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88화 (188/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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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에필로그 11

다시 평창동 집. 바흐의 방이다. 오빠와 미현을 만나고 나서, 종로 5가서부터 광화문 근처의 청계 광장까지 걸으려 계획했던 데이트는 흐지부지되어버렸다. 아무래도 둘을 맞닥뜨리기 전처럼 간질간질한 들뜬 기분으로 산책할 기운이 나지 않았다. 젖은 모래처럼 기분이 착 가라앉아 머리가 무거웠다.

"자."

바흐는 소파에 가만 앉아있는 라희를 향해 임 여사가 올려다 준 시원한 레몬 꿀차가 담긴 유리잔을 건넸다.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목이 탔던 라희는 그가 건네준 유리잔을 받아들었다. 평창동 집에서 맛보는 모든 음식과 마찬가지로, 집에서 손수 담근 레몬 꿀차다. 유백색의 투명한 각 얼음물 위에 동동 뜬 모양새부터가 아주 상큼했다.

안에 박힌 레몬 씨를 일일이 다 발라내고, 칼로 잘게 채를 썰었는지 단면이 날카로운 레몬은 겉껍질이 샛노랗고 속살은 새하얀색으로 색감의 선명한 대조를 보였다. 한 모금 기울여 마시니 달짝지근한 맛과 함께 풍기는 은은한 벌꿀 향이 향긋하게 혀에 착 감기면서 목구멍으로 시원하게 넘어갔다. 달달하고 청량한 레몬차를 마시니 멍했던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다.

"어머님과 껄끄럽다고 했던 거 같은데."

바흐가 말했다. 괜찮겠냐는 눈짓. 충주 집에 방문한다는 이야기다. 라희는 내리뜬 눈으로 왼손 위에 반짝이는 반지를 바라다보며 입을 열었다.

"결혼, 하려면."

스스로가 꺼내놓고도 결혼이라는 단어는 멋쩍었다. 바흐와 청혼하고, 청혼받은 사실이 아직도 꿈만 같아서 실감 나지 않으니까.

"……. 만나기는 해야 할 테니까요."

라희는 손바닥으로 물기 가득한 유리잔을 감싸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오빠와는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그런 데다가, 지난번 일도 있었고요. 작년에…."

라희는 말꼬리를 흐렸다. 바흐와 계약하게 된 계기는 오빠다. 정확히는 오빠가 낸 사고. 일 년 전, 계약서를 작성할 당시 그는 돈이 필요한 이유 같은 것을 묻지 않았다. 그저 라희가 필요 금액을 말하자 알겠다고만 했었다.

"그 이야기지."

바흐가 먼저 말로 정해주어서 수월했다. 라희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네. 오빠 때문이었어요."

라희는 말을 하면서도 어쩐지 이상한 느낌을 떨치지 못했다. 한 번도, 오빠 사고에 관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는데 지난 영국에서 윌버리 하우스에서 김 기사에게 전화 걸어 해명한 것도 그렇고, 어떻게 그는 상세히 알고 있는까. 혹시 집 앞을 감시하던 검은색 에쿠스? 뿔테가 언급했던 에쿠스가 라희를 조사했다면, 말이 된다.

"저, 혹시."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유리잔을 기울이고 있는 바흐를 향해 라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 에쿠스요. 검은색."

라희가 말하자마자, 그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맞아."

"뭐가요?"

"내 쪽에서 붙인 거 맞다고."

바흐가 붙여둔 감시가 맞다는 것을 간단히 긍정해버리자,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라희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높게 물었다.

"왜요?"

알아야 했다. 왜, 대체 감시를 붙여놨는지. 그것도 말없이 은밀히.

"궁금했으니까."

바흐는 라희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새카만 눈동자가 곧게 쏘아져 박혔다.

"네 모든 것이.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곧은 눈길 속에서 똑똑히 답을 들은 라희는 눈을 아래로 재빨리 내리굴렸다. 깊고 검은 눈빛에 갇혀 그런 말을 듣자 갑자기 얼굴 위로 열기가 확 피어올랐다.

이상하지. 뿔테가 지적해 주었음에도 그간 자포자기 심정으로 무감각하게 넘어갔던 사실이고, 또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랬더라면 무척이나 불쾌했을 법한 일인데도 바흐가 솔직히 인정한 말을 듣고 있으려니, 가슴이 두근두근 뛰면서 얼굴 위로 열기가 뻗쳐올랐다.

그때, 턱을 가볍게 받쳐 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래로 향했던 눈빛이 순간 위로 들렸다. 시선을 마주한 바흐가 보였다. 어느 틈에 다가와 라희 앞에 멈춰 서 있는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우고서 위로 고개를 든 라희를 내려다 보았다.

좁은 턱을 받친 엄지 끝이 부드럽게 피부를 쓸었다. 천천히 움직이던 엄지손가락은 이내 입술 위로 올라와 분홍빛 입술의 윤곽을 가만 쓰다듬었다. 입술에 닿는 느릿한 손길이 찌르르한 열기를 피워냈다.

"보기보다, 내가."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내, 라희의 귓가에 뜨끈한 숨결이 닿았다.

"조금 음험하거든."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 그리고 바로, 귀에 느껴지는 짧은 입맞춤. 쪽, 소리가 귓속으로 달콤하게 스민다.

"……. 그냥 보기에도 많이 그렇거든요."

라희는 입술을 달싹여 중얼거렸다. 그러자 피식, 가벼운 웃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곁눈질로 보이는 곱게 휘어진 눈매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떨리게 했다.

라희는 슬쩍 혀끝을 내밀어 입술 위에 얹은 그의 엄지손가락 끝을 핥아냈다. 그러자 바흐는 그대로 라희를 감싸 안아 일으켜 침대로 이끌었다. 허리를 안은 채로 뒤로 누운 그의 위에 겹치듯 껴안긴 라희를 향해, 그가 말했다.

"많이 음험한 남편을 다스리는 아내로서 조금 엄한 행위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

라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바흐는 입꼬리를 가볍게 올리며 그를 굽어보느라 아래로 휘어진 등줄기를 나릿하게 쓸어내리다가 엉덩이를 둥글게 감싸 쥐어 하체를 밀착시켰다. 자연스레 그의 허벅지 옆을 짚고 선 무릎이 조금 위로 쏠리면서 엉덩이 안쪽으로 맞닿은 접점에는 단단해진 살덩이가 길게 누운 윤곽이 느껴졌다.

"따끔하게, 조여 준다든가 말이지."

라희가 그를 가늘어진 눈으로 흘겨보자, 깊은 눈매가 가까이 마주해왔다. 고개를 든 바흐의 따스한 입술이 가볍게 와 닿았다.

"아찔하게 정신을 차리도록 해주어도 좋고."

입술을 뗀 그가 눈을 아래로 내려 어깨를 세우고 아래를 향한 자세 때문에 자연스레 모인 깊은 가슴골 쪽을 눈짓했다.

-툭

어느새 위에 걸친 옷 틈으로 파고들어 온 손길이 등 한가운데 가로로 걸려있던 브래지어 버클을 풀어냈다. 그리고 양손으로 엉덩이를 감싸 위쪽으로 누르듯 밀착시키면서 단단히 감싸있다가 느슨하게 풀린 두 젖가슴 새로 내뿜어진 뜨거운 숨결이 닿고, 이내 그가 얼굴을 들어 깊게 파묻었다.

***

월요일이 되자, 다시 한 주가 시작되었다. 월요일부터 방안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되는 거라서, 라희는 2층에 내내 비워져 있던 세 번째 방에서 바흐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2층의 방은 총 4개로, 첫 번째 방은, 바흐가 사용하던 방이었고 두 번째 방은 라희가 쓰려 했던 방이다. 이번에 리모델링으로 두 방이 하나가 되는 공사에 들어갔다. 세 번째 방은 다른 방과 같은 구조로 크기만 조금 작았다. 원래는 바흐의 방이었다고 들었는데, 남아있는 추억의 물건도 하나 없이 그저 기본적인 가구만 갖춰져 있고 무미건조했다.

마지막 네 번째 방은 구석방으로 원래는 하프시코드와 피아노가 놓여있던 방이었는데 지금은 하프시코드는 바흐의 방으로 옮겼고, 피아노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방음실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조금 쌀랑한 느낌이 들어서, 휙 눈으로만 훑어보고서 방문을 닫아버렸다.

라희 일과는 월요일을 제하고 일주일 내내 비슷했다. 새벽에 일찍 출근한 바흐가 보낸 김 기사의 차를 타고서 학교에 도착해 9시부터 3시까지 수업을 내리 듣다가 일이 없으면 도서관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과제와 그날 필기한 강의노트를 정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저녁 시간이 되면 바흐가 퇴근하면서 대학교에 들러 도서관에 있던 라희를 데리고 평창동으로 향했다. 리모델링 공사는 9시부터 6시까지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집에 들어갈 때쯤이면, 시끄러운 작업 소리도 바삐 움직이는 인부들도 없이 평상시처럼 조용했다. 1층 식당에서 임여사 모녀가 차려준 저녁을 먹고 나서 위층 세 번째 방으로 올라가 늦은 시간까지 서로에게 안겨있다가 잠이 들었다.

바흐와 재회한 이후 하루하루가 평온했고, 따뜻했고, 아늑했다. 단 한 가지, 주말에 충주집에 들르는 일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 외에는 하루하루가 안온히 흘렀다.

주말 저녁 라희와 만난 일을 두 사람 중 누군가에게 듣기라도 했는지, 월요일이 오후가 되자 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마지막 만났을 때 먼저 연락할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까맣게 잊어버렸는지 라희가 도서관 안에서 무음으로 해놓은 전화기는 한참이나 빛을 깜빡거리다가 끊어지고, 다시 빛을 깜빡였다.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 잠시 후 문자가 도착했다.

[결혼은 무슨 소리니?]

미간을 찡그리며 글자를 읽어내린 라희는 쥐고 있던 볼펜을 교육학 개론 책갈피에 끼워놓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열람실 밖으로 향했다. 자판기가 주륵 세워져 있고 의자에 앉아 모여 이야기하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휴게실에 이르자, 통화버튼을 길게 눌렀다.

"라희니?"

신호가 두 번 울리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은 엄마가 대뜸 물어왔다.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결혼 이야기는 또 뭐고."

"그건 또 누가 말했는데."

라희가 뾰족하게 묻자, 전화기 건너편에서 엄마의 말소리가 뚝 끊겼다. 그때 불현듯, 지난번 김미현이 한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요. 아가씨, 이분 그냥 남자친구 아니었어요? 어제 전화통화 했을 때 어머님께서 따로 말씀 안 하셨는데요.

물어보나 마나였다. 김미현이 엄마와 통화한다고 실토했었으니까.

"김미현이 뭐래, 엄마."

라희가 콕 찍어 말하자, 휴대폰에서는 정적이 흘렀다. 엄마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네가 결혼을 할 거라고 했다더구나. 이번 주말에 인사하러 올 거라는데, 진짜니?"

"어. 주말에 갈 거야. 오빠네도 온 대?"

"그렇다고 하더라. 이번에 미현이도 네 아버지에게 보여줄 겸 해서 데리고 올거라던데......"

미현이도, 라고 말하며 궁금한 것이 있는지, 엄마가 말끝을 길게 흐렸다. 다시 오빠 커플을 마주할 것을 생각하니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김미현이 만나봤으니 먼저 상세히 말했놨을 거 같은데."

"미현이야, 네 걱정이지. 허우대 멀쩡한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남자와 결혼한다고 전하더라. 나이차도 많이 난다고. 라현이 보다도 위라며. 거기다 직업은 회사원인데 다니는 회사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걸로 봐서 대기업은 아닌 거 같다고."

김미현은 이미 엄마에게 편견을 잔뜩 심어 놓았었다. 라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숨을 길게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말할 필요 없이, 그냥 주말에 확인해. 어떤 사람인지는 실제로 만나봐야 알 수 있으니까."

"토요일에 오는 거니?"

"응. 그때 봐. 엄마."

라희는 그 대답을 끝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엄마와 전화통화로 뒤숭숭한 마음을 달래고 있을 때였다. 손에 쥔 휴대폰에 빛이 반짝여서 확인해 봤더니 바흐로부터 문자가 도착해있었다.

[오늘 함께 갈 데가 있어.]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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