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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부지런히 데이트할 거라는 계획은 철회해야 했다. 침대에서 마냥 껴안고 있다가 푹 잠이 들어버렸는지 눈을 뜬 시각은 이미 늦은 아침도 지나있었다. 맞닿은 살결의 포근한 감촉이 좋아서 계속 침대에 꼼지락거리고 있던 라희는 고개를 슬며시 들어 벽시계의 시간을 확인하고는 작은 한숨과 함께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옆방에서 씻을게."
라희가 방안 욕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바흐가 말했다.
"고마워요."
답례로 그의 뺨에 가볍게 키스한 라희는 이내 침대에서 빠져나와 욕실로 향했다. 서둘러 씻고 머리까지 드라이기로 바짝 말리고 나오자, 바흐는 이미 멀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방안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런.'
오늘은 평범한 데이트를 할 생각이었는데 지금 바흐가 입고 있는 피트된 흰색 셔츠, 그리고 짙은 푸른색 팬츠는 단정한 세미캐주얼 복장으로 특급 호텔이나 고급레스토랑, 혹은 백화점 명품관에서나 어울리지 길거리에서는 아주 드문 옷차림이다. 특히 라희가 즐겨 찾는 학교 근처 식당에서는 더더욱.
라희는 조심스레 바흐 뒤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고서 귓가에 속삭였다.
"진. 욱. 씨."
말소리를 내뿜는 숨결이 닿아 간지러운지 그가 조금 목을 움츠리며 눈을 들었다.
"왜."
옅은 미소를 담고 묻는 눈빛과 마주친 라희는 배시시 웃으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옷, 있잖아요. 조금 더 편한 청바지나 PK 티셔츠로 갈아입으면 안 돼요?"
"흐음."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라희가 목에 팔을 두르고 조르듯 뺨을 가볍게 비비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짧은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대로. 즐겨 입지 않아 최근에는 입은 적 없지만, 찾아보면, 옷장 어딘가에 있을 거야."
소파에서 일어난 바흐는 곧장 욕실 앞쪽 드레스룸으로 걸어갔다. 슬라이딩 옷장을 활짝 제쳐 열고 안을 살피다가 슬림한 블랙진과 흰색 PK 티셔츠를 찾아서 갈아입었다. 방 밖으로 나가려고 기다리고 서 있는 라희에게 다가오더니 그가 허리를 팔로 감고 스키니진 엉덩이 위를 쓰윽 매만지며 말했다.
"딜(deal). 스커트로 갈아입어."
"왜요?"
"데이트 할 때 바지보다는 스커트가 좋을 거 같아서."
그도 기꺼이 옷을 갈아입어 줬으니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걸까, 그의 품에 안긴 라희가 미간을 좁히며 잠깐 고민하는 눈치를 보이자 바흐가 고개를 낮춰 귓가에 짓궂게 속삭였다.
"특별히, 속옷은 입을 수 있도록 허락해줄게."
"하."
라희가 가볍게 몸통을 팔꿈치로 쿡 찌르는 시늉을 하자 그는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어주며 슬며시 웃었다. 라희는 그 길로 곧장 옷장으로 걸어가 중간 길이의 스커트로 갈아입었다.
"준비됐어?"
라희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자, 그가 휴대폰을 들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순간, 라희가 그의 팔을 붙잡으며 제지했다. 멈칫, 행동을 멈춘 바흐가 라희를 낮게 응시했다.
"저기, 오늘은 김 기사를 부르지 말고 대중교통 이용하면 안 돼요?"
"여기서 지하철역까지는 한참을 나가야 하는데."
설마 마을버스를 타자는 것은 아니겠지, 휴대폰을 끄고 손에 고쳐 든 그가 눈빛으로 물었다. 라희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작게 중얼거렸다.
"……. 택시, 태워 줄게요."
"오늘 일정, 말해주면."
바흐가 라희를 내려다보면서 딱 잘라 말했다. 라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오늘 데이트 계획을 털어놓았다.
"학교 근처에 있는 초밥집에서 초밥을 먹고, 잠실에 있는 놀이공원 갈 거에요. 그리고 음, 놀이공원 나와서 시간이 남으면 청계천을 산책하다 들어오려고요."
머릿속으로 서울 시내 지도를 펼쳐놓고 동선을 그리려는 듯, 그의 눈동자가 잠시 가늘어졌다. 라희가 멋쩍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학교까지는, 택시 타고 가지."
"여기서 학교까지, 음. 택시비가 만만치 않을……."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하던 라희는 그가 지그시 바라보자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렸다.
"...좋아요."
그렇게 집을 나와 손을 맞잡고 조금 걷고 있으려니 마침 골목길을 지나던 빈 택시가 눈에 보였다. 택시를 타고 대학교 앞 번화가로 목적지를 말했다.
일요일 한낮의 서울 시내 도로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모두들 맑은 휴일을 즐기러 교외로 나갔는지 택시는 막힘없이 달려 Q대학교 앞에 멈췄다. 2만 원이 넘는 돈을 택시비로 지불하자 조금 속이 쓰렸지만, 하는 수 없었다.
함께 내린 바흐의 손을 잡고서 한참 동안 번화가 골목 안을 구석구석 배회하던 라희는 마침내 목적지를 발견하고서 크게 소리쳤다.
"저기에요!"
대학가에서 이슈가 되고 텔레비전에서 몇 번 소개된 퓨전 일식전문점.
-쿠로(くろ).
오래된 건물 지하에 위치한 이 초밥집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식당 이름의 한글 뜻인 어둠(?) 때문이었다. 일명 암흑 레스토랑으로 식당안은 개별 룸으로 되어있고, 한줄기 빛조차 들지 않는 완벽한 어둠으로 유명했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오감을 이용해 초밥 도시락 세트를 먹는 체험형 레스토랑이다. 요즘 트렌드인지 이런 블라인드 레스토랑이 곳곳에서 생겨났는데 입소문을 듣기로는 커플 데이트 코스로 꽤 괜찮다고 했다.
처음 블라인드 레스토랑이 생길 무렵에는 데이트 명소다운 이탈리아 음식 풀 코스가 인기를 끌었지만, 예약제인데다가 코스요리 가격대가 만만치 않은 만큼, 대학교 앞에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초밥 메뉴 암흑 식당이 장사를 시작해 소위 대박이 났다. 두명이서 먹으면 충분한 분량의 맛있고 신선한 초밥에다가 식사 시간은 입장시간 부터 한시간 반까지로 넉넉했다.
가격대비 괜찮다는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져 Q대 교내 소식지에도 몇번 보이곤 해서 라희도 흥미가 동해 가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장소가 장소인만큼 혼자 가거나 멀뚱멀뚱 동성과 가기에는 어색해서 미뤄왔던 장소다. 어제 파주에서 서울로 오는 길에 바흐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이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홈페이지에 접속해 예약까지 끝 마쳤다.
"가요."
라희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쪽 간판을 보며 손짓하자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 앞에 서 있던 바흐가 가게 상호와 시커먼 동굴같은 계단 인테리어를 보며 미심쩍은듯 눈매를 좁혔다. 라희는 그의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
"여기, 초밥 맛 괜찮고 나름 재미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는 라희를 따라 마뜩잖은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오십시오."
레스토랑 현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 점원 둘이서 반갑게 인사하며 맞았다.
"저희 레스토랑 이용은 처음이십니까?"
둘 중 조금 더 나이들어 보이는 남자 점원이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라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예의상 미소를 활짝 보인 직원은 벽 쪽에 주륵 놓여 있는 철제 사물함을 가리켰다.
"이곳에 모든 분실 가능한 소지품을 보관해 주시길 바랍니다. 특히 휴대전화 등 조명기구는 일체 금합니다.
직원의 말에 따라 휴대폰과 핸드백을 사물함에 넣고 열쇠를 잡그고 나자 직원은 두꺼운 암막 커튼이 쳐진 공간으로 안내했다.
"조심하십시오. 저희는 적외선 안경을 써서 내부가 보이지만, 손님들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부딪치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되도록이면 다정하게 손을 꼭 잡고 따라오시길 바랍니다."
안쪽은 마치 노래방과 같이 칸칸이 나뉜 복도였다. 컴컴한 어느 지점에 직원이 멈추는 기척이 들렸다. 이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직원은 안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소파와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희 메뉴는 10분 이내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식사시간 동안 문은 닫혀 있고 이곳은 완벽한 암흑의 공간이 됩니다. 호출이 필요하시면 테이블 아래를 손으로 더듬어 보면 툭 튀어나온 벨이 느껴지실 겁니다. 그것을 꾹 누르시면 저희 레스토랑 직원이 지체없이 도착할 겁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달깍, 직원이 문을 닫고 사라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방안에 둘만 남게 되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컴컴한 시야는 온통 암흑뿐이었다.
어둠 속 이라서 그런 걸까. 정말로 모든 감각이 생생히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옆에 서 있는 바흐의 얕은 숨소리조차 크게 들려왔다.
더듬, 손바닥으로 더듬어 보니 테이블과 소파의 윤곽이 느껴졌다. 겨우 엉덩이를 붙이고 자리에 앉으니, 옆에서 뻗어나온 팔이 라희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바흐를 향해 밀착해 끌어 앉혔다. 어둠 속에서 맞댄 서로의 체온이 느껴졌다.
"재미있는데요. 이런 경험."
라희가 먼저 말을 건네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그가 말로 표현하지 않는 이상 바흐의 반응을 알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글쎄."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낮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라희는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보다 예민해진 감각 탓일까. 날카롭게 일어선 귓가의 신경이 그의 나직한 목소리를 조금 달리 해석했다. 어둠 속에서 낮게 깔리는 목소리는 어쩐지, 짙은 관능미를 풍기고 있었다.
한번 바흐를 의식하기 시작하자, 코끝에 감도는 은은한 그의 체취마저 가슴 설렐 만큼 들뜨게 느꼈다. 약간의 두근거림. 미묘한 동요.
"음, 곧 초밥이 나오겠죠? 그런데 와사비도 상당히 맵지 않아요?"
라희는 잔뜩 집중된 감각을 흐트러트리기 위해 짐짓, 태연한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흐음."
매운 것을 싫어하니 초밥도 싫어해야 하지 않느냐고 넌지시 둘러 묻는 라희의 말을 들은 바흐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매운 맛과 알싸한 맛은 조금 달라."
와사비는 혀가 맵다기보다는 코끝이 찡해지도록 톡 쏘는 알싸한 맛이긴 하다. 갑자기 바흐가 와사비를 먹고 콧등을 찡그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만으로도 재미있을 거 같아서 라희가 저도 모르게 입매를 올리고 있는 사이,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주문하신 A 코스 초밥 도시락입니다."
탁, 탁, 암흑 속에서 테이블 위로 능숙하게 음식이 놓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라희가 미리 주문한 A 코스 초밥은 이곳의 인기 메뉴로 홈페이지 상에서 가장 가격대가 높은 메뉴다. 신선한 회덮밥과 초밥 15종이 된장국과 음료수와 함께 제공되는데 회덮밥은 참치, 전복 날치 알 광어, 도미 등이 들어가고 초밥은 바다 향이 물씬 느껴지는 성게 알, 입에서 톡톡 터지는 연어 알, 자잘한 씹는 맛이 일품인 날치 알, 탱탱한 보리새우와 달짝지근한 맛의 꽃새우, 그리고 이곳의 시그니쳐 메뉴인 킹크랩 살이 큼지막하게 놓여 훈제연어, 장어, 소라, 참치 뱃살, 소고기 초밥과 함께 제공된다.
최고급 요리에 익숙한 바흐가 고작 대학교 앞 초밥집 품질에 만족할지는 의문이었지만, 첫 데이트를 제의한 라희로서는 최선을 다한 대접이었다.
"직원 호출을 원하시면 탁자 하단 부착된 벨을 눌러주세요.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서빙을 마친 직원이 정중하게 말했다. 발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달깍. 문이 굳게 닫히는 소리가 어둠 속을 울렸다. 이제 다시 단둘만 남게 되고, 앞으로 한동안 계속 이 컴컴한 암흑 속에 둘 뿐이라고 생각되자 옆에 앉아 있는 바흐가 갑자기 크게 의식되면서 가슴이 통통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어둠을 타고 흐르는 익숙한 침묵은 어쩐지 지금 이 순간 낯설었다.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 그를 향해 안테나를 곧두 세우고 있는 것만 같아서 라희는 잠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급히 손을 앞으로 뻗어내 테이블 위 놓인 젓가락을 찾아냈다. 일식집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미끈한 나무젓가락을 손에 쥐고서 그 끝을 곧게 세워 테이블 위를 탁탁, 가볍게 두드린 라희는 옆에 가만 앉아 있는 바흐를 향해 말을 건넸다.
"...먹을까요?"
쓰윽, 허리를 감싼 손바닥의 감촉이 생생히 전해졌다. 얇은 티셔츠 위로 느껴지는 손길은 지그시 허리 곡선을 따라 매만졌다. 그가 누르듯 만지고 지난 자리에는 감각이 일깨워져 거세게 일어났다. 뜨끈. 턱 아래로 훅 솟구친 열기가 뻗쳐 얼굴 위로 잔뜩 몰리는 느낌.
"......."
그의 손길 아래 가만 몸을 굳힌 라희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바흐의 존재가 불편할 정도로 의식된다. 꿀떡,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 라희의 귓가에 약한 숨결이 닿았다. 귓바퀴를 둘러싼 솜털이 가까이 스치는 그의 숨결에 휩쓸릴 것만 같다.
"먹기보다는."
흠칫, 굳힌 목덜미 위로 바흐의 나직한 목소리가 살갗에 착 스미듯 내려앉았다.
"먹여줬으면 좋겠는데."
이어진 말은 두근거리는 귓가를 감미롭게 파고들어 왔다.
"데이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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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