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75화 (175/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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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희는 재빨리 말을 마치고서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아래로 굴렸다. 그간 통역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하며 강철 멘탈이 되었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 두렵지 않다고 해도, 앞으로 꺼낼 말은, 바흐라면 몰라도 다른 사람이 있는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발설 할 수 있는 종류의 말은 아니었다. 이렇듯 공개된 장소인 거실에서 그것도 새 여자를 앞에 두고 말해버리기에는 너무 비참했다.

잔뜩 곤란한 얼굴로 바닥만 바라보는 라희를 가만 내려다보던 바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위로 올라가지."

거실에 서 있는 여자를 지나쳐 그의 눈짓을 따라서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매끄러운 대리석 계단을 지나 그가 열어준 문으로 들어갔다. 양쪽에 옷장이 놓인 복도를 지나, 다시 방문을 여니 침실. 전에 와 보았던 그의 방. 하지만 내부가 조금 어수선했다. 방안 물건과 가구들이 한쪽 구석 벽으로 몰려 있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 벽은 텅 비어 있었다. 가구 배치를 다시 하려는 걸까. 라희가 잠시 방을 살펴보고 서 있는데 바흐가 말을 건넸다.

"할말이라는게 뭐지."

건조한 음성. 무표정한 얼굴. 방안에 들어오자 단도직입적으로 용무를 묻다니. 밑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용건을 말하고 어서 돌아가라는 걸까. 라희는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어색한 시선이 담담한 그에게 닿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라희는 재빨리 눈을 한번 감았다가 떴다. 오늘 아이폰을 라희에게 보낸 바흐는 너무도 덤덤해 보였다. 이렇듯 불쑥 모습을 드러낸 라희를 보며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여자가 있는데, 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물건을 보낸 걸까. 그것도 직접 연주한 곡을 넣어서. 여자와 동행했음에도 집안에 서 있는 라희를 보고 당황해 하는 모습도 아니었다. 그저 태연했다.

복잡한 뇌리에 제프가 언급했던 백업(backup: 차선책)이 스쳤다. 한 사람에게 매여 있다가는 뒤통수 맞을 거라던 그 말. 농담처럼 흘려 들었던 것이 뒤늦은 후회로 다가왔다. 만약, 둘 중 한 명이 백업이라면 과연 누가 세컨드일까. 라희일까, 거실에 서 있는 새 여자일까. 그동안 아무런 연락 없었던 것은 저 여자 때문이었을까. 그럼, 아이폰은? 그 안에 담긴 에릭 사티의 곡은. 생각할수록 머리만 복잡했다.

'차라리 놀라거나 불쾌해하지. 그러면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거실에서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버렸을 텐데.'

아니, 고백하기에는 오히려 이런 무미건조한 바흐의 모습이 더 나았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주체할 수 없이 떨리던 붕붕 뜬 가슴이 여자를 본 순간 차게 얼어붙어 버려서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냥, 여기까지 오면서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던 말을 어서 시원하게 뱉어버리고 기숙사로 돌아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차갑게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막상 낯뜨거운 말을 하려는데 차마 시선을 마주할 수 없었다. 고개를 아래로 내려 바닥만 바라보던 라희가 후우, 숨을 한번 몰아쉬고서 마침내 결심한 듯 빠르게 말을 뱉었다.

"사랑해요."

됐다. 해냈다. 처음 해보는 고백은 역시 떨렸다. 동시에 심장이 찌르르 아프기도 했다. 들었겠지. 앞에 있는 그가 들으라고 그나마 크게 말했으니. 바흐의 반응이 궁금했지만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민망했다.

고백을 하고서 한참이나 서 있는데도, 싫다, 좋다, 되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여전한 침묵. 물론 듣는 입장에서는 뜬금없겠지. 뉴욕에서 그렇게 홀연히 귀국하고 나서 갑자기 불쑥 찾아와 한다는 말이 이따위 고백이니까. 거기다 이미 새 여자를 확인한 상태인데도 앞에 와서 뻔뻔하게 고백했으니 어이가 없을 수도 있겠다.

"........"

떨리던 마음이 차츰 잦아들었다. 점점 기분이 추욱 쳐졌다. 아니, 쳐지다 못해 우울의 나락으로 곤두박질 쳤다. 그래도 하고 싶었던 말을 뱉고 나니 후련하기는 했다. 아주 처참하게 후련했다는 것이 문제랄까.

이제 더는 미련 없을 테니 다행이다. 걸지 못할 전화번호를 노려보며 밤을 지새우지 않아도 되고, 길 가다 비슷한 인상착의의 남자를 보면 하루종일 먹먹하게 마음 아파하지 않아도 되니까. 라희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눈 안에 스멀스멀 치밀어오르는 뜨끈한 열기를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할 말 다 했으니, 이만 갈게요."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라희가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라희의 뒤에서 확 손목을 잡아챘다. 손목을 단단히 붙잡은 크고 뜨거운 손은 이내 넓은 품으로 라희를 당겼다. 훅, 몸에 닿는 뜨거운 온기와 함께 그윽한 체향이 코안 가득 스민다. 등을 감싸 안은 단단한 팔이 몸을 옥죄어오자 저릿한 떨림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도 몸이 반응하니 우습다.

"....놔, 놔요!"

옴짝달싹 못하게 안긴 라희가 팔로 탄탄한 가슴을 밀쳐내며 버둥거려 보았지만, 그럴수록 몸을 단단히 감싸 안은 힘이 강해졌다. 벗어나려 몸부림칠 수록 더욱더 품에 가두어 꽉 끌어안았다. 그때였다. 안간힘을 다한 격한 움직임으로 연신 헐떡이고 있는 라희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파고들어 왔다.

"다시."

멈칫. 라희의 몸짓이 일순 정지했다. 바흐의 품에 밀착해 안긴 채, 가만 서 있으니 맞닿은 체온을 타고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전해져왔다. 귓속을 스치는 뜨거운 숨결. 가까이 내려앉는 목소리.

"다시 말해봐."

귓가로 감겨드는 낮은 목소리를 거부하지 못한 라희는 입술을 달싹였다.

"...놔요.......?"

앵무새처럼 말하고는 떨떠름하게 끝을 올리자, 피식, 바람 빠지는 짧은소리가 귀를 스쳤다.

"아니, 그전에."

다시 속삭이는 감미로운 음성. 라희는 두 눈을 내리감았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마음이 간질간질인다. 이미 한번, 했던 말이니. 두 번 한다고 뭐가 달라지기라도 할까. 미간을 찡그리며 입술을 잘근 깨문 라희가 재빨리 말을 뱉었다.

"사랑해요."

체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순간 몸이 더 꽉 죄었다가 갑자기 스륵 풀렸다.

"......?"

놀란 라희가 고개를 위로 들자, 위에서 곧게 내려다보고 있는 바흐가 보였다. 눈빛이 마주쳤다. 동그란 눈동자를 마주한 그의 깊은 눈매가 조금 가늘어지더니 끝이 기분 좋게 휘었다.

"나도."

달콤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라희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방금, 무슨 말을..

"네?"

작게 벌려 되묻는 입술 위로 쪽, 하고 짧은 키스가 내려앉았다. 입술 위 잠깐 닿았다가 떨어진 부드러운 감촉. 풀렸던 몸을 다시 단단한 팔이 감싸안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등이 살며시 휜다. 이번에는 숨도 못 쉬게 죄어오는 것이 아닌, 포근하게 안아주는 느낌.

"그래."

낮게 속삭여진 대답.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잠시 멍하게 서 있던 라희는 양손을 뻗어 그의 팔뚝을 꽉 붙잡고 고개를 위로 한껏 들었다. 눈을 한껏 위로 치켜떠서 위에서 내려다보는 새카만 검은 눈동자와 눈을 맞추고서 날카롭게 물었다.

"그래라니요, 무슨 그래요. 아니, 그것보다도 같이 집에 온 여자는 누구예요?"

위층으로 올라온 이후, 그게 가장 궁금했다. 아래층에 서 있던 여자의 정체. 확실히 묻고 싶었다. 이제 두루뭉술한 것은 싫었다. 애매모호한 것을 그저 넘어가는 것도 싫고. 계약에 얽매여 침묵을 강요당하는 관계도 아닌데, 그에게 물어보지 못할 이유는 없으니까. 라희가 눈에 잔뜩 힘주고서 올려다보자, 그가 말했다.

"저거."

바흐는 눈짓으로 한쪽 벽 쪽에 한데 몰려 있는 물건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반대쪽 벽을 눈짓했다. 다른 한쪽 벽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허물거거든."

허물다니? 벽을? 라희는 다시 한 번 텅 빈 벽 쪽을 응시했다. 저 벽 너머는, 지난번 라희가 머물려던 옆방. 그 벽을 허물면.......

"왜요? 왜 갑자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묻는 라희의 물음에 바흐가 답했다.

"두사람이 쓰기에는 방이 좁으니까. 그래서 불렀어. 인테리어 디자이너야."

가만, 두 사람이라고 하면. 라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정수리 위로 턱을 기댄 바흐가 말을 이었다. 머리 위로 나직한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오늘은 공사 날짜를 잡고 내부 배치를 구상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만났으니 디자이너에게 말해서 취향대로 꾸며."

취향대로 꾸미라는 말을 들은 마음이 순간 기분 좋게 들썩였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에는 귀에 거슬리는 말.

"생각보다요?"

라희는 높게 되물었다. 마치 당연하게 라희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말투가 마음에 걸렸다.

"언제부터요?"

"초인종 누르고 도망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순간부터."

놀란 눈을 다시 마주한 검은 눈매가 곱다랗게 휘었다. 길고 곧은 손이 올라와 정수리 뒤로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긴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다정하고 세심한 손길. 주위를 감싸는 포근하고 말랑말랑한 기분이 낯뜨거워 고개 숙인 부끄러움을 어루만졌다.

"say you love me. 프로포즈 곡이었지."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

알고 있었구나. 하긴, 바흐도 사라네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으니. 라희가 어학원에 가 있는 동안 사라로부터 들었을 지도.

"......조금 전까지 차갑게 굴었잖아요."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투정하듯 중얼거렸다.

"심술. 프로포즈 하고서 사라져버렸으니까."

뉴욕에서 일을 말하는 거다. 라희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가 새치름하게 말했다.

"....먼저 그랬잖아요."

일부러 주어를 뺀것을 지적하듯, 그가 짧게 물었다.

"누가."

"......."

라희는 잔뜩 입술을 오므리다가 달싹였다.

"진욱씨가요."

단정한 입매가 위로 슬며시 올라갔다. 잠시 미소를 짓고 서 있던 그가 몸을 돌려 침대쪽으로 걸어갔다. 침대 옆 협탁을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 각각 양 주먹안에 쥐고서 라희에게 다시 돌아왔다.

"이거."

그는 라희의 오른손을 보며 눈짓했다. 펴보라는 뜻 같았다. 라희가 오른손을 내밀어 손바닥을 펼치자 그가 그 위로 왼주먹 쥐고 있던 손을 슬며시 펼쳤다. 툭, 작은 소리와 함께 손바닥 위에는 은빛 고리에 매달린 하늘색 보석이 반짝이며 빛났다.

바흐는 고개를 숙이고서 라희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그날 반지 주인이 나타났으니 돌려줘야하나 고민하기도 했었고,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바흐가 말했다.

"최종적으로는 네가 결정할 일이었으니까. 자리를 먼저 피하는 수밖에."

라희는 손바닥에 놓인 초록 물빛 아쿠아마린 반지를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오해했구나. 무심코 바스에서 구입한 이 반지 때문에.

덩그러니 놓인 반지를 떨떠름하게 보고 있던 라희가 손바닥을 오므려 쥐고서 손을 내리려고 하자, 바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라는 뜻 같았다. 멈칫. 라희는 다시 아까처럼 반지가 놓인 오른 손바닥을 펼쳐 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흐가 오른 주먹을 라희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서서히 손을 펼쳤다. 다시, 툭 소리와 함께 손바닥 위로 무언가가 떨어져 놓였다.

반지였다. 디자인이 비슷한 은색 반지. 미끈한 은색 링 위에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무색투명한 보석이 눈 부신 빛을 내며 박혀 있었다. 심플한 바깥쪽과 다르게 반지 안쪽으로 De Beers라는 글자가 작게 음각 되어 있었다.

"둘 중에 골라봐."

짓궂게 묻는 바흐를 향해 라희는 다이아몬드 박힌 반지를 왼손에 집어 들고서 웃어 보였다.

"이번에도 귀찮았던 거죠. 드비어스는 세인트 리지스 1층에 있고 티파니는 한 블록 떨어져 있었으니까요."

"글쎄."

그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가 라희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설레는 미소였다. 멍하게 올려다보던 라희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시선을 떨어뜨려 수줍게 아래를 보고 있자, 바흐가 드비어스 다이아몬드 반지를 라희의 왼손에 끼워주며 말했다.

"A Diamond is forever* and so are you."

(*드 비어스 슬로건: 다이아몬드는 영원하고 너 또한 그러니까.) 그리고는 고개를 좀 더 낮게 숙여 라희의 귓가에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지금이 기회야. 이번에는 사라지지 말고. 답은 미리 yes니까."

귓속을 타고 흐르는 감미로운 목소리가 설탕보다 달다. 그의 기분 좋은 부추김으로 한껏 기분이 들뜬 라희가 곁눈질로 바흐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여 말했다.

"Marry me."

단정한 입매를 부드럽게 올리며 바흐가 답했다.

"사랑해."

줄곧 듣고 싶었던 말. 나직하게 들려오는 달콤한 한마디로 재빨리 아래로 수줍게 내리뜬 두 눈 옆 양쪽 귓끝까지 붉게 달아올라 버렸다.

-그와 그녀와 그와 나, 완결.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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