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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에필로그 12
라희는 가방에 짐을 챙겨 나와 도서관 앞에 대기 중인 바흐의 차에 올라탔다.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 들어가서 책을 펼치자마자 엄마에게 전화가 와서 마음을 들쑤셔놓더니, 이젠 바흐까지 불러내다니. 오늘은 공부하기 그른 날인가 싶었다.
뒷좌석에 앉아 라희를 맞이하는 바흐는 일하다 나왔는지, 조금 지친듯한 표정이었다. 자리에 앉은 라희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피곤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어젯밤, 말한 거."
그가 깊은 눈으로 라희를 응시했다. 라희는 눈을 깜빡여 무슨 말인가 생각하다가 바흐의 시선이 왼손가락 위 반지에 머무르는 것을 발견하자 이내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라희가 언급한 결혼 하려면, 충주집에 가야 한다는 말을 뜻하는 듯했다.
"결혼이요?"
긍정. 그는 손가락을 세워 손끝으로 짙은 눈썹과 움푹 들어간 눈가를 꾹꾹 누르며 생각할 말을 골랐다. 미미하게 좁혀지는 눈썹 사이를 손끝으로 눌러 펴던 그가 입을 열었다.
"……. 확고한 건가."
나직한 물음을 듣던 라희는 바로 대답했다.
"네. 그럼요. 게다가, 제가 먼저 청혼했잖아요?"
슬쩍 입매를 올리는 라희를 보며 그가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이며 옅게 미소 지었다.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는 미소였다.
"그래, 그랬지."
"오늘은 어디로 가나요?"
목적지를 묻는 라희를 향해 그는 대답 대신 오른손을 뻗어 작은 왼손을 잡았다. 은색 링이 끼워진 큰 손바닥 안에 반지 낀 손이 수줍게 쏘옥 들어갔다.
"음."
잡은 손을 낮은 눈길로 내려다보던 그가 시선을 곧게 마주하고서 입을 열었다.
"두 군데. 동사무소, 그리고 구청."
관공서? 라희가 궁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잡은 손을 힘주어 꾹 누르듯 단단히 쥐고서 부드럽게 말했다.
"일단 동사무소는 전입신고 때문이야."
하긴, 기숙사를 퇴관하고 평창동에 머무르고 있으니 주소지를 정리해야 했다. 생각지도 못한 세심한 배려에 라희가 입매를 올리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니 바흐가 고개를 들어 운전석을 향해 지시했다.
"김 기사, 평창동 주민센터로."
***
평창동 주민센터에 비치된 서류에 쓱쓱 몇글자를 적어내기만 하는 전입신고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신고인란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그리고 연락처를 쓰고 바로 옆에 칸에 기재된 세대주와의 관계에서 잠시 망설이고 있자, 옆에서 지켜보던 바흐가 슬그머니 라희 손에 쥔 볼펜을 뽑아들어 아내라고 적었다. 그 밑 전입지 항목란은 세대주인 그가 단정한 글씨체로 또박또박 적어 내려갔다. 전입 사유에는 가족이라고 동그라미를 쳤다.
전출지를 적고 나서 맨 아랫단 전입자 인적사항까지 전부 적어 내고서 신청서를 민원 데스크에 제출하니 주민센터 직원은 라희의 주민등록증을 요구했다.
핸드백에서 꺼낸 주민등록증을 카운터에 내밀자, 직원은 조용히 받아들고서 능숙한 동작으로 뒷면에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이라고 인쇄된 투명 스티커를 붙이고 그 뒤에 바흐의 집 주소를 기재해 주었다. 순식간에 전입신고가 완료되었다.
바흐의 요청에 따라 라희는 새 주소지가 적힌 주민증을 내밀어 가족관계증명서 한 부를 신청했다. 그러고 나서 그와 똑같은 집 주소가 적힌 주민증 뒷면을 연신 들여다보며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서 있는데, 옆에서 그런 라희의 모습을 옅은 미소를 띠고서 잠시 가만 바라보던 눈길이 느껴졌다. 이내, 허리에 팔을 감싸 두른 그가 라희를 주민센터 밖으로 이끌었다.
"아직 한 군데, 더 남아있어."
구청. 라희는 그를 올려다보며 부드럽게 입매를 올렸다. 오늘 오후, 그의 차에 올라탈 때만 해도 동사무소는 주소 때문에 가는 거라고 납득을 했는데 구청은 대관절 무엇 때문에 가는 것인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동사무소에서 전입신고를 마치고 나온 지금은 대충 의도가 짐작 갔다. 차에 탔을 때, 확고한 거냐고 나직하게 물었던 바흐의 질문이 어렴풋한 짐작에 강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평창동 주민센터를 빠져나온 차는 언덕길을 내려와 광화문을 지났다. 경복궁 사거리에서 골목으로 빠져 주한미국 대사관을 지나 마침내 종로구청에 다다랐다. 대학교에서부터 평창동 주민센터, 그리고 종로구청까지 이동하는데 시간을 빼앗겨서인지 구청 업무 종료시각인 6시까지 약 삼십여 분 남짓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바흐는 동사무소에서 가져온 가족관계증명서와 서류가방에서 꺼낸 종이 두 장을 들고서 구청 입구 쪽을 눈짓했다. 구청에 들어가 민원 번호표를 뽑은 그는 직원의 안내를 받고 담당 데스크로 이동해 라희를 향해 손에 들고 있던 문서 중 한 장을 내밀었다.
[혼인신고서]
구청 민원실에 발을 디디면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막상 문서 맨 윗단에 적힌 글자가 또렷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마음 한구석 쏟아져내리는 분홍빛 꽃 비 같은 달콤한 두근거림이, 가볍게 발아래가 들려 몸이 위로 붕 뜬듯한 떨림이 기분 좋게 가슴을 울렸다.
"정말로 후회 없다면, 작성해 주겠어?"
반지로 언약한 것이 아닌, 국가가 인정한 법률로 그의 곁에서 합법적인 배우자로서 함께할 수 있다는데 후회가 있을 리가.
"네."
라희는 입술을 슬쩍 짓깨물며 떨리는 마음으로 손에 들린 서류를 훑었다.
민원실 서류함에 비치된 종이가 아닌, 사무실에서 미리 인터넷으로 출력해 작성했는지 깔끔하게 기재사항이 인쇄된 상태였다. 거의 모든 칸에 빼곡한 글자가 쓰여 있었다. 듬성듬성, '아내(처)'라고 적힌 칸들만 공란이었다.
"이걸 보고, 마저 빈칸을 채워 기재하면 돼."
바흐가 두근거림으로 얼굴을 약간 붉히고 서 있는 라희에게 내민 것은, 좀 전 주민센터에서 뽑아온 라희의 가족관계증명서였다. 혼인 신고서에는 본인의 등록기준지, 부모님 주민등록번호와 등록기준지의 작성이 필요했다. 이 모든 정보는 가족관계 증명서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라희는 가족관계 증명서에 적혀있는 사항을 일일이 확인해서 그대로 혼인신고서에 옮겨적었다.
해당란의 빈칸을 다 메우고 나서, 아래를 훑어보니 또 다른 빈칸이 보였다. 먼저 성, 본의 협의 사항란.
[자녀의 성본을 모의 성본으로 하는 합의를 하였습니까]
자녀라는 단어를 보니, 정말로 결혼이라는 것이 현실로 다가온 듯한 기분이었다. 바흐를 닮은 자녀. 어떤 모습일까. 주변에서 주워듣기로 아이 성별이 딸이면, 아빠를 빼닮는다던데. 자기도 모르게 슬쩍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머릿속으로 핑크빛 망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라희가 슬며시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바흐는 눈썹을 조금 들어 올려 서류를 내려다보더니 짓궂게 입매를 씨익 올렸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성이 송 씨이기를 바라?"
라희는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바흐는 데스크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볼펜을 하나 집어 들어 아니오에 표시했다.
그 아래 칸은 증인란이었다. 임의옥, 이선희라고 이름과 서명이 적혀있고 주민등록번호로 보아, 임 여사와 그 딸 같았다.
마지막, 동의자 란에 아내 쪽 빈칸이 보였다. 라희가 마저 이름을 적고 나자 혼인신고서의 모든 필수 기재사항이 빽빽이 채워졌다.
맨 아래쪽에는 따로 표가 보였는데, 혼인 신고와는 관련 없지만, 국가 인구정책 통계를 위한 질문지였다. 첫 번째는 실제 결혼 생활 시작일을 묻고 있었다. 라희는 오늘 날짜를 적었다. 국적은 둘 다 한국인, 혼인의 종류는 초혼. 최종 졸업학교에는 대학교, 직업에서 그를 올려다보니 바흐가 볼펜을 굴려 남편은 자영업, 아내는 학생이라 기재했다.
구청 담당 직원을 향해 모든 내용이 전부 기재된 혼인 신고서 한 장, 그리고 각자의 가족관계 증명서와 신분증을 제출하고 나니 직원은 서류를 받아 컴퓨터에 입력하고 두꺼운 대장에 수기로 기록하면서 처리했다.
잠시 후, 일을 마친 직원은 종로구청장 직인이 찍힌 접수증을 건네주었다. 직원은 접수번호와 일자, 그리고 사건명 '혼인신고'가 기재된 접수증 한 장을 두 사람에게 건네주면서 사무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혼인신고는 오늘 자로 수리했고 최종 전산처리는 빠르면 이틀, 길면 일주일이 소요됩니다. 처리결과는 서류에 기재하신 문자로 통보드리니 그때 확인하시면 됩니다."
직원은 건조한 표정으로 입매만 조금 끌어올렸다.
"혼인을 축하드립니다. 그럼."
말을 마치고서 바로 시계를 확인하는 직원을 보니 더는 귀찮게 하지 말라는 표현으로 들렸다. 공무원다운 형식적인 응대였지만, 축하한다는 말을 들은 가슴은 두근거리며 설렜고 마음 한쪽 구석이 간질간질거렸다.
종로구청 민원실을 벗어나 한참을 기분 좋은 설렘을 만끽하던 라희의 뇌리에 불현듯 의문이 피어났다. 잔뜩 올라갔던 입매가 서서히 내려가면서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핑크빛 두근거림이 잦아들면서 지극히 현실적인 자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혼인 신고는 보통, 결혼식 이후에 신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을까.'
라희는 접수증을 들여다보던 눈을 들어 동그랗게 뜨고 바흐를 올려다보았다.
"저......"
바흐는 손을 뻗어 작은 어깨를 보드랍게 감싸면서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가만 라희를 내려다 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식전에 미리 신청할 필요는 없지 않아요? 시간은 충분한데."
"막상 법적으로 기혼이 되어버리니, 미련이 생긴 건가?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는데. 혼인 신고는 당일 처리되지 않으니까."
뒤쪽 민원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짐짓 꾸민듯한 심각한 표정. 명백히 놀리는 말투였다.
"아니에요. 그런 거."
라희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작게 소리치자 깊은 눈매를 곱게 휜 그가 입술을 올리며 빙글 웃었다.
"문자가 오면, 알게 될 거야."
턱을 가볍게 감싸 쥐고 고개 숙여 짧게 키스한 그가, 멍하게 풀린 눈의 라희를 깊게 바라보면서 허리를 감싸 두르며 단정한 입술을 열었다.
"이제 집으로 가실까요. 부인."
부인, 이라는 나직한 울림이 마음 깊은 곳으로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살랑 다가와 포근하게 몸을 감싸고 돌았다. 그저 평이한 단어일 뿐인 부인이라는 말이 이렇게 감미롭게 귓가에 감겨와 달콤하게 내려앉을 줄이야. 발그레 뺨을 붉힌 라희는 설레는 미소로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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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