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80화 (18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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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 중도 퇴관은 처리기간이 7일 걸립니다. 짐은 오늘 정리하셔도 됩니다. 환불금은 차후에 비품 상태 등을 확인한 후 퇴관 신청서에 기재하신 계좌로 입금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퇴관 신청서를 접수한 Q대 생활관 신관 사무실 담당자가 데스크에 기대고 서 있는 라희를 향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희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서 수고하시라는 말을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사무실을 나온 라희는 휴대폰을 열어 잠시 전화통화를 했다. 전화를 하고 나니 이제, 정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통화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올라가는 라희의 손에는 바흐 집에서 돌려받은 빈 여행가방이 들려 있었다. 땡, 소리와 함께 라희가 머무는 기숙사 복도에 도착했다.

주말이라 비어 있는 복도는 인적이 없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지난 학기 동안 익숙했던 보금자리를 막상 갑작스레 떠나려고 생각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어차피, 가을 학기에는 다시 돌아오겠지만, 혼자 살 때처럼 달갑지 않은 사람이 불쑥 찾아와 초인종을 두드리는 일도, 심야에 호들갑스레 불려 나가는 일도 없이 무탈하게 지내왔던 곳이라서 그간 정이 들었다.

라희는 스스로 기숙사 체질이라고 느끼는 것이, 일단 세끼 따뜻한 밥이 꼬박꼬박 제공되었고 외박하거나 밤놀이를 즐기지 않으니 주중 11시면 꼬박하는 점호도 불만 없었다. 지내면서 심적, 물적으로 두루두루 편하고 만족스러웠기에 타지에서 여자 혼자 살기에는 기숙사만 한 곳이 없다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언니?"

조용한 기숙사 방문을 여니 안쪽에서 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침대에 누워 자다가 깬 듯 졸음이 짙은 반쯤 잠긴 목소리였다. 수진은 베개에서 고개를 빼꼼히 들고 라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떴다.

"어, 수진아. 자고 있었구나. 방해해서 미안."

"아니에요. 지금 이 시간에 자고 있는 내가 비정상이죠. 밤새 클럽에서 놀다가 노래방 갔다가 아침 먹고 늦게 들어왔거든요. 흐아암."

한 손으로 크게 벌린 입을 덮으며 길게 하품하던 수진은 문뜩 눈매를 내려 라희가 들고 있는 여행가방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의아한 듯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어? 그거, 못 보던 거네요. 근데 여행가방? 언니, 어디 가요?"

"아."

라희는 여행가방을 쥔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다가 수진을 향해 겸연쩍게 말했다.

"기숙사에서 오늘 퇴관하려고. 가을학기에 다시 들어올게."

"에? 이렇게 갑작스럽게요? 어제 그렇게 나가더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혹시 큰일 난 거 아니죠? 그런데 어?"

수진은 라희의 왼손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러더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후다닥 걸어왔다.

"세상에! 이거 반지죠, 언니. 다이아몬드!"

라희의 왼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연신 호들갑스러운 감탄사를 내뱉던 수진은 이내 입술을 뾰로통하게 오므리고서 라희를 흘겼다.

"언니, 사실대로 말해봐요. 어제 무슨 일 있었던 거에요! 반지를 보니 이 루이뷔통 여행가방도 진품인 거 같고. 설마, 어제 보낸 황금색 아이폰 주인이 준거에요?"

"응?"

수진은 어제 바흐가 보낸 아이폰이 동대문에서 튜닝한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던 눈치였는데 상당히 예리한 지적이었다. 라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수진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어제, 클럽에서 친구들이랑 놀다가 언니가 받은 아이폰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랬더니 다른 친구 하나가 막 비웃는 거에요. 몰랐냐면서, 동대문에서 그런 퀄리티로 튜닝해주는 데가 없대요. 케이스도 아니고 본체를 어떻게 황금색으로 바꾸냐면서 그런 폰이 따로 제작되어서 나온다고 알려주던걸요? 커스터마이즈라고 불린다면서요? 해외에서 판매된다고 그랬어요. 값도 엄청 비싸다고. 걔가 아이폰 마니아라서 잘 알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나 완전 새 됐잖아요."

수진은 눈매를 뾰족하게 좁히며 말했다.

"그러니, 순순히 불어요. 언니. 안 그럼 오늘 퇴관 못하게 문앞에 드러누워서 막아버릴 거야."

라희는 풋, 가볍게 웃어버렸다. 고작 한 살 차이 나는 수진은 스무 살 초반 나이답게 순수하고 귀엽다. 어려서인지 그간 경험했던 이유진이나, 나영, 소피, 이런 비틀리고 배배꼬인 부류와는 달랐다. 그저, 예전의 라희처럼 고등학교 때 야간 자율학습 시간까지 붙들려서 공부만 하다가 대학에 들어와 비슷한 동류의 학생들과 어울려 다니며 놀다가 공부하느라 아직 때가 덜 묻은 모습이었다.

라희는 여행가방을 열고 안쪽에 챙겨온 쇼핑백을 꺼내서 벌려 책상 서랍의 짐부터 넣기 시작하며 입매를 가볍게 올려 답했다.

"어제, 약혼자와 다시 만났어. 그래서 짐 정리하고 합치려고."

"역시! 시종일관 숱한 남자들의 대쉬에 쿨한 자세의 배후에는 약혼자가 있었네요. 어라? 그런데 계속 합치는 거 아니었어요? 가을학기에는 왜 다시 돌아와요?"

수진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약혼자가 미국에서 일해서. 방학 끝나면 돌아가 봐야 하거든."

"아, 롱디(long distance의 준말: 장거리 연애)였네요. 어쩐지."

마침내 알겠다는 표정이 된 수진은 몸을 움직여 라희의 침대 쪽 자질구레한 짐을 하나씩 챙겨서 건네기 시작했다.

"어, 고마워."

책꽂이에 꽂혀 있던 전공서적까지 쇼핑백에 다 넣자, 나머지 잔짐을 여행가방 안에 차곡차곡 넣었다. 책상의 짐을 전부 챙긴 라희는 수진이 전해준 침대 쪽 물건들을 모두 여행가방에 담고서 옷장으로 향했다. 옷장까지 탈탈 털어 깨끗이 정리하고 나니, 여행가방이 가득 찼다.

"짐이 꽤 많은데, 들고 갈 수 있어요?"

수진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구석에 세워둔 짐들을 보며 물었다. 여행가방과 쇼핑백 두 개. 그 중 하나는 전공서적만 들어 있어서 꽤 무겁다.

"기숙사 현관 입구까지만 가면 되거든. 그냥 두 번 왔다갔다하면 돼."

"뭘 번거롭게 왔다갔다해요. 같이 가요, 제가 책 들어줄게요."

라희가 고마워하자, 수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렸다. 짐을 챙겨 들고서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라희를 힐끗 보던 수진이 말했다.

"실은, 기숙사 입구 쪽에 언니 약혼자분 와 있을 거 같아서 궁금해서 내려온 것도 있어요."

"응. 와 있어."

라희가 대답하자 수진은 꺄아, 거리며 소리쳤다.

"진짜요? 역시, 내 예감이 맞았어. 의문의 커스터마이즈 아이폰 주인. 완전 궁금했는데! 언니 남자친구도 아닌 약혼자라니. 진짜 기대된다."

잠시 후 기숙사 신관 건물을 빠져나온 수진은 기다란 검은색 차량과 트렁크 문을 열고 서 있는 김 기사를 발견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라희를 향해 작게 물었다.

"언니, 막 드라마에서 나오던 나이 차 많이 나는 금단의 사랑, 그런 거 하는 거 아니죠? 저거 분위기상 완전 회장님 차인데다가 운전기사까지 딸려 있잖아요."

그때, 차 뒷문을 열고 바흐가 모습을 드러내며 차에서 나오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진의 눈은 더 커다랗게 뜨였다. 바흐가 옅은 미소를 띠고서 두 사람이 서 있는 곳 가까이 다가오자, 수진은 굉장히 놀라 하다가 라희를 향해 슬쩍 눈짓하면서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대박'이라 중얼거렸다.

"짐은?"

김 기사가 부지런히 트렁크로 짐을 나르는 모습을 지켜보던 바흐가 낮게 물었다.

"이게 다에요."

라희가 대답하자, 라희 옆 서 있던 수진이 곁눈질로 빠르게 눈짓했다. 이왕 기숙사 현관까지 도와줬으니 말이라도 한번 붙여보겠다는 의미였다. 라희는 가볍게 웃음 띤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이쪽은 박수진이에요. 같은 과후배이자, 룸메이트에요. 수진아, 한진욱 씨."

라희가 소개하자, 바흐는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수진을 향해 온화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라희보다 키가 작은 수진은 바로 앞에 우뚝 서 있는 바흐를 빼꼼히 올려다보다가 낮게 내려다보는 깊은 눈과 마주치자 배시시, 웃으며 입술을 열었다.

"진짜, 잘 생기셔서요. 혹시 방송 쪽 일하세요?"

"아니요. 칭찬. 감사합니다."

바흐는 간단히 대꾸했다. 김 기사가 짐을 다 싣고서 트렁크 문을 쿵 닫자, 수진에게 잠시 눈으로 인사한 그는 바로 라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지."

라희는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수진에게 손짓하며 작별 인사했다.

"나중에 연락할게."

"언니, 잘 가요!"

수진은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어 귓가에 가져다 대는 시늉을 하며 연락하겠다고 알렸다. 라희는 답하여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서 김 기사가 열어 둔 뒷좌석에 올라앉았다. 이내 차는 기숙사에서 멀어져 대학교 정문을 빠져나갔다.

"파주로 가기전, 들를 데가 있어요."

바흐 부모님의 묘역이 있는 곳은 파주라 했다. 오늘 일정은 기숙사에서 퇴관 후, 그의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는 것이었는데, 그전에 앞서 갈 곳이 있었다.

"어디로?"

바흐가 짧게 묻자 라희가 답했다.

"잠실 L 타워 몰이요. 잠깐이면 돼요."

"흐음."

바흐는 잠시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가, 이내 입을 열어 김 기사에게 그쪽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대학교를 빠져나온 이후 북쪽 방향으로 향하던 자동차가 유턴해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꽃집은 가는 길에도 있는데."

바흐가 라희의 손을 잡고서 손등을 천천히 눌러 문지르며 추측한 바를 말했다. 아마도 부모님께 헌화할 꽃을 생각한 모양이었다. 물론, 지금 그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라희는 조용히 손목을 틀어 마주 댄 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매만졌다. 남자 반지는 한 번도 사 본 적이 없어서, 남성용 반지 호수가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다. 차를 가는 길에 홀로 L 타워 몰 A 관 2층에 올라가 반지만 덜렁 사올 계획이었는데, 아무래도 함께 가야 할 성 싶었다.

"잠시 같이 들렀다가 가요."

마침내 도착한 L 타워 몰 앞. 차량 승하차장에 차가 도착하자, 바흐의 손을 꼭 잡은 라희가 말을 건넸다. 바흐는 미간을 설핏 좁히며 창밖을 보다가 라희가 손을 잡아 끌자 뒷좌석 밖으로 몸을 움직였다.

새로 개장한 L 타워 몰 A 관 2층은 한산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자, 바로 측면에 목적지인 드비어스 매장이 보였다. 유려한 곡선의 은빛 색조 쇼윈도 위쪽으로 검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DE BEERS라고 쓰인 매장을 향해 라희가 그의 손을 꼭 붙들고 걸어가자, 바흐는 비스듬히 시선을 내려 라희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궁금한 눈치였다.

"기존에 있던 반지와 같은 사이즈로 구입했었는데."

이제는 라희가 끼고 있는 반지 사이즈를 조절하러 가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라희는 나직이 말을 건네는 그를 향해 입술 끝을 들어 올려 싱긋 웃어 보였다.

"가 보면 알아요."

작게 중얼거린 라희는 발걸음을 가벼이 해 매장 안쪽, 직원이 활짝 웃고 서 있는 진열대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어떻게 오셨습니까."

늘씬한 매장 직원이 반갑게 인사하며 두 사람을 맞았다. 직원의 눈길은 자연스레 라희의 왼손으로 향했다.

"어머, 저희 제품이시네요. 고객님. 무얼 도와드릴까요?"

아는 체 하며 친근하게 구는 직원을 향해, 라희는 내내 꼭 쥐고 있던 따뜻한 손을 진열대 위로 들어 올렸다.

"아까 전화 드렸는데요. 남성용 반지."

"아, 네. 고객님이셨구나. 미리 준비해 놓았습니다. 3mm 밴드 찾으셨죠."

직원은 허리를 숙여 진열대 아래에서 준비해 둔 하얀색 상자를 꺼냈다. 흰색 상자의 안쪽은 고급스러운 검은색 충전재로 마감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 두개의 은색 반지가 놓여 있었다.

"남성분 표준 사이즈와 그보다 한 치수 큰 사이즈로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시착했을때 가장 무난한 3mm 플래티넘 밴드고요, 반지 안쪽에는 이렇게 작은 다이아몬드가 매몰되어 있습니다. 사이즈가 맞는지 한번 착용해 보시겠습니까? 여기, 한 치수 더 큰 사이즈가 잘 맞으실 듯합니다."

직원이 건네주는 반지를 들고 긴 손가락의 약지에 서서히 끼워 넣었다. 손가락 마디를 통과해 들어간 반지는 그의 약지 안쪽까지 딱 맞물려 들어갔다.

"어때요?"

라희가 속눈썹을 들어 올려 그를 향해 묻자, 바흐는 자신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말없이 잠시 내려다보았다. 줄곧 올려다보는 시선을 못 이기겠다는 듯, 마침내 짧은 숨을 내쉰 그가 라희를 향해 어색하게 옅은 미소를 보였다.

"딱 맞아."

다행이었다. 매장 내 준비된 치수가 몇 없어서 그 외 사이즈를 원하면 영국 본사에 따로 주문을 넣어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바흐의 대답을 들은 라희는 활짝 웃음 지었다.

"이걸로 할게요."

라희는 주머니 안쪽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체크카드를 직원에게 건넸다. 직원이 계산을 마치고 주섬주섬 포장용 케이스와 리본 띠를 준비하자, 라희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이대로 차고 나갈 거에요."

매장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라희는 한 손에 그의 손을 꼭 잡고서 매장을 걸어 나왔다. 1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린 라희는 미소로 가늘어진 눈을 들어 바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안쪽에, 작지만 똑같은 드비어스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어요."

"그래."

그가 긍정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라희는 멈칫, 발걸음을 멈추고서 바흐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똑똑히 힘주어 말했다.

"A Diamond is forever and so are you, to me."

(다이아몬드는 영원하고, 당신도 내게는 그래요.)그런 라희를 가만 내려다보던 바흐는 불쑥 한쪽 팔을 내밀어 라희를 깊게 끌어안고서 고개 숙여 조용히 귓가에 속삭였다.

"My utmost for you."

잡은 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맞잡은 왼손가락을 꽉 깍지껴 단단히 붙든 채였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흐가 말한 뜻: 최상을 다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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