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87화 (187/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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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에필로그 10

라희는 눈을 똑바로 뜨고 미현을 직시했다.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놀리듯 라희를 바라보는 미현의 얼굴 위에는 바로 앞에 던진 질문의 의미가 드러나 있었다. 지난번 만난 자리에서 의사와 헤어졌다고 명료하게 말했던 것을 들었음에도 일부러, 지금 라희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의사쌤이냐고 물으면서, 그것도 라희의 전 남자친구였다는 사족까지 붙여서 굳이 언급했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담긴 뜻은, 짐짓 놀람으로 포장한 적개심.

지난 한정식집에서 마주한 첫 만남의 후기가 불유쾌했다는 것을 반증하기라도 하려는 듯, 미현이 흘리는 눈빛은 희미한 적의를 풍겼다. 그나마 그럴 만도 하다 느낀 점은 있었다. 라희 입장에서는 순전히 모든 것을 망치고도 뻔뻔한 당사자 라현을 향한 불쾌감의 표출했던 자리였으니 만큼, 오빠와 함께 지낸다는 미현에게도 마찬가지의 감정이 비쳤을 테니까.

라희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린 채로 일이 어찌 흘러갈지 재미있게 지켜보겠다는 얼굴의 미현을 한동안 매섭게 쏘아보다가, 고개를 위로 들어 옆에 우뚝 서 있는 바흐의 안색을 살폈다. 반지와 함께 청혼을 주고받았지만, 과거 뿔테와의 일을 낱낱이 발설해 개운히 해명한 것은 아니어서, 방금 들은 말이 괜한 오해를 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덜컥 들었다.

"...."

긴장으로 숨죽인 채 올려다보는 라희의 시선을 받은 바흐는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눈을 낮게 아래로 내려 라희더러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정식으로 소개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라희는 그 눈짓을 받은 순간, 어쩐지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앞서 라현과 미현이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면서 관계를 암시하는 몇몇 주요 단어를 흘리기는 했지만, 어쩐지 이 두 사람과 라희의 관계를 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오빠에요. 여기는, 올케 될 분이시고요.”

라희가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작게 열자, 맞은 편 미현이 기다렸다는 듯 밝게 외쳤다.

“김미현이에요. 여기 우리 오빠는 송라현이고요. 미현, 라현. 끝자가 같아서 입에 착착 감기죠? 딱 이름만 들어도 천생연분 같지 않아요?”

눈웃음 짓을 살살하며 말을 건네는 미현의 시선을 깨끗이 무시한 바흐가 그 옆에 서 있는 라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한진욱입니다.”

얼떨결에 불쑥 내밀어 진 손을 잡고 악수한 라현이 눈매를 찡그리며 키가 큰 바흐를 올려다보았다. 라현의 키는 175로 평범한 축이었고, 바흐는 185 정도였는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려니 남자 키는 이상하게도 180이 넘어가는 순간 단순히 물리적인 높이 차이와는 좀 더 다른 생물학적 격차가 존재했다. 때문에 라현과 바흐는 고작 실제 10센티 차이인데도 덩치 차이가 있어 보였다.

“우리 라희와는 무슨 관계십니까? 혹시, 남자친구십니까?”

라현은 두 사람의 손등에 걸린 은색 반지를 힐끔거리며 처음 보는 바흐를 향해 조금 예의를 차린 말투로 물었다. 그러자 옆에서 미현이 호들갑스럽게 덧붙였다.

“어머, 아가씨. 지난번 의사분과 사귀었잖아요. 이번 분도 직업이 의사신가요?”

이로써 확실해졌다. 대학졸업 후 카페 아르바이트를 했었다는 미현이 아이큐테스트도 통과 못 할 눈치로 사회생활을 했을 리는 만무했고, 이는 우회적인 공격이었다. 현 남자친구 앞에서 과거 남자친구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꺼내 예비 시누가 될 라희의 품위와 평판을 훼손하려는.

바흐는 자신을 탐색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묻는 둘을 향해 작게 고개를 내 저어 부정했다.

“아니요. 의사가 아닌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아, 어쩐지. 의사치고는 너무 잘생기셔서. 그쪽은 아닐 거로 생각했었어요. 공부만 하기에는 아까운 얼굴이라서요. 그나저나.”

미현이 입매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아가씨,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능력 좋네요? 지난번 만났을 때 남친 있었다는 이야기 언뜻 들었는데 이렇게 또 남자친구 휙휙 갈아치우는 것을 보니까요.”

듣고 있자니, 가관이었다. 아무리 사람이 밉기로서니,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할 말, 안 할 말이 있을 텐데. 화가 치밀어 오른 라희가 입을 열었다.

“김미현 씨. 말 좀 똑바로 가려 하시죠.”

라희는 날을 잔뜩 세운 어조로 미현의 이름을 성과 이름을 함께 부르며 말했다. 그러자 딴에는 기분 나쁜지, 지적을 받은 미현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연인의 분위기를 살피던 라현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올케 될 사람에게 김미현 씨가 뭐야? 본데없이. 나이도 너보다 두 살이나 많은데. 새언니라고 호칭 공손히 불러. 그리고 네 새언니가 어디 틀린 말 한 거 있어? 작년인가 사귀었잖아. 그 의사, 내가 통화까지 했고만.”

뿔테 이야기였다. 제멋대로 엄마에게서 전화번호를 알아내 오빠와 통화까지 했다니. 뿔테가 저지른 일방적인 행동을 들을수록 기가 막혔다. 거기다, 그 통화와 더불어 충주 집까지 찾아왔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라현은 뿔테가 남자친구라고 단정한 모양이었다.

물론, 애매모호한 태도로 빌미를 제공한 잘못을 하기는 했지만, 정도를 넘어선 뿔테의 행위로 의도치 않은 의혹과 오해가 주변으로 쌓이고 쌓여서 그간 마음은 멍 투성이었고 정신은 갈기갈기 찢어져 상처 났었다. 뉴욕에서 정리했다고 생각한 뿔테의 잔흔이 아직까지 유령처럼 남아서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다니.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한 라희는 오빠를 향해 싸늘히 언성을 높였다.

“오빠. 지난번에 만났을 때 분명히 말했을 텐데. 그 사람이랑 나는 사귄 적도 없다고. 그리고 미현씨, 아, 그래요. 오빠 말대로 새언니라고 불러 드리죠. 새언니는 처음이라 낯설어서 내가 한 말을 기억할 수 없다고 쳐. 딱 봐도 나잇값은커녕, 사리분별도 못하게 생겼으니까. 한데, 자칭 머리 좋다는 오빠가 그러면 안 되지. 기억 안 나? 지난번 한정식집에서 말했었잖아.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고.”

얌전한 동생이 지난번부터 대찬 언행을 하자, 라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고개를 양옆으로 뚝,뚝, 뼈 소리 나게 기울인 라현은 동생을 매섭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야, 송라희. 너 많이 컸다? 어쭈, 이젠 기어 오르냐? 지금 네 옆에 남자 있다고 기세가 등등한 모양인데, 이 오빠, 지금 상당히 기분 나빠.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그만 해라. 네 남자 친구 앞에서 망신당하기 싫으면. 재수 없게 그만 달랑거리라고.”

목소리를 낮게 깔며 껄렁한 태도로 위협하던 라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늘하고 낮은 음성이 울려 퍼져 나와 격양된 주변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말씀, 삼가시죠. 송라현씨.”

바흐였다. 라현이 불쾌한 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쪽이 무슨 권리로 그런 말을 합니까. 한진욱 씨. 남자친구로서 여친 앞에서 가오 잡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때와 장소를 가려야죠. 타인도 아니고 남의 가정사에 이렇게 나서는 건 좀, 건방진 거 아닌가? 난 송라희 친오빠인데.”

라현이 고개를 쳐들어 뾰족하게 날을 세워 묻자, 아래로 시선을 내려뜨려 눈을 맞춘 바흐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말을 해야겠군요.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갑자기 왜 나이를 물으시나? 여기서 지금 민증이라도 까게? 딱 보니 나와 동갑이나 조금 어려 보이는 데.”

도발적으로 비아냥거리는 라현을 향해, 바흐는 동요 없이 짧게 답했다.

“저는 올해로 서른하나입니다.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자신보다 어릴 거라고 내심 기대했던 모양이었는지, 바흐의 나이를 들은 라현의 표정이 급격히 식었다.

“…….”

떨떠름한 표정으로 재빨리 입을 다물어버리는 라현을 본 라희가 옆에서 말했다.

“오빠는 저보다 5살 많아요.”

라희의 올해 나이는 스물셋. 거기다 다섯 살 차이면 바흐보다 훨씬 어렸다. 하지만 라희가 기껏 알려주지 않았어도 질문은 요식행위였을 뿐이고 미리 답을 알고 있었다는 듯, 별 감정을 나타내지 않은 바흐는 곧은 시선으로 라현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스물여덟 되시는군요.”

연장자. 상대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여러모로 불리하다. 그 사실을 인지한 라현이 시선을 피하면서 일부러 들으라는 크게 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고. 여기서 나이 많다고 자랑이라도 할 참인가. 참나.”

시건방지게 비웃음을 흘리는 라현을 향해, 바흐는 속으로 말을 고르는 듯 미간을 잠시 좁히다가 갑자기 한 손을 들어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조금 전, 라현에게 악수를 청했던 그 자세 그대로.

일부러 고개 돌린 눈앞으로 손을 길게 뻗어 또다시 바흐가 악수를 청하자, 라현이 눈을 위로 올려 불쾌함이 담긴 의아한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라현과 시선을 바로 맞춘 바흐가 말했다.

“다시, 저를 소개해 드려야겠군요. 한진욱입니다.”

냉담한 목소리.

“뭐야. 장난치는 건가? 아까 뻔히 악수 해놓고 뭐하는 건지. 참.”

라현이 비웃음조로 말을 흘리며 바흐를 응시했다. 시선을 피하지 않는 바흐는 라현을 향해 내민 손을 거두지 않고 그대로 고정하고서, 미동도 없는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지만,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처남.”

일순, 라현의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하지만, 라현이 무어라 대꾸하기에 앞서, 격한 반응은 옆에서 두 남자의 대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미현이 더 빨랐다.

“네에? 처, 처남이요?”

높은 소리로 반문하는 미현이 눈을 치뜨며 라희를 바라보았다. 사실 관계를 묻는 눈빛을 받은 라희는 바흐를 한번 올려다보고 나서 고개를 내려 다시 미현을 직시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호칭이 처남이 되네요. 오빠가 진욱씨보다 어리니까요.”

“그런데요 아가씨, 이분 그냥 남자친구 아니었어요? 어제 전화통화 했을 때 어머님께서 따로 말씀 안 하셨는데요. 부모님께서도 아직 모르시는 일이죠? 새언니로서 심히 걱정되네요.”

그 말을 들은 라현이 잠시 멍했던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껌뻑이다가 입을 열었다.

“맞아. 듣다 보니 자기 말이 맞네. 아직 처남이라 불릴만한 사이가 아니고만. 상견례는커녕,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지 않았는데 다짜고짜 처남이 뭐야, 처남이. 하.”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짧게 차는 오빠을 보던 라희가 조금 앞으로 나서 입을 열었다.

“그런 식으로 따지고들면 여기 김미현 씨의 호칭도 새언니가 아니죠. 오빠.”

라희는 삐딱한 어조로 오빠 옆에 딱 달라붙어 서 있는 미현을 향해 눈을 흘기며 말을 이었다.

“이쪽, 김미현 씨도 정식으로 가족에게 소개는커녕, 지난번 어쩌다가 엄마하고 밥 한 끼 한 일이 끝 아니에요? 미현씨 부모님을 뵌 적이 없으니 아직 상견례도 전이고, 거기다 오빠 말마따나 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새언니는 무슨 새언니에요? 말에 어폐가 있네요. 그리고.”

라희는 잠시 말을 끊고서 미현을 향해 싸늘히 물었다.

“김미현 씨. 충주 시골집 내려가서 우리 아빠 한 번이라도 뵈었어요?”

라희의 질문을 받은 미현은 입을 꾹 다물고서 옆에 서 있는 라현의 어깨를 두 팔로 감싸 안고는 팔뚝 옆으로 슬쩍 쏘아지는 시선을 피했다. 대충 예상은 했었다. 아버지는 오빠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라현은 엄마의 무조건적인 비호 아래, 그간 임용시험 본다고 열심히 돈만 축내고 노량진 학원가를 어슬렁거리며 폼만 잡고 다녔지, 실제로는 놀며 허송세월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그런 라현을 평소 탐탁지 않아 했었기 때문에 부자 사이는 물과 기름처럼 겉돌아 껄끄러운 상태였다. 그러니,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오빠가 김미현과 충주 시골집으로 내려가서 아버지께 정식 인사를 올렸을 리가 없었다.

“야. 뭐 좋은 일 있다고, 아직 식도 안 올린 네 새언니가 사서 시댁을 먼저 가냐.”

라현이 숨어버린 미현을 대신해 버럭 소리쳤다. 라희는 지지 않고 싸늘히 맞받아쳤다.

“가 봐야지. 그래야 며느리인지 아닌지 알 수도 있잖아? 지금 하는 행동은 가족으로서 대접받기를 원하는데, 김미현씨 그냥 오빠 동거녀잖아? 부모님께 정식으로 소개도 안한 상태고, 그렇다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미리 혼인신고를 하지는 않았을 테고.”

동거녀라는 말에 잠시 움찔한 미현의 기척을 느낀 라현이 인상을 팍팍 쓰며 입을 열었다.

“허참, 따박따박 말대꾸는. 야, 송라희. 그러는 너는? 어? 너는 뭐 별거 있어? 아버지 뵙지 않은 건 피차 마찬가지일 텐데 처남? 처남은 누굴 보고 처남이래.”

그때였다. 바흐가 불쑥 라희의 왼손목을 들어 라현에게 내밀었다. 순간, 라희의 왼 손가락에 끼워진 새끼손톱만 한 다이아몬드가 청계천의 밝은 조명 아래 희게 번뜩였다.

“여기.”

바흐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며칠 전 라희씨에게 청혼은 했습니다. 일단 결혼 의사는 합치된 상태여서 부모님께서 계신 충주로 내려가 뵈려고 계획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는데 말씀하신거 들어보니 이번 주말에 필히 가 봐야 할 것 같군요. 그러니.”

가느다란 왼손가락 약지 위에서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투명한 다이아몬드를 향해 넋 놓고 눈길을 던지고 있는 미현의 눈매가 점차 가늘게 좁혀지는 가운데, 바흐가 간략히 만남을 마무리했다.

“주말에 충주에서 정식으로 다시 뵙죠. 처남.”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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