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86화 (186/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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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에필로그 09

모텔에서 대충 챙겨서 나오니 밖은 깜깜한 저녁이었다. 라희가 깜빡 잠든 사이, 어느 틈엔가 바흐가 가져다 놓은 새 팬티가 모텔 화장대 위에 놓여 있었다. 잠에서 깬 후 일어나서 씻은 뒤 속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는데 모텔 건물 맞은편에 지금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브랜드 속옷가게가 보였다. 하얀색 간판에 핑크색으로 속옷 브랜드명이 쓰여 있었고 투명한 쇼윈도우 안쪽에는 여자 마네킹들이 노출이 심한 속옷을 입고 뽐내듯 서 있었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남자 속옷을 파는 곳도 아니고 여자 속옷 파는 가게에 들어가서 당당히 하의를 사서 나왔을 리가 없다.

“정말, 저기 들어가서 산 거에요?”

라희가 속옷 가게를 손으로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대답 대신 바흐는 시선을 애매하게 피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샀는데요?”

의심으로 가득 찬 눈을 한 라희가 물었다. 남자가 여자 속옷가게에 들어가 팬티를 사오다니. 정말 믿을 수 없었다. 전에 백화점에서 다른 옷은 전부 사 주었어도, 속옷만큼은 라희에게 맡겼던 그였다. 라희가 빤히 올려다보며 묻자, 바흐는 슬쩍 돌렸던 고개를 되돌려 라희를 내려다보더니 눈을 맞추고서 덤덤하게 답했다.

“여자 속옷 달라고 했지. 표준 사이즈. 가장 무난한 걸로.”

“진짜요?”

멈칫, 걸음을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자, 바흐가 정수리 위로 손을 얹어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아니. 사례비를 주고 모텔 카운터에 부탁했어.”

“에. 역시.”

그가 직접 샀을 리가. 서울에서도 뉴욕에서도 쇼핑은 전부 퍼스널 쇼퍼에게 맡겼던 바흐다웠다. 그래도 찝찝한 부분을 먼저 해결해 준 세심한 배려에 라희는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제 청계천으로 산책하러 가야죠? 종로 5 가역 7번 출구에서 내려서 청계광장 표지판 쪽으로 걸어가면 된대요!”

이번에는 택시가 아닌 지하철. 바흐와 함께 타는 지하철은 처음이었다. 심야라면 귀가하는 사람들로 붐볐겠지만, 저녁이라서 그런지 주말 지하철 안은 한가했다. 라희는 그의 손을 잡고서 지하철 객실 간 연결 통로 쪽에 섰다. 마침 그쪽은 휠체어나 자전거를 태울 수 있도록 비워진 공석이었다. 평소처럼 홀로 서서 멀거니 컴컴한 지하철 창문을 바라보며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서 지하철을 타는 느낌은 색달랐다. 지루한 이동 시간이 아닌, 두근두근한 데이트 시간이라 더 설렜다. 주위 이목도 신경 쓸 필요 없이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연신 웃음 가득한 얼굴로 그와 눈 맞추다 보니 눈 깜짝할 새에 종로 5 가역에 도착했다.

7번 출구로 내리자 바로 보이는 것은 광장시장이었다. 길을 걷던 라희가 광장시장 입구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지켜본 바흐가 슬쩍 미소를 띠고서 입을 열었다.

“여기, 먹거리가 유명하다지. 가. 떡볶이 사줄게.”

“진짜요? 오늘 제가 내기로 했는데.”

라희가 반색하며 말하자, 바흐는 라희의 손을 꾹 눌러 잡으며 의미심장한 눈으로 곧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욕망에 충실한 비용이라면 얼마든지.”

욕망이라. 아까 모텔비를 말하는 건가. 라희가 눈매를 가늘게 흘겨 그를 흘깃 보자, 피식 가벼운 웃음 지은 바흐는 시장입구를 턱짓했다.

못 이긴 척, 그를 따라 들어간 광장시장 골목 안은 활기찼다.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온통 북적이고 있었다. 수백 개의 촘촘한 백열전등을 환히 밝히고서 빽빽이 늘어선 가게들은 저마다, 녹두전, 순대, 떡볶이, 김밥, 어묵, 만두, 국수 등 각종 먹음직스러운 음식과 요리를 펼쳐놓고서 성업 중이었다.

시장의 양옆으로 점포와 골목 가운데 줄줄이 늘어선 임시 손수레와 좌판으로 이루어진 가판대는 좁은 시장 길을 더 좁게 만들었고 그 사이 비좁은 통로는 먹거리를 찾아 오가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했다.

대충 돌아다니다 보니, 가게는 많았지만, 메뉴는 대부분 중복임을 깨달았다. 가장 눈에 많이 띈 문구는 ‘마약 김밥’. 텔레비전에서 몇 번인가 소개된 방송을 본 적 있지만, 실제로 먹어본 적은 없어서 흥미롭게 좌판을 바라보았는데, 층층이 쌓인 손가락만 한 검은 김밥은 그저 대학가 앞 분식점에서 파는 작은 꼬마 김밥 같아 보였다.

“뭐 먹고 싶어요?”

라희가 묻자,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글쎄. 떡볶이와 어울리는 음식이 뭐가 있지?”

떡볶이 친구라면, 순대와 어묵? 하지만, 둘 다 그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데. 라희가 입술을 쭉 내밀고 고민하고 있자, 바흐는 눈짓으로 켜켜이 쌓인 김밥을 가리켰다. 무난한 김밥이 그로서는 최선의 선택으로 보였다.

“마약 김밥 하고, 떡볶이 1인분 주세요.”

시장 맨 중앙에 위치한 포장마차에 앉으며 주문했다. 이내, 플라스틱 접시 위에 담긴 두툼하고 통통한 쌀 떡볶이와 손가락 길이의 김밥 8개가 앞에 놓였다. 라희는 종이컵에 어묵 국물을 따라 놓고 한 쪽에 놓인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두 개 집어 들어 하나 쪼개 그에게 건넸다.

그가 얌전하고 단정한 젓가락질로 앞에 놓인 작은 김밥을 하나 들어 맛보는 동안, 라희는 붉은 소스 묻은 떡볶이를 집어 먹었다. 소스에는 토핑이랄 게 없었다. 그저 대파 몇 줄기와 걸쭉한 붉은 고추장 소스가 전부였다. 달달한 설탕 맛도 별로 나지 않는 게, 매운맛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바흐라면 혀끝에 대자마자 질색할 정도의 강도였다.

소스 맛과는 별개로, 매운 쌀 떡볶이 특유의 쫀득한 식감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겉은 야들야들했고, 속은 쫄깃쫄깃해서 씹는 맛이 꽤 좋았다. 한 개 두 개, 씹는 재미에 연신 떡볶이를 집어먹던 라희는 눈을 돌려 옆에 앉은 바흐를 바라보았다. 접시 위에 8개 김밥은 절반가량 남아있었다.

“맛있어요?”

라희가 묻자 그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보기에도 떨떠름한 얼굴이 만족해하는 표정은 아니어서, 라희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바흐는 젓가락으로 김밥을 하나 집어 들어 라희 입에 넣어주었다.

“음….”

솔직한 맛은 별로였다. 만들어 놓은 지 꽤 되었는지 김밥의 밥알은 딱딱했다. 마약 김밥이라고 한번 먹으면 중독성이 심해 멈출 수 없다며 텔레비전에서 과장되게 줄창 떠들어 대던 것과 달리, 기름맛와 짭짤한 맛이 나는 당근과 단무지 미나리 줄기가 들어간 얇은 김밥에 불과했다.

혹시 섭취방법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몰라, 앞에 놓인 노란 소스를 찍어 먹어 보았어도 비슷했다. 톡 쏘는 겨자 맛이 어울려 그럭저럭 색다른 맛이 나긴 했지만, 라희 입에는 그저 그랬다. 아무래도, 가게를 잘못 고른 것일지도. 여기저기 붙어 있던 원조라는 표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주인아주머니가 장사하는 앞에서 대놓고 바로 입 밖으로 직설적인 감상을 꺼내지는 못하고 슬쩍 곁눈질로 같은 의견일 것이 분명한 바흐와 눈짓을 교환하고 있으니, 갑자기 쿡 웃음이 터져 나왔다.

라희가 먹다 말고 작게 웃고 있자, 그 역시 눈썹을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떡볶이는 꽤 맛있어요.”

웃음을 멈춘 라희가 젓가락 끝으로 떡볶이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흐는 눈을 내려라희 앞에 놓인 붉은 소스 흠뻑 적신 떡볶이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기꺼이, 양보할게.”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라희는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양보 감사히 받을게요. 그런데 혹시, 빈대떡 좋아하세요? 광장시장에 빈대떡도 유명하다고 들었거든요.”

“싫어하지는 않지만, 지금은 그다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다 보니, 그가 무얼 좋아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와 밥을 먹을 때를 생각해보면, 매운 것을 빼놓고는 그럭저럭 먹는 것 같아 보였는데. 라희는 젓가락을 멈추고 턱을 비스듬히 들어 올려 물었다.

“그럼 좋아하는 음식은요?”

“글쎄.”

바흐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답했다.

“딱히 좋아하는 음식은 없는 것 같지만, 즐겨 먹는 음식은 스테이크 정도.”

그는 입매를 옅게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 가염버터로 튀기지만 않으면 돼.”

가염버터라는 말을 듣는 순간, 바로 머릿속에 떠오른 한 단어. 샌드위치. 지난겨울 사우스 햄튼에서 만들었던 샌드위치가 짜긴 짰나 보다. 그때, 바흐와 처음으로 장을 보고, 번갈아 음식을 만들었다. 잠시 어리석은 질문으로 마음이 상했기도 했었지만, 덕분에 바흐를 향한 스스로의 감정을 또렷이 자각할 수 있었다. 라희는 사우스 햄튼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고서 싱긋 미소 지었다.

“나중에 가르쳐 주세요. 스테이크 굽는 법.”

다른 사람이 아닌, 그에게서 직접 배운다면 입맛과 취향에 맞는 스테이크 굽는 법을 익힐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만을 위한 요리일 테니까.

“미리 답례로, 나가서 커피 살게요. 에스프레소는 좋아하는 거 맞죠?”

“그래.”

라희를 바라다보던 바흐가 조용히 답하며 눈매를 곱게 기울였다.

***

둘은 광장시장을 나오자마자 시장 주변 작은 커피숍에서 각자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 손에 들었다. 그리고 아래쪽에 위치한 새벽다리 계단을 내려가서 청계천 산책로에 진입했다. 여름 분위기 물씬 풍기는 도시 냇가는 밤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온통 북적였다.

삼삼오오 무리지어 돌아다니는 가족들과 단 둘의 시간을 즐기러 나온 연인들,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노부부, 어딘가에서 일하다 왔는지 정장을 빼입고 돌아다니는 직장인들, 그리고 걷기 운동하러 나와 바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등.

이런 수많은 사람 틈에 섞여 한 손으로는 커피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바흐와 함께 손잡고 여느 연인처럼 걷고 있으려니 새삼 가슴이 가볍게 두근거리며 설레다가 즐거웠다. 비록 중간에서 미리 계획해 둔 예정에서 어긋나 잠시 삐끗하기는 했었지만, 데이트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주위를 포근하게 감싸는 여름 공기가 좋았고, 선선한 냇가 바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갈 때면 그에게서 살짝 풍겨 나와 코끝에 느껴지는 체향도 좋았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과연 되돌아갈 수 있을까, 의심하며 우울한 눈빛으로 내려다본 도시 저 아래 사람들의 지극히 평범한 광경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좋았고, 앞으로 일상처럼 바흐와 함께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갈 순간들이 좋았다. 이 순간, 그를 향해 이런 마음을 고백하고 싶어 안달이 날만큼, 좋았다.

“.....있죠.”

한동안 조용히 걸음을 옮기던 라희가 먼저 입을 떼자, 그가 걸음을 멈추고 깊은 눈매로 내려다보며 주의를 기울였다.

“저는 진욱씨가…….”

정말 좋다고, 입을 열어 고백하려던 그때였다. 라희의 뒤에서 큰 목소리가 이름을 외쳐 불러 이어질 말을 가로막았다.

“야! 송라희.”

익숙하지만, 듣기 불쾌한 남자 목소리.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높은 여자 목소리. 여자 쪽 목소리도 듣자마자, 바로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둘 다 심히 거슬린다.

“어머!”

라희가 고개를 재빨리 돌려 뒤를 바라보자, 마주치고 싶지 않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라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라현, 그리고 미현.

“맞네. 내가 맞다고 했지.”

라현이 옆에 손잡고 같이 걷고 있는 미현을 향해 으스대며 말했다.

“내가 정확하다니까. 뒷모습과 언뜻 비친 옆모습만으로도 딱 동생인줄 바로 알아보잖아.”

“오빠, 정말 대단해. 남매라 그런가? 난 계속 긴가민가했는데.”

미현이 라현의 비위를 맞추듯, 애교 띤 목소리로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었다.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던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활짝 웃고는 동시에 앞을 바라보았다. 둘의 등장에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싸늘히 굳어 쏘아보는 라희와 눈이 마주치자, 먼저 입매를 올린 것은 미현 쪽이었다.

“아가씨. 역시 가족은 끈끈한 인연으로 묶여 있나 봐요. 여기서 뵙네요? 우리야, 사는 곳과 가까워서 자주 산책 나온다지만, 아가씨는 이쪽에서 뵙기 힘들 거 같았는데, 역시 데이트신가 봐요? 옆에….”

시선을 들어 라희 옆에 서 있는 바흐를 발견한 미현은 눈매를 활처럼 휘며 노골적인 눈웃음을 쳤다.

“우와, 미남이시다. 여기 잘생긴 이 분이 아가씨 남자친구라던 의사쌤이세요?”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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