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81화 (18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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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듯한 도로를 지나 좁은 국도를 거쳐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 파주에 도착하니 이미 늦은 오후였다. 차에서 내려 바흐가 내민 손을 잡은 라희는 깔끔한 조경의 산을 멀거니 바라보며 눈매를 좁혔다.

선산이라길래, 여느 묘지처럼 봉분이 여기저기 보일 줄 알았더니, 라희가 서 있는 주차장에서부터 산책로 같은 하얀 포석이 촘촘히 깔린 비스듬한 길을 따라 산 중턱쯤 마치 사설 공원처럼 단정하고 깔끔하게 꾸며진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군데군데 석조 조형물 놓여 있어 묘역이라기보다는, 한적한 조각 공원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잔디밭 한가운데 석조로 웅장하게 지어진 납골당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백색의 고요한 신전 같은 고아한 건물이었다.

한 손으로는 맞잡은 손의 온기를 느끼며, 다른 한 손으로는 헌화할 하얀 국화꽃 다발을 들고 차분히 발걸음을 옮겼다. 묘역 초입에 우뚝 세워진 조각상 너머 위로 쭉 뻗어 있는 평평한 돌계단을 층층이 걸어 올랐다.

웅장한 납골당 현관 앞에 이르자 바흐는 돌문에 부착된 도어락 뚜껑을 위로 젖혀 올려 꾹꾹 숫자를 눌렀다. 스르륵, 육중한 납골당 석문이 열림과 동시에, 내부 조명이 환히 켜져 납골당 실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정사각형 공간. 입구를 제외한 삼면은 외측이 유리로 된 납골 안치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라희는 바흐를 따라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또각, 또각,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고요한 납골당 내부가 거대한 울림통이 되어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내, 바흐가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눈을 슬며시 들어 앞을 보니, 투명한 유리 커버 안쪽에 두 개의 상앗빛 납골함이 나란히 자리한 모습이 보였다.

한수영, 이지원.

각각 이름이 한자와 한글로 쓰여있고, 그 앞에는 두 사람의 사진 액자가 비치되어 있었다. 나이는 40대 초반쯤. 액자 속 다정히 웃고 있는 부부의 얼굴을 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바흐의 부모님. 지금 라희 옆에 서 있는 바흐와 똑 닮은 외모의 두 사람.

라희는 사진 속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아버지 쪽은 뉴욕에서 뵈었던 고모님과 비슷한 외양의 지적인 미남이었다. 유난히 짙고 서늘한 검은 눈동자에 희미한 웃음 띠고서 곁눈질로 옆에 웃고 있는 어머님을 바라보는 모습.

부부는 닮는다고 했던가. 그의 어머님도 미인이었다. 화려한 미인이 아니라, 이지적인 우아함이 물씬 풍기는 단아한 미인. 쳄발리스트였다던 생전 직업에 걸맞게, 예술가다운 섬세함이 얼굴 곳곳에 배어 있었다. 두 사람이서 소중하게 가꾸었을 행복한 가정이 절로 연상되는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

"부모님이셔."

낮게 잠긴 목소리가 실내의 정적을 가르고 울려 퍼졌다. 그 말을 끝으로 말없이 서 있는 바흐의 손을 힘주어 잡은 라희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꽃을 비스듬히 기대 아래에 세워두고서, 양손을 가지런히 포개 모아 배 위에 얹은 후 고개를 아래로 깊게 수그려 숙연한 마음으로 두 분께 인사했다. 그리고 잠시 묵념.

중학교 때 두 분이 돌아가셨다고 들었으니, 열다섯 남짓한 나이에 부모님을 갑작스레 여의고, 서른이 갓 넘은 지금까지 홀로 지내왔을 바흐를 떠올리자 납골당의 엄숙한 분위기로 침잠했던 마음 한구석이 이내 먹먹해졌다.

얼추 그간 들었던 정보를 종합해 본 결과, 바흐는 고교 때까지 삼촌 집에 맡겨졌다가 삼촌이 본가와 유산을 모두 탕진해버려서 빈털터리로 미국으로 건너가 고모님과 지낸 것 같았는데.

만약, 부모님이 살아계셨다면, 그는 화목한 가정에서 무탈하게 성장했을 거였다. 그랬더라면, 이렇듯 과묵한 성격은 아니지 않았을까. 조금 더 밝았을지도. 어쩌면 과도하게 구김 없는 뉴욕의 제프까지는 아니더라도 뿔테나, 미라의 남자친구인 기현처럼 스스럼없이 제 감정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

한참을 말없이 가만 서 있던 바흐는 라희의 손을 꽉 움켜잡으며 입을 열었다.

"송라희. 결혼할 사람입니다."

살짝 잠긴 나직한 음성. 그 말을 끝으로 무거운 침묵이 찾아들었다. 밀폐된 납골당 안으로 아득한 정적이 짙게 고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바흐가 납골함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나중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라희도 다시 허리를 구부려 인사를 올렸다.

"다시 뵐 때까지, 평안히 계세요."

마지막으로 뒤돌아서기 전, 라희는 사진 속 두 사람을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조용한 걸음으로 납골당을 벗어나, 마침내 바깥으로 나오자 바흐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미동도 없이 한동안 저 멀리 산 너머로 붉게 노을 지고 있는 석양을 바라보며 석상처럼 굳어 서 있었다.

슬쩍 곁눈질해 올려다본 깊은 눈매의 아랫눈시울이 약간 붉은 거 같아서, 라희는 그의 옆에서 방해되지 않도록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빳빳하게 굳어 있는 어깨 끝이 눈에 들어왔다.

라희가 눈을 들어 주홍색 석양빛에 또렷한 윤곽이 비치는 그의 옆 모습을 조심스레 바라보자 그는 겸연쩍은지 고개를 완전히 돌려 저만치 멀리 떨어진 석양을 응시했다.

바흐의 어깨와 뒷덜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라희는, 어쩐지 그 순간 알 것 같았다. 익숙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속 찾아드는 자연스러운 직감.

".......이곳에 자주 들렀었나요?"

무겁게 드리워진 정적을 가른 라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시선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고 서 있던 바흐로부터 조금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대학 전에는 틈날 때마다."

고등학교 때 이야기다. 바흐는 고교 졸업 후 미국으로 갔으니까. 그때였다. 멀리서부터 살랑, 약한 실바람이 불어왔다. 노을빛을 실어 나르는 실바람에 이끌리듯, 단단한 어깨 위 목덜미를 덮은 단정한 흑발이 슬며시 바람에 흩날렸다. 그 모습을 본 라희는 직감을 확신했다.

'그랬구나......'

여기였다. 바흐가 홀로 마흔 네 번의 일몰을 보았던 장소. 붉게 물든 저녁노을 속으로 젖어가듯 우뚝 서 있는 그를 본 순간 라희는 알 수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그. 아무도 없는 황량한 납골 묘소인 이곳에서, 유일한 가족을 만나고 나와 저렇게 멈춰 서서 산 너머로 사라지는 석양을 몇 번이고, 망연히 바라보며 서 있었을 거다.

아련한 그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자, 심장 깊숙한 곳이 저릿하게 옥죄어왔다. 낮은 지대에 희뿌연 안개가 고이듯 스멀스멀 가라앉은 감정들이 짙어지면서, 울컥 가슴이 저몄다. 파르르 떨리는 눈가에 뜨끈한 열기가 모였다.

라희는 감정을 다스리려,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미세히 떨리는 턱 끝에 잔뜩 힘주어 입매를 올린 라희는 내내 잡고 서 있던 커다란 손을 제 가슴 위로 얹었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약간 촉촉해진 깊은 눈동자, 물기 어린 연갈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만나 한데 얽혀들었다. 곧은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깊은 눈매를 응시하던 라희는 입술을 열어 부드러운 목소리를 말을 건넸다.

"앞으로는, 둘이서 함께 와요."

라희가 가녀린 왼손을 먼저 내밀어 은빛 반지가 끼워진 큼직한 손을 마주 잡았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낮게 가라앉은 눈을 느리게 한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맞잡은 손을 서늘하게 내려다보는 눈동자 위 가지런한 속눈썹이 아래로 내려앉아 짙은 음영을 만들었다.

마침내 다물린 입술을 천천히 연 그가 나직하게 답했다.

"......그래."

라희는 입매를 힘껏 끌어올려서 활짝 웃어 보였다. 그리고 바로, 남은 한 손을 위로 길게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트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실크처럼 손가락 사이에 매끄럽게 감겨들었다. 잠시 부드러운 감촉을 즐기던 손은 이내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어깨 위를 달래듯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그런 라희를 잠시 내려다보던 바흐가 좁은 등을 팔로 단단히 감싸 품 안으로 깊게 끌어안았다.

멀리 산 너머로 석양이 자취를 감추고 어스름이 살포시 내려 앉을 때까지, 넓은 잔디밭 위의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감싸 안고 한참을 서 있었다.

***

"내일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요?"

어두운 저녁.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라희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내내 창밖을 건너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바흐는 건네진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라희를 바라보았다.

"내가 사 줄게요."

밝게 말하는 라희를 보던 바흐가 갑자기 피식, 입매를 올리며 장난스레 물었다.

"떡볶이, 김치찌개, 김치전?"

"아니에요, 그런 거."

라희가 손사래를 치며 정색하자, 그가 흐음, 짧은 숨을 내쉬고는 라희를 향해 눈길을 던졌다.

"내일은 충주 가봐야지. 원래는 오늘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

충주라. 갑자기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엄마를 마주하기에는 아직 마음속 응어리가 풀리지 않았지만, 오빠 없이 단지 부모님만 만나는 일이라면 하루만 꾹 참고 버티면 되지 않을까.

"왜."

어두워진 안색을 살피던 그가 물었다. 라희는 곤란한 표정으로 잠시 입술을 오므려 씰룩이다가 말했다.

"그게, 엄마랑 얼마 전에 대판 싸웠거든요. 그래서 좀 껄끄러워서요."

요리조리 돌려 오해의 여지를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솔직한 편이 낫겠지. 라희의 말을 듣고서 잠시 침묵하던 바흐가 입을 열었다.

"내일 메뉴가?"

기분이 풀릴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한 걸까. 라희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어서 말하라는 듯 재촉했다.

"혹시 초밥 좋아하세요?"

"싫어하지는 않아."

바흐의 대답에 자신감을 얻은 라희는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내일 초밥 먹고 나서."

잠시 말을 끊을 라희를 유심히 지켜보는 그를 향해, 라희가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데이트해요. 지금, 신청하는 거거든요. 데이트 신청."

바흐는 옅은 미소 띠고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희는 손을 뻗어 그의 손등에 겹치고는 그 위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다행이었다. 내내 무겁게 가라앉았던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아 보여서.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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