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13. 에필로그 18
7월의 사과밭은 초록이 우거졌다. 푸르른 사과 잎사귀 더미더미 사이로 어른 주먹보다 작은 초록빛 사과가 여기저기 영글었다.
가지치기에 신경 쓰고, 일조량을 충분히 받은 사과나무는 제법 커다란 햇사과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어서 쇠막대로 받쳐놓은 얇은 가지가 무게를 못 이겨 곧이라도 부러질 듯, 아래로 휘어 기울었다.
이제 제법 사과밭 분위기가 나는 과수원 길을 바흐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 한낮 동안 달구어질 대로 달구어져 더운 7월의 대기는 그나마 초록을 만나 조금 가신 듯 느껴졌다. 코끝으로 싱그럽고 향기로운 상큼한 풀 내가 스쳤다.
에어콘 가동되는 서늘한 실내에 있다가, 바깥에 나오니 비록 기온은 높았지만, 폐쇄된 공간 안에서 꽉 막혔던 숨통이 개방감과 함께 확 트이는 느낌이었다.
라희가 신선한 공기로 머리를 식히며 묵묵히 앞을 향해 걷는 동안 그는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길가에서 멀리 떨어져 야트막한 뒷산과 이어지는 사과밭 가장자리에 이르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입을 열었다.
“아까, 장모님께서 따로 부르셔서….”
궁금한 눈빛으로 묻는 바흐를 향해 라희는 발걸음을 멈추고 살며시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늦은 오후, 짙은 금빛 햇살 아래, 푸릇한 나뭇잎들의 가장자리가 금테처럼 빛났다.
그 가운데 서 있는 바흐 역시 평평한 이마 너머 짙은 검은색 머리칼 올올이 황금 테를 두른 듯, 빛이 잘게 부서져 눈부셨다. 검은 눈동자 정중앙에 서 있는 라희의 얼굴이 비쳤다.
조금 전까지 마신 술기운의 영향인 듯, 동공이 약간 풀린 듯 몽롱한 눈동자 안에 새기듯 박힌 스스로의 얼굴을 바라다보던 라희는 입매를 부드럽게 올렸다.
"엄마가 우리 결혼은 나중에 하라던데요.”
“…이유가?”
매끈한 미간이 슬쩍 좁혀졌다. 라희는 손을 위로 들어 짙은 눈썹 사이로 미미하게 좁혀진 미간을 펴듯이 손끝으로 꾹 눌렀다.
“자식 둘 다 짝이 있으니, 나이순으로라도 오빠가 먼저 가야 하니까요. 한 해 동안 두 번의 혼사는 힘들다던 걸요.”
“흐음.”
눈을 아래로 내리뜨고 진중한 생각에 잠긴 듯 보이지만, 이 얼굴은 명백히 동의하지 않는 표정이다. 가까이서 지내다 보니, 익숙해서일까. 이젠 바흐의 무표정에도 다양한 기색이 덧입혀져 있다는 것을 알겠다. 바흐는 바닥에 떨어진 덜 익은 사과 열매를 보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왜요? 실망했어요?”
라희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그가 아래로 향했던 눈을 들었다.
“글쎄.”
그는 옅은 미소로 답했다. 실상, 엄마의 말은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다. 혼인신고야 완료했다지만, 엄마가 염려 섞인 주의를 주던, 안 주던 올해 안에 결혼식을 올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지난번, 다시 만나 바흐에게 청혼했을 때, 그러니까 지금 왼손 약지에 반지를 처음 끼던 날, 밤새 서로에게 빠져들어 탐닉했던 날, 조르듯 바흐 위에 올라타 혀끝을 세워 귓불을 핥던 라희는 기어이 약속을 받아냈다. 서로 결합된 부위가 찐득하게 맞물리고 열락으로 온통 정신없는 상태였지만, 그를 육체적으로 자극해 몰아가서 낮은 신음소리를 흘리는 것을 듣는 일은 꽤나 즐거웠기에 잊지 않고 겨우 답을 받아낼 수 있었다.
“계속 원한다면, 대답을 해봐요.”
귓불을 앞니로 지그시 깨물며 속삭이자 쾌감으로 미간을 잔뜩 찡그리던 그가 탁한 목소리로 답했다.
“해.”
낮게 억눌린 목소리. 고르려고 애쓰는 호흡.
“…뭘요.”
라희는 멈춘 허리를 세워 그의 귓속으로 달뜬 숨결을 흘리며 유혹적으로 물었다.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속삭여지자, 라희는 앞니로 깨물고 있던 귓불을 약하게 짓씹으며 입술 새로 쪽 빨아 당겼다.
"이제, 다른 말하기 없기예요.”
흠뻑 젖은 아래는 뜨거웠고, 빳빳한 그의 기둥을 속살에 가득 끼우고 위아래로 오르내리자 저릿하게 눌리는 끈적한 살갗의 감각으로 머리끝까지 아찔해졌다. 달구어진 몸이 움직일 때마다 연신 찔걱거리는 소리가 어둠을 갈랐고, 살과 살이 치닫는 가운데 가느다란 울음소리 같은 달뜬 교성이 새어 나왔다.
“으읏….”
그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가늘게 떴다. 어스름한 방안 간접조명에 윤곽이 비치는 그의 얼굴 윤곽과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야했다.
욕정으로 얼룩져 가늘게 흐려진 눈빛과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아래 속살이 움찔 수축했고, 미끈한 페니스를 둘러싼 질 안이 아득하리만치 조여들어 쾌감이 치솟았다.
그가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리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더 허리를 세차게 흔들어대고 싶어져서 정신없이 무릎을 세워 속살 안에 가득 들이 긴 살덩이를 끼우고 오르락내리락하며 그를 괴롭혔었다.
뒤로 뻗어 젖힌 목에서 돋아나온 목울대의 억눌린 울림. 방안 낮게 깔린 어스름 사이로 잘게 흩어지던 나지막한 신음. 뒤 찔걱거리며 터지던 쾌감.
그날 새벽을 떠올린 라희의 얼굴이 조금 붉어지며 시선을 아래로 피해 난감한 표정을 짓자, 바로 앞에 서 있던 바흐가 의아한 눈빛을 던졌다. 그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눈매를 좁혔다.
“야한 생각.”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짧게 중얼거렸다. 라희가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자 입매를 슬쩍 올린 그가 말을 이었다.
“조언들은 대로, 앞으로는 조금씩 흘리고 다닐까.”
“…그건 무슨 소리예요?”
느닷없이 뚱딴지같은 말을 내뱉는 바흐를 향해, 라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순간적으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야한 기억을 떠올렸던 것은 맞지만, 흘리고 다니다니? 김미현이 한 말을 조언이라고 언급한 건가.
“부인의 색기 발동 조건은 두 가지가 있지.”
바흐가 시선을 맞춰오며 입을 열었다. 깊은 눈매 안 라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서 있었다. 색기(色氣) 발동? 색기라면, 야한 생각이나, 야한 짓을 말하는 건가.
“하나는.”
뻗어진 곧은 손가락이 라희의 입술 위에 닿았다. 손끝이 입술 윤곽을 매만지며 따라 그렸다.
“취기.”
입술선을 부드럽게 매만지던 손끝에서는 아까 그가 마시던 술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지금은, 아니지.”
낮아진 새카만 눈동자가 곱게 휘었다.
“아쉽게도.”
한숨처럼 덧붙인 말이 설탕처럼 달았다. 귓가에 감겨드는 음성을 듣고 있으려니, 조금 전 술자리에서 컵에 담긴 위스키를 조금 기울여 마셔 볼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슬그머니 들 만큼. 조금 벌어진 입술을 더듬어 내리던 손끝은 천천히 옆으로 향했다.
커다란 손바닥이 흰 뺨을 감쌌다. 손바닥을 타고 따뜻한 체온이 피부 속으로 전해진다.
“다른 하나는.”
그가 고개를 기울여 숙였다. 가까이 다가온 몸에서 피어나는 은은한 체향이 라희를 향해 훅 끼쳤다. 이내, 달콤한 숨결이 내려앉아 귓가를 어지럽혔다.
“질투.”
숨소리에 섞인 나직한 음성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바짝 다가오는 감미로운 숨결에 낮아진 눈이 절로 감겨들었다. 그의 숨결에 미세히 흔들리는 잔머리 털이 귓가를 작게 간질인다. 머릿속이 생각들이 흐트러진다. 아래로 내려 간신히 뜨고만 있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라희는 옅어지는 생각들을 다잡았다.
“…질투요? 제가요?”
정말 뜻밖의 단어인지라, 라희가 희미한 반발심을 가지고 작게 되물었다.
“나름 관심 있게 관찰해서 내린 결론이라, 모르지는 않았지 싶은데.”
피식, 낮게 웃음 짓는 바람 소리가 귓가를 달달하게 감싸고 돌았다. 유혹적인 흘린 웃음소리에 집 안에서 잔뜩 불쾌했던 기분이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이제 나른하게 풀린 신경은 그에게 온통 쏠렸다.
“무슨 질투요?”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건데, 그는 대답 대신,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귓속에 작게 속삭였다.
“가령,”
라희는 새치름한 눈을 흘겼다. 곁눈질로 그와 눈길이 마주하자 그가 슬쩍 눈짓하며 답했다.
“이렇게 인적 드문 곳 깊숙이 들어온다든가 하는.”
라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뒷산의 가장자리라서 그런지, 길가에 인접한 사과 밭처럼 앞이 내다보이도록 훤히 뚫려 있지는 않다. 뒤쪽 수풀 사이로 짙게 우거진 숲에 비하면 아직 어린 사과나무가 무성하지는 않아서 그저 탁 트인 시야만 겨우 가릴 뿐, 그렇게 외진 곳은 아니다.
“그것도, 단둘이서.”
허리를 감아오는 단단한 팔. 조여드는 팔목 힘으로 라희의 몸은 그에게 깊이 밀착되었다. 배꼽 아래 느껴지는 딱딱한 이물감. 서로가 맞닿아 접촉한 하반신에서 찌를 듯 딱딱하게 쏟아난 남성이 생생히 느껴졌다.
“일부러 말이지.”
맞닿은 바지 아래 터질 듯 부푼 살덩이에서 후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진다.
“술에 취한 남자는, 위험하다는 생각.”
잡힌 허리를 더듬어 내리는 손길. 점점 아래로 내려가 도톰하게 부푼 엉덩이의 둥근 곡선을 그리다가 깊게 팬 골을 나른하게 쓸어내려 꽉 움켜쥐었다.
“아….”
저도 모르게 약한 신음이 터져 나오자, 제소리에 놀란 라희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픽, 귓가로 점차 거칠어진 숨소리가 흘러들었다.
“안 해봤어?”
나직하게 속삭여지는 목소리가 젖혀진 목덜미 살갗 바로 위로 흩뿌려졌다. 이내 귓불에 뜨끈한 감촉이 스치듯 지나며 피부 위로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애태웠다. 그와의 접촉을 열망하는 목줄기가 자연스레 옆으로 비스듬히 젖혀진다.
길게 뻗어 기울어진 목덜미로 따뜻한 입술이 내려앉으면서, 단단한 이를 살갗에 박고서 입안 쪽으로 뜨뜻하게 밀착해 촉촉한 혀로 문지르며 깊게 빨아들인다. 보드라운 입술이 압착해 짓누르듯 비벼지면서 안쪽 살갗이 쪽 빨아들여지자, 아찔한 감각이 피부를 타고 전해져 순식간에 정수리까지 쭉 뻗쳤다.
그와 동시에,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몰아치듯, 엉덩이를 움켜쥔 손이 점점 아래 깊은 골로 파고들 듯 이동했다. 엉덩이 안쪽, 허벅지와 맞닿은 곳을 저릿하게 짓누르는 손가락이 느껴지자, 라희는 허벅지 안쪽으로 힘을 굳게 주고 교차해 이음부를 오므려 닫았다.
“질투로 도발된 유혹이라면, 응해주고 싶은데.”
목이 깊게 빨리면서 거침없이 허벅지 안쪽을 파고드는 손길에 라희는 잡힌 허리를 비틀며 몸을 잘게 떨었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바싹 끌어 죄여 든다. 굳게 두른 팔 아래 눌린 몸을 둘러싼 탁한 대기가 압박하듯 짓누른다. 도저히 옴짝달싹할 수 없다.
“기꺼이.”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가 거칠어진 호흡과 흐려진 시야 사이로, 진득한 시선과 함께 부딪쳐왔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