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90화 (19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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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에필로그 13

내일은 토요일. 엄마에게 간다고 통지했던 주말이 코 앞이었다. 월요일 오후 늦게 종로구청 업무 종료 마감 시간 가까이 아슬아슬하게 혼인신고를 마치고 나서 하루하루 문자 통지를 기다렸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갔다. 삼일 째 되는 날부터는 수시로 휴대폰을 확인하며 조바심을 냈다.

오늘은 금요일. 라희는 여느 때처럼 하계 계절학기 첫 수업인 9시 교육학개론 강의실 뒤편, 창가자리에 앉아 교실 맨 앞 스크린에 투사되는 PPT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높낮이 없이 나른하게 들려오는 늙은 교수님의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계절학기 특성상, 3주 만에 교육학개론 한 권을 후딱 끝내는 속성강좌이다 보니, 교재 진도가 매시간 쑥쑥 나갔다. 벌써 개강이 2주째인 오늘은 4 챕터인 교육의 사회학적 기초 파트 수업. 사회와 문화 그리고 교육의 연계성에 대해 집중적인 강의가 이루어졌는데, 흥미롭게도 영국에서 지낼 때 느꼈던 사회계층에 따른 교육수준의 문제를 심도 있게 조명하는 내용이라서 관심이 생겼다. 마침 친숙한 주제이기도 해서, 라희는 교수님이 넘기는 PPT 화면에 집중했다.

그렇게 첫 교시가 끝나고, 두 번째 교시를 시작하기에 앞서 주어진 5분간의 쉬는 시간이었다. 수업 중 무음으로 변경하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휴대전화 화면이 환히 밝아지더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보낸 사람은 0이라고 표시되어 있었기에, 고개를 갸웃하며 화면을 눌러 문자를 확인했다.

[종로구청 가족관계등록팀: 귀하가 제출하신 혼인신고서가 처리되었습니다.]

사무적인 딱딱한 문장. 간결한 딱 한 줄이었지만, 라희는 못 박은 듯 시선을 고정하고서 한동안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문자. 드디어 바흐와 법적인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행정 당국의 공식 메시지.

봤던 문자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2교시 수업이 시작되었음에도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강의를 듣는 도중 슬그머니 눈을 내려 책상 위 교재 바로 옆에 놓아둔 휴대폰 화면을 눌러 몇 번이고 들여다봤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수시로 휴대폰 문자를 힐끔 살피며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강의실 칠판을 바라보았다. 슬며시 저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입가의 미소는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학생 식당에서 간단한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불어오는 창가 자리에 홀로 앉았다. 이제 여름이 한창이라 그런지, 전처럼 한적한 캠퍼스 벤치에 걸터앉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점심 먹기에는 슬쩍 겁나는 더운 날씨다.

아삭아삭한 양상추와 신선한 오이가 얇게 슬라이스 되어 갈색 호밀빵 사이에 끼워진 도톰한 햄 치즈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입에 물고서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빨대로 쪽 빨아들여 입안 가득 뻑뻑한 빵의 가장자리를 녹여 적시고 있을 때였다.

-띠링

수업 중도 아니라서 무음이 아닌 벨로 돌려놓은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라희는 빨대를 입에 물고서 문자를 확인했다.

[은행 방문해서 이체 한도 설정 다시 해.]

바흐로부터 도착한 문자. 라희는 입안 물고 있던 빨대를 쪽 빨아들이며 눈을 깜빡였다. 이체 한도 설정? 갑자기 왜 이런 문자를 보낸 걸까.

라희는 학생 회관 1층 구석에 있는 K 은행을 떠올렸다. 지금 가지고 있는 두 개의 통장은 전부 K 은행 통장이다. 대학 입학 시 학생 카드와 연계된다는 말에 신청한 통장 하나와 나중에 따로 돈을 넣어두려고 만든 통장. 이렇게 두 개. 그 중 학생증과 결합된 원래 통장을 바흐와 계약할 때 사용했었다. 유진에게 바흐와 결별의 대가로 이체받은 1억도 그 통장에 입금되었었다. 바흐가 문자 상으로 언급한 통장은 학생증 통장이 분명했다.

'이체 한도?'

이제까지 한 번도 신경을 써 본적 없었다. 대학생의 소지금이란 뻔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큰돈을 이체할 일이 아직까지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그간 라희가 목돈을 이체할 일이라고는 고작 원룸 얻을 때 방 보증금 정도였으니까. 그것도 통장 거래가 아닌, 수표로 뽑아서 집주인에게 건넸기 때문에 실지 이체 한도가 얼마인지도 잘 몰랐다.

쪼르르. 손에 들린 플라스틱 컵의 커피는 전부 마셔서 사라지고 이제 얼음만 남아 빨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샌드위치를 입안에 욱여넣은 라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은행으로 향했다.

계절학기 기간이고, 점심시간이라서 그런지 은행 안은 한산했다. 기껏해야 은행 내부 ATM을 이용하는 학생 한둘 뿐, 창구 앞은 아무도 없었다. 은행 안으로 들어가 눈을 들어 통장거래 코너를 쓱 바라보자, 바로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번호표 뽑을 필요도 없이 직원의 상냥한 눈짓에 따라 창구 앞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중년의 은행 여직원은 사무적인 미소를 띠고서 물었다.

"저어, 이체 한도 설정을 변경하려고요. 그런데 기존의 설정 금액을 몰라서요."

"이체 한도 말씀이십니까. 잠시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신분증을 주시겠어요?"

지갑에서 꺼낸 신분증을 받아든 직원이 모니터를 바라보며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1회 백만 원, 1일 500만 원으로 설정되어 있으시네요. 증액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감액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어, 그게."

은행에 들어오자마자 직원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얼떨결에 데스크에 앉게 되어 통장잔액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7백 얼마 남아 있었던 거 같은데. 라희는 잠시 눈매를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이체 한도를 설정하라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은행에 오긴 했으니, 증액 쪽이기는 할 텐데. 대관절 증액이 왜 필요하다는 말인가. 혹시, 바흐가 돈을 보낸 걸까. 거기에 생각이 다다른 라희는 직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기, 정확한 통장 잔액이 얼마인지 알 수 있을까요."

라희의 말을 들은 직원은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렸다. 그러다가,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갸웃한 직원은 라희의 얼굴을 슬쩍 보며 입을 열었다.

"6억 7백 29만 원입니다."

6억? 엄청나게 큰돈이다. 금전거래에 익숙한 은행 직원이 잠시 의아한 얼굴로 학생인 라희를 향해 눈길을 던질 만도 했다.

"네? 그럴 리가요. 분명히 7백 얼마 있었는데."

라희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행 직원을 바라보자, 직원은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전 11시에 6억이 입금되었네요."

보낸 사람은 물어보나 마나였다. 바흐. 대체 왜 6억이라는 거금을 이체했단 말인가. 라희가 잠시 할 말을 잃고서 미간을 좁히고 있자, 그런 라희를 슬쩍 본 직원은 사무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체 한도를 얼마로 변경하시길 원하십니까."

"…. 얼마까지, 되는데요?"

"보안 등급에 따라, 다르지만 OTP 카드발급 시, 1회 1억 원, 1일 5억까지 변경 가능합니다. OTP는 유료로 발급되며 발급 비용은 5천 원입니다."

"잠시만요."

창구에서 일어선 라희는 휴대폰을 들고 은행 구석으로 향했다. 정수기가 설치된 아무도 없는 코너에 다다르자, 손에 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망설였다.

어렴풋이 듣기로는, 바흐가 일하는 장 중일 때, 그러니까 거래소 개장시간일 때는 틱이라는 건당 거래 단위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했다. 일단 한국거래소 마감 시간은 3시 정도. 지금 전화를 걸면, 업무 중에 방해가 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심호흡을 크게 들이마신 라희는 통화 버튼을 길게 눌렀다. 곧 신호음이 몇 번 흐르고, 건너편에서 전화를 받았다.

"부인?"

나직이 묻는 목소리. 라희는 그가 말한 부인, 이라는 말을 들으며 기분 좋은 설렘으로 슬며시 입가를 올리다가 이내 용건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저기, 문자 받고 지금 은행에 왔는데요, 이 돈은 뭐에요?"

"아."

"금액이 너무 크고 또, 무슨 돈인지 몰라서.."

휴대폰 너머, 얕은 숨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피식, 가볍게 웃는 듯한.

"나의 부인께서는 무자료 거래나, 근거 혹은 출처가 불분명한 금전거래를 기피하시는 거 같아서 말이지."

"네?"

라희가 되묻자 그가 답했다.

"대한민국에서, 국가가 배우자로서 받아도 합당하다고 인정한 정당한 돈이야."

"네에?"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로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대관절 무슨 소리란 말인가.

"상속세및증여세법에 제53조에 의해서, 배우자로부터 10년 내 6억 원까지는 과세 없이 합법적으로 증여 가능하거든."

"…. 무슨 뜻이죠?"

들을수록 이상한 말이었다.

"음. 세법상, 오전에 입금한 액수는 국가가 배우자로서 응당 받아도 된다고 인정한 떳떳한 돈이란 뜻이지. 즉, 합법적인 부인 명의의 소유야. 그러니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해."

"……."

머리가 멍했다. 설마, 이것 때문에 혼인신고를 서두른 걸까. 그때, 전화기 건너에서 사장님, 이라고 부르는 말소리가 들렸다.

"일단 주말이 되기 전 이체 한도를 변경하도록 하고. 지금, 업무 중이라."

바흐가 조금 서두르는 듯한 빠른 어투로 말했다.

"아... 죄송해요."

라희가 급히 중얼거리자 그가 안심하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그럼 퇴근 후에 보지."

바스락, 바스락 서류나 책장이 빠르게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네."

짧은 대답을 끝으로, 전화가 뚝 끊겼다. 라희는 정적이 흐르는 휴대폰을 한참이나 귀에 대고 서 있었다. 방금 통화한 내용 정리를 해보자면, 6억은 법적인 배우자가 증여받을 수 있는 최대 한도액이고 그래서 입금했다는 거였다. 그것도, 주말에 앞서 이체 한도를 변경하라는 말과 함께. 그 말의 뜻은, 증여받은 6억을 누군가에게 이체할 거라는 가정을 했다는 것인데. 그것도 주말 동안에. 결론은 하나였다.

충주 본가, 즉 친정에 쓰라는 의도로 건네진 돈이다.

처음, 금전 거래가 오간 계약관계로 그와 엮이게 된 만큼 그간 라희는 바흐로부터 돈을 받는 일을 극도로 꺼려왔다. 계약기간 동안 국내에서 건네진 돈은 그대로 다른 통장에 입금해 두었고, 뉴욕에서 쓰라고 받았던 용돈은 고스란히 금액을 맞춰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귀국했다. 그래서일까.

'배우자로서 합법적인 소유.'

심경이 복잡해졌다. 지난 일요일 청계천에서 오빠와 맞닥뜨린 이후, 평창동 집에 도착해 작년에 있었던 일의 계기를 오빠라고 실토했었다. 급전이 필요했던 이유. 급히 뛰어나가 타인에게 손 벌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집안에서 감당하기 힘든 액수였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이 귀농한 사과과수원은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으니까.

주말에 바흐와 함께 충주로 내려가 인사드리기에 앞서, 배우자로서 받아도 된다는 큰돈을 건네면서 마음대로 쓰라고 했던 말의 숨을 뜻은 이 돈으로 집안의 빚을 해결해도 된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이체 한도를 변경하라고 했던 거다. 부모님께 건네 가계 빚을 해결하라는 의미.

눈매를 좁히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라희는 왔던 길을 되돌아 창구 쪽으로 걸어갔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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