 답하자, 미현이 웃으며 말했다.
“저도 뭐 때 되어 라현 오빠 같은 멋진 남자를 만났으니 잘 한거죠. 오빠 같이 좋은 남자, 흔하지 않거든요. 이만하면 저도 꽤 잘 살아온 거 같네요.”
표면적으로는 라현의 칭찬 일색이었지만 어쩐지 미현과 도매금으로 같이 취급되는 기분이었다. 라희는 뭔지 모를 은근한 불쾌감에 휩싸였다. 미현은 라희를 도도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지금은 어디 사세요? 진욱씨 집이 학교 근처에요?”
“평창동이요.”
평창동이라는 말을 들은 미현의 미간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평창동 사시는 구나. 저희랑 가깝네요. 저희는 통인동인데. 통인시장 근처요.”
“거기가 살기는 좋지 않니?”
집을 계약했던 엄마가 넌지시 묻자, 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빠 직장도 근처라 출퇴근도 편리하구요. 동네도 아기자기하고 경복궁도 가까워서 데이트 하기도 좋아요. 조금만 나가면 지하철도 있어서 교통도 편하고요. 그런데, 아가씨도 주택 사세요? 아니면 아파트?”
미현이 탐색하듯 물었다. 바흐의 평창동 집을 굳이 분류하자면 주택이었다.
“…주택요.”
“그쪽은 살기 어때요? 평창동은 지하철도 멀고 산 중턱이라 차 없이 다니기에는 불편할 텐데.”
“…….”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미현은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리더니 높게 말했다.
“아, 아주 위쪽은 아닌가 봐요?”
은근한 의도가 담긴 말투였다.
“차 없으면 불편하겠죠.”
화장실을 나와 소파로 걸어오던 바흐가 나직하게 말했다. 집이 좁으니 화장실에 있는 동안 거실의 이야기가 들렸던 모양이었다. 대답을 들은 미현의 눈에 의아한 기색이 돌았다. 미현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바흐를 힐끗거렸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소파에 앉아 라희의 손을 감싸 쥔 바흐가 엄마를 향해 말했다.
“들으셨겠지만,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장인어른, 장모님 찾아뵌 이유는, 먼저 두 분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속히 날짜를 잡기 위해서입니다.”
불쑥 바흐가 꺼낸 말에 엄마는 깜짝 놀란 듯 보였다. 눈을 크게 뜨고 라희를 향해 눈짓했다. 산책 나가기 전, 말을 끝냈지 않느냐는 의미였다. 머뭇거리는 엄마 옆에서 미현이 조금 당황한 얼굴을 추스르고 입매를 겨우 끌어올리며 말했다.
“어, 어머님. 저 오빠 좀 보고 올게요. 지금쯤 잠에서 깼을 거 같아서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방을 향해 종종걸음치는 미현이었다. 오빠를 데리러 가는 모양이었다. 저리 걷는 모양새를 보니 취기라고는 없어 보였다.
“날짜라니….”
엄마가 라희를 보며 말꼬리를 흐리자 바흐가 바로 답했다.
“결혼식, 말씀입니다.”
그때였다. 작은방 문이 벌컥 열리더니 큰 목소리가 들렸다.
“뭐?!”
잠에서 덜 깬 듯한 라현이 까치 머리를 하고 휘청거리며 걸어 나왔다. 옆에서 미현이 라현의 등을 손바닥으로 받쳐 부축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라희. 니가 말해봐. 언제는 한마디 말도 없이 홀랑 약혼했다더니, 이제 결혼?”
라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야.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거 모르냐? 어디서 역혼이야. 뻔히 우리가 이번 가을에 결혼하기로 했는데."
미간을 구긴 라현의 옆에서 미현이 눈빛을 빛내며 득의양양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게요.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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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