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91화 (19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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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에필로그 14

고속버스가 터미널을 출발했다. 커다란 통 창 너머로, 강남의 번화한 건물과 아파트단지가 차츰 멀어져갔다. 나들목을 통과한 버스는 이내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바흐와 나란히 앉아 깍지 낀 채로 손가락을 세워 마주 닿은 그의 손등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던 라희가 눈을 들어 말했다.

"고마워요."

라희의 중얼거림에 바흐는 입매를 올리며 답했다.

"부인의 뜻에 따라야지."

토요일 늦은 아침, 아침밥을 챙겨 먹고 평창동에서 나온 라희는 김기사의 정중한 배웅 속에 바흐의 손을 잡고서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 앞에서 내렸다.

오늘 아침. 라희는 욕실에서 씻고 나온 바흐를 향해 조금 있다가 충주 집에 갈 때 김기사가 아닌, 고속버스를 타고 가자는 제안을 했다. 바흐는 잠시 의중을 살피려는 듯 라희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선선히 알겠다고 답했다.

아침부터 갑작스레 이런 제안을 하게 된 연유는 조금전 전화 통화 때문이었다. 침대 위로 비쳐드는 따가운 햇살 때문에 잠에서 진즉 깼지만, 새벽까지 이어진 잠자리의 여운 때문에, 침대에 누운 채로 비몽사몽 잠에 취해있을 때였다. 갑자기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 놓은 휴대폰 벨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더듬, 손을 뻗어 눈매를 좁히며 확인해보니 발신인은 엄마였다.

"라희니?"

전화를 받자마자 엄마가 물었다. 전화기 너머 깔깔거리는 높은 여자 목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미현이 먼저 충주집에 가 있는 모양이었다.

"어. 엄마. 오빠는 온거야?"

"응. 어젯밤 늦게 와서, 아침 같이 먹고나서 지금 과일 깍아서 먹는 중이야. 집에 인사 온다고 과일 바구니를 들고왔지뭐니."

엄마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는?"

라희가 물었다. 과연 오빠가 데려 온 김미현을 마음에 들어할까.

"아빠도 옆에 계시지. 미현이가 어찌나 애교를 부리면서 네 아빠를 잘 챙기는지. 입에 넣어주는 과일 받아먹느라고 마누라는 까맣게 잊고서 네 아빠 입이 귀에 걸렸단다. 얘. 참, 언제 오니? 오늘 온다고 했지? 출발했니?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했는데."

엄마의 질문을 받은 라희는 슬쩍 눈을 들어 빈 침대를 바라보았다. 바흐는 진즉 일어나서 씻으러 가고 없었다.

"곧 출발할 거야."

"지금 출발해도 점심 지나서 도착하겠구나. 버스를 타고 오니? 아니면, 차로 오니?"

차로, 에서 약간 못 미더운 기색을 비춘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라희는 잠시 망설였다. 지난번 엄마와 통화한 내용으로 집안 내 바흐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은, 나이가 꽤 많다, 기생오라비 같이 잘 생겼다, 그리고 대기업이 아닌 평범한 회사원인 것 같다였다.

물론 지난 주말에 오빠와 부닥뜨렸을 때, 바흐가 입고 있던 옷은 평소 그가 즐겨 입던 깔끔한 핏의 세미 캐주얼 옷이 아니었긴 했다. 라희의 요청으로 청바지와 하얀색 피케이 티셔츠를 입은 그는 본래 외모는 그대로였을 테지만, 옷차림이 부유해 보이지는 않았을 거다. 그러니 김미현이 대기업 사원도 아닌것 같다는 평가를 내렸을 테고. 이제 엄마는, 바흐가 자가용을 소유하고 있는지의 여부도 미심쩍어하는 눈치였다.

"버스."

순간, 충동으로 라희가 짧게 답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 엄마가 그럴줄 알았다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버스 시간 잘 보고 오고, 시내 들어오면 연락할래? 시내버스 타고 들어오기 번거로우면, 엄마가 차로 데리러 나갈까? 지난번 네 남자친구 같았으면, 이렇게 걱정이 안 되는데."

엄마는 뿔테이야기를 슬쩍 흘렸다. 라희로서는 기억하기 싫은 과거인지라, 짧은 호흡을 내쉬고는 재빨리 할 말을 말했다.

"아니. 됐어. 알아서 갈게. 그럼 끊어. 엄마."

"알았어. 터미널 도착하면, 연락해. 밥 차리게."

뚝, 전화가 끊겼다. 화면 중앙에 통화시간이 깜빡이고 있는 휴대전화 화면을 멀거니 들여다보고 있던 라희는 슬쩍 미간을 좁혔다. 왠지 모를 충동으로 엄마에게 버스를 타고 간다고 말하기는 했는데, 정작 바흐는 라희가 선택한 이동수단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거 같았다. 일단 그를 먼저 설득해야 했다.

"저기."

욕실에서 씻고 나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고 있는 바흐를 향해, 라희가 조심스레 말을 건네자 그는 동작을 멈추고 가만 라희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라희는 활짝 웃어 보였다.

".....남편님."

키가 큰 그를 눈동자를 위로 굴려 올려다보며 작게 부르자 픽, 입매를 올린 바흐가 다정한 눈으로 물었다.

"왜."

나직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오늘, 충주 집에 갈 때요."

라희는 잠시 말을 끊었다. 어떻게 말해야, 그가 버스를 탄다고 할까. 그러자 바흐가 라희가 앉아 있는 침대 앞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앞에 멈춰선 그에게서는 시원한 바다 향과 우디향이 어우러진 청량한 내음이 풍겼다. 라희는 슬쩍 심호흡하며 어색하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음?"

눈치를 보고 있는 라희를 향해 바흐는 눈썹을 올리고는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게, 저기. 김 기사님 통하지 않고, 고속버스 타고 가면 안 돼요? 옷도 편한 걸로 입구요."

"......"

가만 지켜보는 그를 향해, 뭐라고 이유를 말해야 할까. 오빠에게 첫인상이 후줄근하게 박혀있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미지 변신하지 말고 그대로 가자고 해? 눈동자를 바삐 굴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고맙게도 그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라희는 스스로도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제 은행에 들른 이후 바흐가 돈이 많다는 사실을 친정집에 곧이곧대로 알리기가 싫어졌다. 아마도 어제저녁, 집에 돌아온 바흐에게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자, 그가 대수롭지 않은 듯이 한 말 때문인지도 몰랐다.

"콘트롤(control)."

"네?"

궁금해하는 라희를 향해 그는 손가락을 세워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다갈색 머릿결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통제 가능한 재량권은 낙관의 근거가 된다더군. 그러니, 부인이 메리지 블루(Marrige Blue: 결혼 우울증)에 걸리지 않기를 희망하는 뇌물이라고 해두지. 정신 건강을 위해 사사로이 쓰도록 해. 생활비나 기타 필요한 경비는 앞으로 카드를 사용하게 될 테지만, 국가에 의해 증여세가 면제된 현금은 그런 용도니까."

그 말을 들은 라희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그에게 키스했다.

저녁을 함께 먹고 나서, 같이 소파에 앉아 손에 보고서 들고 읽고 있는 그를 힐끗 바라보다가 머릿속으로 조용히 집안 사정을 떠올려보았다.

그동안 집은 귀농 초기 투자 실패로 쌓인 빚에 허덕이고 있지만, 지난번 엄마가 천만 원을 건네주려 따로 돈을 마련했을 정도라면, 아주 힘든 상황은 벗어난 듯했다. 지금은 여름이고 다른 말이 없었던 걸로 봐서 수확에는 지장 없는 것 같고, 아마 올가을부터 수확을 시작하고 나면 돈이 생길 테니, 그 돈으로 묵은 빚을 조금 상환할 수 있을 것이다.

별다른 큰일 없이 그렇게 차차 갚아 나가다 보면, 생활과 가계경제는 점차 안정될 테고. 지금 현시점에서는, 딱히 큰돈이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바흐라는 넉넉한 키다리 아저씨의 금전적 보살핌이 필요하지 않은 시점이랄까.

아, 딱 하나.

김미현과 결혼하겠다고 서울에 전셋집을 요구하는 오빠를 제외하면 말이다. 분명히, 돈 나올 구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전셋집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요구하겠지.

이제, 알 수 있었다. 뭔지 모를 께름칙한 기분은 확실히 오빠 때문이다.

다음날이면 마주할 오빠를 떠올린 라희의 눈매가 살포시 좁혀지자, 옆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바흐가 고개를 돌려 시무룩한 라희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팔을 내밀어 작은 어깨를 꼭 끌어안아 달래주듯, 정수리에 짧게 키스했다. 라희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 거의 모든 개인 시간을 일에 쏟아붓다시피한 바흐가 힘들게 벌어온 돈이다. 라희가 갚아주었던 사채도 전혀 고마워하지 않은 오빠였는데, 바흐가 돈이 많다는 것을 알고, 라희를 통해서 금전적 도움을 받게 된다면 고맙게 생각하기는커녕, 돈이 철철 넘쳐 응당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바흐가 말한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오빠에게는 단 한 푼도 건네기 싫었다.

***

막힘없는 도로를 달린 고속버스는 두 시간여 만에 충주 공용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바흐는 고속버스 짐칸에 실어둔 선물 상자를 꺼내 들었다.

강남 터미널에서 충주로 출발하기 전, 바흐는 인근 S 백화점으로 라희를 데려갔다. 갑자기 백화점에 들러 어리둥절한 얼굴의 라희를 향해 부모님 인사 선물로 무엇이 좋으냐는 질문을 던졌다.

미리 선물을 준비해 둘까 하다가 이왕이면 말 잘 듣는 남편이 되고 싶었다는 그의 말에 슬쩍 미소 지은 라희는 이리저리 백화점 식품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과일 바구니에 멈춰 있는 바흐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고개를 저어 보였다. 충주 집이 과수원이고 도심에서 벗어난 시골이라서 그런지, 수입 과일을 제외한 싱싱한 제철 과일은 늘 충분했다. 게다가, 김미현과 오빠가 이미 과일 바구니를 선물로 들고 간 상태다. 그렇다면, 무엇이 적당할까. 그 외 흔히들 선물하는 건강식품이나, 보양 식품 세트는 첫 인사 자리에는 지나치게 형식적으로 보일 거 같아서 망설이고 있는데, 바흐가 갑자기 정육 코너로 다가갔다.

"채식주의자는 아니시지?"

고기를 보며 묻는 그를 향해 라희는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네."

정육 코너 직원에게 한우 선물세트를 주문하는 그를 보며, 지난번 뿔테가 집에 갑자기 쳐들어왔을 때 엄마가 부랴부랴 삼겹살을 사러 갔던 일을 떠올렸다. 바흐의 생각대로 육류선물 세트는 나쁘지 않았다. 가서 먹을 수도 있으니까 유용하기도 했고.

백화점의 고급스러운 로고가 박혀 있고 마치 여행가방 캐리어 같이 바퀴 달린 손잡이가 달린 아이스백을 손에 쥐고서 그다음 들른 코너는 주류 판매대였다.

"약주는?"

바흐가 물었다. 생각해보면, 영국 바스의 사라 집에 홈스테이하러 온 첫날에도 그는 술을 선물로 가져왔었다. 이름도 생소한 화려한 외관의 샴페인이었다.

"술이요? 아, 드시긴 드시는데, 와인 종류는 드시는 모습 못 봤어요."

라희의 대답을 들은 그는 번쩍번쩍 쇼케이스에 진열된 양주 쪽을 눈으로 훑었다. 몇백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술병에 고정된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라희는 손을 뻗어 바흐의 어깨를 꾹 붙잡았다.

"너무 비싼 건 안돼요."

"……?"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그를 향해 라희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름도 생소한 비싼 술은 엄청나게 부담스러워서 정작 드시지도 못할 거 같아서요. 마음 편히 마실 수 있는 선물이 좋겠어요."

"흐음."

그는 라희를 가만 내려다보다가 입매를 올리며 물었다.

"아버님께서 평소 즐겨 드시던 술은?"

라희는 눈을 낮게 깜빡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이야 귀농한 농부답게 막걸리를 즐겨 마시지만, 도시에 살았을 때 명절이나 연말연시에 집에 선물로 들어온 상자에 섞여 있던 양주는.

"헤네시 하고, 카뮈하고, 잭 다니엘? 그거하고 시바스 리갈인가, 그것도 드셨던 거 같고. 아, 맞다. 로열 살루트 하고 발렌타인인가? 그거 선물로 들어왔을 때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라희가 말하고 있는 도중에 백화점 점원이 다가와 정중히 말을 건넸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위스키나, 코냑으로 적당한 술을 찾고 있습니다."

"선물용이십니까?"

직원의 질문을 받은 바흐는 라희를 슬쩍 바라보더니 부드럽게 입매를 올렸다.

"네. 장인어른께 인사드릴 용도입니다."

"아, 그거라면."

직원은 밝은 표정으로 쇼케이스로 걸어가 유리 진열대를 열고 안에서 갈색 병을 하나 꺼내 들고 보여주었다. 병 중앙 라벨에는 발렌타인, 30(Ballantine 30 years)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제품이, 발렌타인 30년산인데요. 일명 장인어른 선물용으로 가장 인기가 높은 제품입니다."

바흐는 눈으로 라희에게 의중을 물었다. 과거 아빠가 선물 받고 좋아하던 양주는 맞았는데, 30이라는 숫자는 조금 낯설었던 라희는 라벨에 적힌 이름을 읽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이 제품은 가격대가 조금 더 높은데요, 고급스러운 선물로 인기가 좋습니다."

구매의사가 있는 성 싶으니 은근히 더 비싼 물품을 보여주려는 속내의 점원이 꺼내온 술은 로열 살루트(Royal Salute) 38년산이었다. 바흐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개 다 선물 포장해 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정육 선물 세트와 양주가 담긴 쇼핑백을 양손에 든 그에게, 차마 눈치 없이 시내버스를 이용하자는 말은 나오지 않아서 터미널 앞에 대기 중인 택시에 올라탔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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