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94화 (194/214)

194

13. 에필로그 17

“왜, 엄마.”

주방 구석에 들어선 라희가 묻자, 엄마는 주방 바깥과 연결된 뒤쪽 창고로 라희를 눈짓해 불렀다. 쪽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가니, 목조로 된 창고 바닥에는 그늘에 건조 중인 나물들이, 벽의 선반에는 익숙한 세간살이들이 놓여 있었다.

“한 서방 보니까. 사람이 참 괜찮더라. 남자가 진중하고 그래야지. 직장이 대기업은 아니어도 씀씀이나 차림새 보니, 집안은 넉넉하게 사는 거 같고. 미현이 말로는 그렇다더구나, 서울은 워낙 지하철이니 버스가 잘 되어 있어서 자가용 없어도 살만하다고. 그런데 아무래도 한 서방 나이가 있으니까. 이렇게 찾아온 걸 보면, 혹시 결혼이 급하다니? 남자 나이 그 정도면 요즘 세상에 늦은 것도 아닌데.”

“…….”

이미 혼인신고를 해버려서, 결혼식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왔지만, 라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뭔데.”

엄마로서 할 말이 있으니 이렇듯 인적 없는 창고로 긴히 불러내긴 했을 거다. 엄마는 라희는 가만 보고 있다가 입매를 옅게 올렸다.

“네 오빠 말이야. 내 아들이지만, 가끔씩 성격이 괴팍해서, 어떤 여자가 비위를 맞추고 사려나 생각했는데. 미현이가 잘하더라. 짚신도 짝이 있다던데 딱 그 짝이야. 얼굴도 그만하면 예쁘고. 성격 착하고, 애교 많고. 엄마는 네 오빠만 좋다면 결혼시킬 생각이란다.”

조금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확실히 미현 정도면 나쁘지는 않았다. 일단 오빠가 푹 빠져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고, 애교 부리는 것이나 남자 다루는 솜씨는 탁월했다. 더군다나 부모님께도 사랑받으려 애쓰는 것을 보니 시부모라고 거리를 두고 생뚱맞게 대하는 것보다는 낫게 보였다.

“그래서 말인데, 라희, 너도 알다시피 집안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아. 이번 가을 되어 봐야 알겠지만, 수입 들어오면 겨우 밀린 빚을 갚기 시작할 거란다. 곧 사과밭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할 생각이고, 작목반에서 요즘 인기 있다는 애플와인이니, 아이들 간식이라는 동결 건조 사과칩이니 이런 사업 시작하면 같이 할 생각이야. 그래서 앞으로는 희망이 보이기는 하는데, 미현이가 저리 결혼에 목매는 걸 보니까 엄마는 한시라도 빨리 결혼시키고 싶구나. 정작 결혼식 자체는 얼마 들지 않으니 올해 안으로 올려주겠는데, 집이 문제다. 전세라도 서울 집값이 오죽 비싸야지. 그런데 한 서방은 살 집은 있니?”

“…….”

집이라면 있다. 둘이 살기에는 차고 넘쳐서 문제지. 하지만, 넌지시 묻는 엄마의 의도를 알 수 없던 라희는 한동안 침묵했다. 부모님으로서 딸의 남편 될 사람이 궁금하다면 직접 물어보면 될 텐데, 속물 취급받기 싫어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입을 굳게 다문 라희의 눈치를 살피던 엄마가 어색한지, 창고 선반에 이리저리 놓인 물건을 몇 개 들었다 놨다 정리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직 용건이 끝나지 않은 것 같아서, 라희는 가만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러던 엄마는 슬쩍 라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미현이 말마따나, 오빠가 먼저 가고 그다음 네가 가는 게 순리라서 그래. 한 해 동안 집안에 혼사를 두 번 치르기는 힘드니까. 올해는 오빠를 먼저 장가보내려고 생각 중이란다. 그동안 전화 통화하면서 미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봤는데, 눈물 글썽이며 이야기 하는 거 들어보니까 미현이도 참 딱하더구나.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엄마는 재가해서 나가버리고 내내 할머니 손에 컸나 봐. 할머니도 성인 되자마자 돌아가셔서 피붙이라고는 하나 없는 외로운 아이더구나. 그래서 어서 결혼해서 자기 가정 꾸리고 싶은 심정이 느껴져서 마음속으로 짠하단다.

어찌어찌 대학은 2년제를 졸업 하기는 했는데 모아둔 돈이나 있는 재산은 하나도 없는 모양이야. 그래서 미현이네 친정 쪽은 기댈 것이 없고, 우리 쪽에서 다 해결해야 해서 엄마 어깨가 무거워. 미현이도 제 사정을 아는지 자꾸 어머님, 어머님 하면서 살갑게 구는데. 그게 더 애잔해 보이고 그래.”

미현의 현재 성격은 지나치게 일찍 사회의 물이 들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물적으로 돈을 밝히거나, 사람 앞에 두고 대뜸 직장생활 하며 재산 얼마 모았는지 물어보는 일 말이다. 라희 또래 대학 친구들에게서는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캐릭터니까.

“네 아빠 일만 잘 풀렸어도, 전셋집은 무리 없이 해 줄 수 있는 건데. 우리 집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걱정이야. 이번에 빚 갚으면 가서 통장 만들고 또 도움을 받아봐야지. 그래서 라희야.”

“……?”

엄마의 시선이 라희의 아랫배 쪽을 향했다.

“엄마 생각으로는 그래. 확실히 급한 일 있는 거 아니면, 너도 앞으로 신경 좀 써서 일단 오빠부터 보내고 차후에 집안 사정이 풀리고, 너 대학 졸업한 뒤 돈 좀 모은 다음에 시집갔으면 한다. 오늘 보니 한 서방이 좋은 사람 같아 보이기는 하다만, 네 나이도 결혼하기에는 어리고, 요즘 세상에 여자도 직장이 있고 자기 돈이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살면서 힘들단다.

급한 일은, 아이를 말하는 것이었나 보다. 성인남녀이니 자연스레 그런 말이 오갈 나이가 된 것은 당연했으나, 엄마로부터 급작스레 지적을 받자 당황한 라희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바닥에 널린 나물을 바라보았다.

“교회에서 듣는 다른 집 딸들처럼, 결혼하기 전 직장생활 몇 년 해서 시집가기 전에 친정에 목돈 주고 가는 것은 바라지 않더라도, 엄마는 네가 어느 정도 준비된 상태에서 결혼했으면 해. 천천히, 알겠지?”

대화의 요지는, 이거였다. 오빠가 먼저 결혼하고 나서, 나중에 졸업하고 취업하고 시집갈 것. 이유는, 미현은 아예 고아나 다름없어서 그렇다지만, 라희는 친정이 빤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형편이나 마찬가지니 시일을 두고 준비가 되면 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체면을 차릴 수 있을 테니까.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라희는 작게 답했다. 실지, 라희 쪽에서는 서두를 이유는 없었으니까. 일단, 대학 졸업도 남았고. 바흐는 학업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했다. 늘 그랬듯, 피임은 그가 신경 쓰고 있었다.

“그래. 그럼 오래 자리 비우는 거 아닌지 모르니. 거실로 나가보자꾸나.”

말을 마친 엄마는 쪽문을 열고 손짓했다. 라희는 엄마 뒤를 따라 주방에서 나왔다. 거실을 빼꼼 내다본 엄마는 뭔가 더 음식을 만들려는지 싱크대로 향했다. 냉장고와 싱크대를 오가는 엄마를 뒤로한 라희는 거실로 돌아갔다.

술자리의 분위기와 친구들을 좋아하지, 정작 주량은 약한 아버지는 먼저 일이 있어서 일어나 보겠다고 집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아무래도 술자리를 피해 마을 친구분들을 만나러 나가신 듯했다.

남은 술자리는 무르익어 보였다. 미현은 얼굴이 불그작작하게 올라 히히히 웃으며 제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얼음이 떨어진 지가 꽤 되었는지, 이제는 스트레이트였다.

라희가 슬쩍 자리로 돌아와 바흐 곁에 앉으니 그가 손을 가볍게 쥐고서 부드럽게 매만지며 반겼다.

“어머! 아가씨! 어휴. 우리 아가씨는 복도 많지.”

미현이 맞은편 앉은 라희에게 아는 체를 하며 목소리를 높이 올렸다. 취했는지 술기운 특유의 방방 뜨는 톤이었다.

“지난번에는 의사더니, 이번에는 잘나가는 금융맨이에요? 우아. 어쩜, 만나는 남자마다 죄다 특등품이에요. 어서 비결 좀 알려줘요.”

“많이 취한 거 같은데요. 미현씨. 그리고 전에도 말했지만, 오해에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듣기 싫으니까. 참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그리고 여기 와서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요.”

라희가 싸늘히 답하자, 미현은 해죽 웃었다.

“그래요, 그럼. 부러워서 말이 헛나갔나 봐요. 확실히 진욱 씨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닌데, 그렇죠? 히히.”

미현은 황금빛 진한 액체가 든 유리잔을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마셨더니, 정말 취하네요. 오빠도 그렇지?”

라현을 향해 헤죽헤죽 웃으며 말을 건네자, 술기운으로 얼굴이 뻘건 라현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버지를 닮아 주량이 약한 오빠는 스트레이트로 몇 잔 마신 게 무리가 갔는지 제대로 몸도 가누기 힘들어 보였다. 등 뒤에 놓인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간신히 앉아 있는 모양새였다.

“근데, 어쩜. 진욱 씨 그렇게 술이 세요? 같이 마셨는데도 말짱하네요. 옆에다 몰래 술 작업한 거 아니죠?”

말을 하던 미현은 갑자기 한 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모양새가 스스로 뭔가에 놀란 모양이었다.

“아니, 아니, 내 말은. 술 다른 데다가 흘린 거 아닌지 묻는 거였어요. 작은 병도 아니고, 큰 병인 700 mL를 거의 다 비워 가는데 혼자만 말짱하니 그렇잖아요. 헤헤.”

슬쩍, 웃음으로 얼버무리면서 말을 이었다.

“회사 이름은 낯설지만, 금융맨이라 돈도 잘 벌 테고, 남자 연예인 뺨치게 키 크고 잘 생기셨는 데다가, 주량도 장난 아니네요. 이런 남자는 어디서 만나요? 참, 두 분 어떻게 만나셨어요? 아까 이야기 들어보니 만난 지 일 년 된 것 같았는데.”

미현은 해시시 웃으며 바흐에게 눈웃음쳤다. 라희는 그 모습을 어이없게 바라보다가, 한마디 했다.

“제가 좋아서 따라다녔어요. 됐어요?”

“어머머. 그럼, 대쉬하면 넘어오나요?”

라희 말을 들은 미현은 둥근 유리잔 위 가장자리를 길게 세운 손끝으로 따라 그리며 은근한 눈짓을 흘렸다. 라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자, 옆에서 바흐가 입을 열었다.

“먼저 반한 것은 제 쪽이었습니다.”

나직한 목소리를 들은 미현이 미간을 찡그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치잇. 너무 여지를 안 주신다. 그런 남자 매력 없는데. 미남이면 적당히 흘리는 맛이 있어야, 사람이 재미있죠.”

미현의 눈 흘김을 가만 받고 있던 바흐는 늘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있는 듯싶더니 불쑥 말을 꺼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신 겁니까.”

라희는 조금 놀란 눈으로 바흐를 바라보았다. 말수도 없어 과묵한 그가 타인에게 질문하는 거 자체가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유심히 바라다보는 바흐와 눈길을 맞추고서 방긋 웃어 보인 미현이었다.

“어, 그게….”

관심을 받아서 기쁜 듯 입가를 들어 올린 채로 풀린 눈을 허공 위로 향해 기억을 더듬는 보였다. 라희는 미현을 향한 시선을 비켜 옆에서 간신히 눈만 가늘게 뜨고 껌뻑거리는 라현을 힐끔 쳐다보았다.

솔직히 둘이 만난 계기가 궁금하기는 했다. 오빠는 여초 학과인 영어과를 졸업했음에도 무뚝뚝하고 욱하는 성격 탓인지 내내 여자와는 인연이 없어서 줄곧 몇 안 되는 남자 동기나 선배 혹은 고교 친구들과 어울린다고 들었는데, 갑작스레 여자를 만나 동거까지 하게 된 계기는 미스테리였다.

맨정신의 오빠라면 뭔가 말해 주려나 싶어서 살피는데, 지금 보니 그럴 상태는 아닌 듯 보였다.

“제가 자주 다니던 카페에 라현씨가 보이더라고요? 우연인 듯싶게 마주쳐서 눈인사하다가 친해졌어요.”

“일했다던 곳 말인가요?”

지난 한정식집에서 만난 자리에서 오빠로부터 미현이 카페 아르바이트했었다고 들었었다. 라희가 묻자, 미현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유리컵을 기울이며 배시시 웃었다.

“아니요. 그땐 일 쉬고 있어서, 그냥 기분전환 삼아 들르던 데였어요. 어휴, 그런데 눈 씻고 찾아봐도 진욱 씨 같은 남자 없던데요. 히잉. 아쉽다아.”

가늘어진 콧소리를 흘리며 은근한 눈짓을 하는 미현이었다.

“취하신 거 같군요.”

바흐가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며 딱 잘라 차갑게 말하자, 미현은 과장되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취하다뇨! 이 정도는. 내가 주량이 얼마나 센데요. 한창때는 아니어도 아직 한 병 밖인데 취하겠어요. 그리고 아가씨.”

미현은 거의 비워진 술병의 들어 라희 앞에 놓인 유리컵에 전부 부어 끝까지 따랐다. 원래 있던 유리컵의 술은 비워진 채였다. 황금빛 진한 액체가 유리컵 절반 아래로 찰랑거리게 채워졌다.

“자요, 마셔요. 다들 마시는데 혼자 얌전빼는 거, 그러는 거 아니에요. 여자면 술자리에서 분위기 맞춰줄 줄도 알아야죠. 곧 졸업하면 사회생활 할 건데, 혹여 미운털 박힐까 봐 미리 알려주는 거에요. 자자, 쭉 들이키세요.”

그간 와인이나, 샴페인은 마셔보았어도 위스키는 처음이었다. 대학 친구들과 맥주나 마셨지, 소주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한번 시도해 보았을 때, 독하다고 고개를 휘휘 내저었던 라희였기에, 소주보다 도수가 높은 위스키는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라희가 앞에 놓인 술잔을 보며 난감해하고 있자, 길고 곧은 손이 내밀어 져 라희의 유리잔을 쥐고 단숨에 들이켰다. 바흐였다.

“그런 사회생활 할 일이 없으니, 됐습니다. 술도 끝났으니 이만하죠.”

“에? 흑기사예요? 우리 진욱 씨, 너무 감싸고 돈다아.”

우리, 진욱 씨라는 비음 섞인 말을 들은 라희는 깊게 심호흡 한 번 내쉬고서 바흐의 손을 꽉 잡았다.

“오빠 말대로 그만 해요. 실내 공기가 술 냄새로 탁해서, 잠시 나갔다 와야겠어요. 미현 씨도 그동안 정신 좀 차리시죠. 더 추한 꼴 보이기 전에.”

라희는 바흐의 손을 굳게 잡고서 현관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