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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한가운데 어지간한 사내들 여럿이 둘러앉아도 넉넉한 넓은 교자상 위로 점심이 한가득 차려졌다. 뒤뜰에서 막 뜯어다 무친 신선한 겉절이와 쌈채, 라희가 온다고 특별히 만든 듯한 애호박 전, 각종 고사리, 토란대, 명이나물 등 각종 마른 나물, 깍두기, 배추김치, 물김치, 여름 별미인 열무김치까지. 하얀 두부가 송송 썰린 맑은 아욱 된장국과 샛노란 조를 섞은 쌀밥이 각자 앞에 놓였다.
상 옆으로는 바닥에 따로 신문지를 넓게 펼쳐놓고 전기 그릴로 바흐가 가져온 소고기를 구워 상에 올릴 준비를 했다.
"여기는 소 잡는 날 아니면 한우는 냉동밖에 없어서 어제 그냥 삼겹살 사놨는데. 이왕 고기를 가져왔으니 이걸로 같이 먹기로 해요."
라희가 굽겠다고 해도 한사코 거절하던 엄마가 한 면이 먹음직스럽게 익은 고기를 뒤집어 구우며 말했다. 치이익, 달궈진 코팅 그릴 위에 놓인 소고기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익어갔다. 옆에서 미현이 냉큼 구워진 고기를 집게로 들어 먹기 좋게 가위로 뚝뚝 자르며 입을 열었다.
"정말, 맛있어 보여요. 백화점 고기라서 그런가요? 예쁘기도 해라. 마블링이 눈꽃처럼 박혀있네요."
교자상 한가운데 고기가 놓인 접시를 올려놓자, 아버지가 수저를 드심과 동시에 식사가 시작되었다. 라희는 바흐에게 어서 먹으라는 눈짓을 했고, 바흐는 단정한 미소를 보이며 젓가락을 옮겼다. 예의 깔끔한 식사 매너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은근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가 마음에 드는 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저 이렇게 입에서 살살 녹는 고기는 처음 먹어봐요. 맛있네요. 부위가 뭐에요, 어머님?"
미현이 생글생글 웃으며 주위를 환기시키듯 말하자, 엄마는 고기를 뒤적이다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선물 세트 안에 등심하고, 안심밖에 없던데. 이건 넓적한 모양이 등심이다. 얘."
"어쩐지. 고소하더라니까요. 입에 착착 감기네요. 고마워요, 두 분 덕분에 이렇게 비싸고 맛있는 것도 먹네요. 자기, 아?"
고기를 한 점 들어 쌈 채소에 싸서 라현의 입에 애교스럽게 넣어주는 미현의 말을 들은 라희는 어색하게 입매만 올렸다. 한정식 집에서 보이던 닭살 행각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변함없는 모양이었다. 라현이 오물거리며 먹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본 미현은 쉬지 않고 쌈을 싸서 아버지에게도 눈웃음을 흘리며 건넸다.
"아버님. 이거 제가 싼 건데요 한번 드셔 보세요. 특별히 맛있어 보이는 부위로 골랐어요."
턱 앞에 들이댄 쌈을 발견한 아버지는 슬쩍 둘러보며 눈치를 보다가 손으로 받아서 입에 넣었다.
"고맙구나."
"에이, 이것도 다 정인데. 저는 정말, 친정아버지가 안 계셔서 그런지 아버님이 너무 좋아요. 그런데 아가씨와 진욱씨가 있어서 오늘은 어색하신가 봐요. 아쉬워요, 아버님. 하나 더 싸드릴까요?"
"아니다. 내가 먹도록 하마."
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미현은 약간 삐친 표시로 입술을 장난스럽게 삐죽거렸다.
"네. 다음번에 꼭 싸드릴게요. 이건 어머님 드려야겠어요."
미현은 손에 든 쌈을 고기를 굽고 있는 엄마 입에 쏙 넣어주었다. 좋게 생각하려면, 원래 애교가 많아 부모님에게 잘하려 노력하는 것 같기도 하고, 원체 애교라고는 없던 라희는 좀처럼 해보지 못한 거라서 미현의 스스럼없는 태도가 조금 부럽기도 했다.
라희는 어색한 표정으로 바흐를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옅게 웃었다. 마음에 들지 않은 미현에게 배워서 바흐에게 저렇게 애교를 떨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맛있게 고기를 먹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렇게 많이 먹어도 되려나요? 젓가락이 자꾸 가요. 너무 맛있는 거 있죠."
연신 입안으로 고기를 나르던 미현이 눈썹을 슬쩍 들어 넌지시 말하자, 엄마가 괜찮다는 얼굴로 바흐를 보며 말했다.
"고기가 넉넉해서 오늘 다 못 먹을걸. 한 10kg 되어 보이던데. 그렇지요?"
"예. 식구가 있으니 넉넉하게 담아달라고 했습니다."
바흐가 답하자, 미현이 눈을 반짝였다.
"어쩜. 백화점 고기면 엄청 비쌀 텐데. 10킬로나 사 오신 거에요? 어머니, 이따 저희 갈 때 조금 싸주시면 안 돼요? 이거 냉동도 아니라서, 신선하고. 오빠가 또 한우 로스구이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엄마는 고기를 굽던 집게를 멈추고 난처한 표정으로 라희에게 눈길을 던졌다. 서울에서 가져온 소고기를 집에 가져가든 말든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부모님 드시라고 일부러 가져온 선물임을 알고 있음에도 얌체처럼 욕심내는 그 마음이 미워 보이는 미현을 향해 라희가 싸늘한 눈길을 던지자, 미현은 보란 듯 입매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아참, 맞다. 두 분 선물이시죠.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그래도, 오빠가 좋아하는 건데. 아가씨, 갈 때 저희가 조금 가져가도 될까요?"
오빠 핑계를 대며 끝까지 고기를 가져간다고 고수하는 미현을 향해 라희는 어이없는 얼굴로 잠시 바라보다가, 바흐의 조용한 눈짓을 받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라희가 차갑게 대꾸하자, 화색이 도는 얼굴로 미현이 밝게 재잘거렸다.
"어머, 고마워요. 아가씨. 실은, 지난주엔가? 오빠랑 백화점 식품관 가서 한우 가격보고 깜짝 놀랐었거든요. 프리미엄 로스는 100g에 거의 2만 원 가까이 하더라고요. 결국, 구경만하다가 호주산 사 와서 먹었지 뭐에요. 오늘이 이렇게 맛있게 먹으려고 그랬나 봐요."
"우리 자기가 먹을 복이 있어서 그렇지."
라현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러자 미현은 배시시 웃으면서 연신 고기를 집어 오빠와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한 표정으로, 라현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눈짓했다.
"오빠, 참. 아버님과 약주 하셔야지. 아까 보니 술도 두 병이나 있던데."
"아. 그럴까."
"이렇게 좋은 술안주가 있는데, 기분 좋게 한잔하셔야죠. 아버님."
미현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아주 뽕을 뽑을 작정인 듯했다. 미현이 애교부리며, 저도 무슨 술인지 궁금하고 한잔 먹고 싶어서 그래요, 라고 덧붙이자 아버지는 그저 허허 웃다가 눈길을 돌려 바흐에게 슬쩍 시선을 던졌다. 바흐가 단정하게 눈을 낮추자, 라현더러 술 상자를 가져오라 시켰다.
"한 서방 덕분에 오늘 맛있는 고기도 먹고, 술도 먹는구먼. 한잔하지."
"예. 장인어른."
라희가 주춤거리며 상에서 일어나 얼음과 컵을 가지러 주방으로 가려 하자, 미현이 재빨리 나서며 말했다.
"아가씨는 그냥 앉아 계세요. 제가 챙겨올게요."
라희는 도로 자리에 앉아서 조금 창피한 마음에 바흐를 곁눈질로 살폈다. 슬며시 눈이 마주치자, 바흐는 괜찮다는 듯, 상 아래로 가만 손을 뻗어 라희의 손을 쥐고 가볍게 쓰다듬었다.
라현이 가져온 술은 로열 살루트 38년산이었다. 갈색 박스에서 꺼내자, 어둡고 미끈한 병 가운데 부조처럼 박힌 황금빛라벨과 왕관모양이 병뚜껑이 번쩍이며 빛났다.
"워. 38년이네요. 이건 처음 보는데. 라희 따라 집에 왔다가 파산하는 거 아닌지 걱정이군요. 매부."
"그러게요. 이거 어지간한 가게 아니면 취급하지도 않는데."
미현은 좀더 말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뚝 다물었다. 그리고는 입매를 끌어올리며 주방에서 가지고 나온 유리잔과 얼음을 자신 앞에 놓아두고서 젖은 행주를 들고 상 위를 능숙하게 정리하고 바닥을 훔치며 치웠다.
"아버님은 어떻게 드세요? 언더락(On the rock: 얼음)으로 드세요, 아니면 스트레이트(straight: 원액)로. 저, 언더락 진짜 잘 말거든요."
잘 만다라는 표현 자체가 처음 듣는 말이라서 라희가 눈을 들어 미현을 바라보자, 미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호호거렸다.
"아, 예전에 양주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한동안 집에서 같이 마셨거든요."
"아, 송미 말하는 거야?"
라현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자, 미현은 급히 답했다.
"어, 응. 오빠. 송미. 걔 양주 좋아해."
"아버지는 언더락으로 연하게 드시니까. 잘 만들어봐. 나도 언더락. 매부는요?"
"저도 같은 것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미현은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유리컵에 얼음을 절반가량 담고 황금빛 술을 따라 손목으로 가볍게 돌린 후, 마른행주로 컵 아래 가장자리를 쓱 돌려 닦고서 아버지와 라현, 그리고 바흐 앞에 놓았다. 바흐는 자신 앞에 놓인 술잔을 가만 바라보다가 눈매를 약간 좁혔다.
남자들이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라희야, 과일도 상에 올려라."
주방에 들어간 엄마가 수박 작은 조각과 복숭아, 참외 그리고 자두가 수북이 담긴 바구니와 큰 접시를 라희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미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중간에 받아 채며 싱긋 웃었다.
"제가 할게요, 어머님."
자리에 도로 앉아 어디서 배우기라도 한 듯, 천상 여자처럼 다소곳이 정갈하게 과일을 깎아내는 미현을 보고 있자 사람이 달리 보였다. 엄마도 그 모습이 예쁜지 조용히 미소 지으며 한마디 했다.
"어휴, 우리 미현이는 요리도 잘한다더니. 과일도 얼굴처럼 예쁘게 잘 깎는구나. 나보다 낫다 얘."
미현은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매를 가볍게 올리다가, 라희를 슬쩍 곁눈질하며 말했다.
" 아가씨는 접시 좀, 더 가져오실래요?"
"……?"
과일용 큰 접시가 있는데, 더 가져오라는 소리가 뭔지 몰라 라희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잠시 당황한 표정의 미현은 눈을 깜빡이다 급히 말을 이었다.
"아, 아니에요. 접시가 있네요. 과일 깎느라 깜빡했어요. 제정신 좀 봐."
접시 위에 과일을 차곡차곡 예쁘게 배치해 상 위로 올린 미현은 엄마와 라희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세팅도 되었겠다, 여자들끼리도 한잔할까요?"
"어, 엄마는 교인이라 술 안 드시는데요."
"그럼, 우리끼리 마셔요. 어머님, 그래도 되죠?"
독실한 종교인인 엄마의 영향 때문인지, 집 안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은 그간 아버지가 유일했다. 지금이야 손님이 와서 남자들이 술을 마신다지만, 엄마와 라희는 집에서 술을 마셔본 경험이 전무했다. 라희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엄마를 보고 있자, 엄마도 의외였는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그래, 이렇게 좋은 술을 받았는데 안 마시는 것도 이상하지. 라희랑 한잔해."
라현이 시원하게 말하자, 엄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어우, 맛있겠다. 자요, 아가씨."
능숙하게 술을 만들어 라희에게 건네는 미현이었다. 라희가 얼음이 담긴 술잔을 받아들고서 미간을 미미하게 좁히고 있자, 어느새 술을 홀랑 마신 미현이 어서 마셔보라는 듯 눈짓했다.
"진짜, 맛 끝내줘요. 이런 거 어디서 못 마셔보는데. 이야, 횡재했네요. 오늘."
부족한 듯 입맛을 다시며 슬쩍 상위를 살피던 미현은 빈 잔들을 발견하고는, 바로 빠른 손놀림으로 술을 채워 도로 가져다 놓았다.
"술은 제가 책임질 테니, 편히 말씀들 나누세요."
싱긋 웃는 미현을 향해 오빠가 자기 최고라고 소리 없는 입 모양을 만들어 보냈다.
그윽한 술 향기가 피어오르는 차가운 술잔을 앞에 두자, 자연스럽게 남자들끼리 일반적인 대화거리인 요즘 뉴스에 회자되는 이슈가 화제로 올랐다. 주로 라현과 아버지가 대화를 나누고, 바흐는 조용히 듣는 쪽이었다. 미현은 오빠 옆에 찰싹 달라붙어 이야기에 활발히 끼어들며 술잔을 같이 기울였다.
라희도 채워진 술잔을 앞에 놓고서 바흐 옆에 가만 앉아 있는데, 저쪽에서 엄마가 잠시 보자는 눈짓을 보냈다. 바흐에게 조용히 양해를 구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난 라희는 주방으로 향하는 엄마를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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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