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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오늘 밤 안 돌아 오는 거에요? 기숙사 외박 신청하는 김에 같이 해놨어요.]
수진으로부터 휴대폰 메시지. 눈 뜨자마자, 어젯밤 무단 외박 했다는 것을 깨달은 라희가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켰을 때 문자 팝업이 떡하니 떠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고맙다는 답장을 꾹꾹 눌러 작성하고 있는데, 슬며시 뒤에서 허리를 감아오는 따뜻한 손길이 느껴진다. 맨 살갗을 감싸는 피부의 감촉. 밤새 살을 섞고 있었어도, 이렇게 다시 보드랍게 감겨드는 고운 촉감은 심장을 저릿하게 울릴 정도로 좋다.
"누구."
바흐가 뒤에서 라희의 몸을 끌어안으며 나른하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급히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누르고서 허리를 감아 당기는 그의 품으로 다시 끌려 들어갔다. 포근하고 넓은 품. 은은한 체향과 따스한 온기. 등을 둥글게 말고서 길게 누운 가슴 위로 손을 뻗어 매만졌다. 매끄러운 피부 아래 탄탄한 근육이 느껴져서 살갗의 굴곡을 느리게 따라 흘러내리는 손바닥 아래 감촉을 즐기다가 답했다.
"수진이요. 기숙사 룸메이트인데, 과 1년 후배에요. 어제 외박신청을 못 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수진이가 신청해서 걱정은 면했어요. 무단외박 3회면 기숙사 영구 퇴실이거든요."
작게 재잘거리듯 말했다.
"........"
바흐는 말없이 팔배게를 한 손을 위로 움직여 라희의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둥글게 감았다가 풀었다가 하면서, 생각에 잠겨 있는 얼굴이었다. 라희는 그가 내준 팔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뺨과 관자놀이에 닿는 체온을 느끼고 있다가 고개를 슬며시 들어 그를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아래로 낮게 뜨인 깊은 눈매와 마주치자 살짝 입매를 올려 웃어 보였다.
"졸업까지 두 학기 밖에 안 남았잖아요."
라희를 바라보는 짙은 눈매가 가늘어진다. 침실에 찾아든 환한 빛에 반사된 눈동자 테두리가 새카맣게 비춘다.
"어젯밤, 제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던 거 기억나요?"
라희가 싱글거리며 부드럽게 말하자, 바흐는 기억을 상기하는 듯 위로 눈을 몇 번 깜빡이고서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음. 처참히 작전 실패했지."
낮게 투덜거리듯 말하는 그가 어쩐지 귀여워서, 라희는 작게 웃으며 손을 길게 위로 뻗어 매끈해 보이는 뺨을 쓰다듬었다. 아침 면도 전이라 오돌토돌 돋아난 수염 때문에 손바닥 아래 약하게 까끌거리며 쓸리는 뺨의 감촉이 좋다. 늘상 완벽해 보이던 바흐의 조금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친밀감. 라희는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문득 얼굴을 붉히고서 재빨리 그의 어깨 아래에 얼굴을 묻었다.
졸업까지 1년간, 생활의 변화 없이 그대로 살기로 했다. 물론 어제 이후 바흐와 약혼했다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그는 혼인 상태와 상관없이 뉴욕에서 일을 해야 했다. 언뜻 비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전히 바쁜 것 같아 보였고.
아마도 지난번 뉴욕에서 잠시 경험했던 그런 빽빽한 바흐의 일상에 공식적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그를 배웅하고, 퇴근 시까지 기다렸다가 스케줄에 맞춰서 파티에 참석하거나 모임에 가야 할 거였다. 그리고 고모님도 정기적으로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아마도 예전에 제니퍼가 언급했던 바흐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하리라. 그쪽 사회에서의 파티나, 사교, 에티켓 그런 것들.
단지 사랑하는 남자의 애인으로서 바흐의 옆에 배우자로 서 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스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 대학 졸업은 하고 싶었다. 그래야 차후에 혹시라도 그쪽 학벌을 갖추고 싶다면 대학원 석사라도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이 되니까. 그리고 또…….
라희는 눈동자를 아래로 내려 천천히 굴렸다.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니까.'
이렇듯 단꿈에 젖어 있어야 할 핑크빛 상태에서조차 냉소적인 스스로가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랑은 감정이고 감정은 얼마든지 변하는 거니까. 기분이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 신경질적이 되었다가 화가 나기도 하듯이, 마치 예측할 수 없는 기상이변 같은 것이 감정인데 단지 감정 하나로 모든 것을 팽개치고 홀리듯 그를 따라가기에는 그간 배운 인생이 너무 썼다. 그리고 예전에 제프가 말했다시피, 맨해튼 평균은 재혼이라고 했다. 평균은 무시할 게 못 된다.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한다는 뜻이다.
시니컬한 제프는 누가 봐도 잉꼬부부이자 자신의 친 누님인 캐서린의 결혼 생활조차 어찌 될지 지켜봐야 한다고 싸늘히 말했었다. 그러니, 차가운 이성이 들뜬 마음으로 성급한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대학 졸업이라는 명제를 머릿속에 내걸었고 라희는 거기에 내심 동의했다.
"이번에 돌아가면, 언제 다시 오세요?"
라희가 묻자마자, 잠시 침묵하던 단정한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짧은 한숨. 그는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나직이 입술을 열었다.
"계절학기가 언제 끝난다고 했지?"
그는 대답 대신 학사일정을 물었다.
"이주 뒤에요. 그리고 한 달간 여름방학이에요."
라희가 답하자, 바흐는 팔베개하고 누워있는 라희를 품 안으로 더욱 끌어당기면서 기울어진 정수리 위로 속삭였다.
"기숙사, 오늘 퇴실 신청해."
"네?"
라희는 높은 소리로 되물었다. 갑작스럽게 퇴실 신청이라니. 졸업할 때까지 생활의 변화를 주지 않기로 했는데. 라희는 기숙사에서 내내 지내다가 졸업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집으로 옮기라는 건가. 조만간 바흐가 뉴욕으로 가버리면 혼자 남아 휑뎅그렁한 이곳에서 지낼 엄두가 나지 않는 데. 라희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그가 손바닥으로 좁은 등을 나릿하게 쓸어내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계절학기 끝날 때까지 함께 있다가, 뉴욕으로 데려갈 거거든. 설마, 나 혼자 돌아가게 내버려 두지는 않겠지."
쪽.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며 입매를 올리며 부드럽게 묻는 바흐를 향해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래요, 같이 가요."
바흐는 그런 라희를 꽉 끌어안으며 몸을 기울였다. 한 손으로 등을 받치고 허리를 꽉 죄듯 끌어안아 가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서 깊은 숨을 들이켰다가 이내 얕은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부모님."
"......?"
등을 더 세게 끌어안아 단단히 옭아매는 손길. 그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오늘 인사드리러 갔다가, 충주에도 같이 가지."
앞서 말한 부모님은 돌아가신 바흐의 부모님을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어제 반지로 서로 약혼을 했으니, 그의 부모님을 뵙고 인사드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충주? 라희의 집을 말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달갑지 않았다.
불과 삼 주 전, 엄마에게 그렇게 말하고 났는데 바흐가 인사하러 간다고? 갑자기 들떴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만약, 충주에 가기 싫다고 한다면 전에 뉴욕에서 뿔테가 언급했던 말을 떠올린 그가 마음 상해하겠지. 뿔테는 충주에 부모님을 뵙긴 뵈었으니까.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뿔테조차 봰 라희 부모님인데 약혼자인 바흐가 얼굴도 모르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하지만, 당분간 엄마와 오빠는 보기 싫다는 것이 솔직한 속마음이었다. 아빠한테는 별 감정 없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엄마에게 맺힌 화가 저절로 풀리려면 망각이 필요했다. 적어도 반년은 얼굴 보지 않고 있어야 겨우 상처입은 마음이 풀어질까. 그리고 오빠 쪽은 되도록이면 평생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라희가 입을 다물고 가만있자, 바흐가 조용히 물었다.
"왜."
라희는 눈을 한번 느리게 감았다가 뜨고서 손을 뻗어 바흐의 뒷머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일단 달래야지, 부드러운 말로.
"어서 아버님 어머님 뵙고 인사드리고 싶어서요."
바흐는 목덜미에 파묻은 얼굴을 느리게 비볐다. 한참이나 말없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있는 그를 향해, 라희는 끌어안은 어깨를 조용히 토닥여주었다.
***
"음식은 입맛에 맞으세요?"
주방에서 쟁반을 들고 나온 임 여사가 물었다.
"아, 네."
식탁에 앉아 젓가락질하던 라희가 미소 띠고 답하자, 임 여사는 쟁반에 놓여 있던 접시를 들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떡볶이로 붉은 빛깔이 아주 고왔다.
"떡볶이, 좋아하신다길래 한번 해봤어요.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예의 바르게 답하자, 임 여사는 흡족한 듯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주방으로 걸어갔다. 라희가 밝은 얼굴로 바로 앞에 놓인 떡볶이를 내려다보다가 눈을 들어 맞은편 앉아서 식사하고 있는 바흐를 바라보자, 그가 갑자기 얼굴을 굳히고서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정중히 사양하지."
먹기 싫다는 표현. 하긴, 그는 매운 것은 질색하니까. 통통한 떡볶이 떡 하나를 젓가락 새에 끼우고서 한입 베어 먹으니, 질 좋은 쌀 떡으로 만들었는지 아주 쫀득쫀득한 떡의 식감이 찰지게 씹혔다. 육수를 써서 국물을 냈음이 분명한 깊고 꽉찬 맛의 매콤 달콤한 소스도 일품이었다. 혀를 즐겁게 하는 떡볶이를 연신 집어 먹던 라희가 문득 고개를 들고 그에게 물었다.
"어릴때부터 매운 거 안 좋아했어요?"
"응. 싫어."
짧은 대답. 다 큰 어른이 반찬 투정하는 것 같아서 귀엽다. 싫다는 사람 괴롭히는 악취미는 심술 부릴 때 말고는 자제하기로 했으니까. 양도 딱 1인분이라서 혼자 먹기 적당했다. 겉보기에는 건조한 임 여사의 말없는 마음 씀씀이가 새삼 고마웠다. 라희는 앞에 놓인 떡볶이를 맛있게 먹어치웠다.
식사가 마무리되자, 임 여사 딸이 후식을 가져왔다. 후식으로는 한입 과일과 두어가지 종류의 떡 그리고 각자 취향에 맞춘 커피였다.
그때, 바흐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는 잠시 거실 쪽으로 옮겨서 통화했다. 얼핏 들리는 이야기로 가늠해 보면 위층 공사 관련 내용인듯싶었다. 식당 가장자리 창가의 햇살에 번쩍이며 빛나는 반지 쪽으로 시선을 힐끗 던진 임 여사 딸은 쟁반 위에 담겨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날짜는 잡으셨어요?"
라희는 날짜, 라는 말에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멋쩍게 입매를 올렸다.
"아, 아니요. 아직. 일단 졸업부터 하려고요. 두 학기 남았거든요."
결혼날짜. 새삼 왼손에 낀 반지의 무게가 느껴졌다. 진짜로, 청혼 받은 거구나. 아니지 참. 청혼을 했지. 라희가 반지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사이 임 여사 딸은 빙그레 미소 짓고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라희는 커피잔을 기울이며 머릿속으로 통장 잔고를 떠올려 보았다. 단순 커플링도 아닌 약혼반지를 받은 것은 맞는데, 반지라는 것이 일방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아야 의미가 있어 보였다.
'얼마나 들까? 남자 반지는.'
적어도 백만 원은 하지 않을까. 물론 남자용 반지니 만큼, 다이아몬드가 크게 필요 없을 테니 심플한 반지 정도라면 같은 브랜드의 반지도 그리 비싸지 않을 것 같았다.
바로 손을 내려 식탁 옆 의자에 놓아둔 휴대폰을 켜서 확인해보니 대충 플래티넘은 대충 200만 원 선, 그 아래 골드라인은 백만 원 남짓했다. 그 정도 금액을 지출하고서 다시 메우려면 두어 달 빽빽하게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물론, 그에게는 별거 아닌 돈이겠지만, 적어도 반지만큼은 스스로가 번 돈으로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오늘 그의 부모님의 묘소에 방문하기 전에 함께 매장부터 들리리라 계획했다.
라희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천천히 커피잔을 기울이는 사이, 자리로 돌아온 바흐가 라희 옆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다 마셨으면 올라갈까."
라희는 활짝 웃으며 내밀어 진 손을 맞잡았다. 감싸 안은 커다란 손바닥 아래 착 감기는 따스한 체온은 머릿속 복잡한 생각을 저 멀리 훅 날려버렸다. 이 손이 이제 정말 제 것같아서 슬며시 뺨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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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