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74화 (17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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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평창동.

지난번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방문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바흐의 본가.

"후."

정신없이 기숙사에서 뛰쳐나와 이곳에 도착해 검은색 대문을 앞에 두고도 마음속 떨림이 잦아들지 않는다. 컴컴한 벽처럼 막힌 대문. 바흐와 함께 왔을 때는 주차장을 통해서 계단을 올라 집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이 검은색 대문은 낯설다.

두근두근,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이제 초인종을 누르고 바흐의 집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라희는 바짝 타는 긴장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까지 정신없이 오는 동안에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았는데 막상 초인종을 누르려니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과연 바흐가 집 안에 있을까. 아니면, 없을까.

오늘 보낸 등기는 분명 한국에서 발송되었다. 국제우편이라면 그렇게 수령인만 덜렁 한글로 적어 둘 수는 없으니까. 마을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정신없이 걸어오느라 거친 호흡을 내쉬던 입술 위가 버석하게 말랐다. 기숙사에서 나올 때 립글로스라도 챙겨올걸. 라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혀끝으로 제 입술을 축였다. 시커먼 대문을 앞에 두고 있으니, 갑자기 모든 것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머리 모양, 옷, 신발, 그리고 얼굴까지. 초인종을 누르기 전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점검하고 싶었지만, 한적한 주택가 길거리 한복판에 거울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

벌어진 입술 새로 작은 한숨을 흘리던 라희는 마침내 손가락을 뻗어 회색 초인종 버튼을 꾹 눌렀다. 손끝에 딱딱한 것이 묵직하게 눌리는 느낌. 저질러버렸다. 눈이 질끈 감겼다. 이제 돌이킬 수 없겠지. 저번처럼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다가 뒤돌아 도망가지 않을 거니까.

"누구세요."

이내, 지난번과 같이 메마른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라희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작게 벌렸다.

"저...송라희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회색 스피커에서 소리가 뚝 끊겼다. 초조한 마음으로 서 있으려니 잠시 뒤 앞을 우뚝 가로막고 버티던 검은색 대문이 서서히 열렸다. 열린 문 앞에는 목소리 주인공보다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30대로 보이는 여자. 얼굴이 낯익다. 이혼 후 이곳에서 일을 돕는다던 임 여사의 딸.

"안녕하세요."

임 여사 딸이 먼저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너무 정중하게 인사해주셔서 황송하네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임 여사 딸이 빙긋 미소 지으며 대문 안쪽을 향해 손짓했다. 라희는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양옆으로 푸른 잔디밭이 짧게 다듬어진 정원의 오솔길을 지나 현관 앞까지 걸었다.

"저, 혹시..."

현관문 앞에서 라희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작은 목소리를 들은 임 여사 딸은 현관문을 열려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라희를 보면서 가만 서 있었다.

"....진욱씨가 안에 있나요?"

라희는 긴장된 얼굴로 못내 궁금해했던 사실을 물었다. 임 여사 딸은 그런 라희에게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도련님은 집에 안 계세요."

도련님. 바흐는 집안에서 도련님으로 불리는구나. 한껏 들떴던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전화번호가 손에 있었으니, 무작정 본가로 향할 게 아니라 차라리 그전에 전화 한 통 걸어 그가 어디 있는지 확인해 볼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라희는 그가 없다는 소리를 듣고서 시선을 아래로 내려 난감한 표정으로 눈을 재차 깜빡이며 적잖이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곧 돌아오실 거에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임 여사 딸이 입매를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마치 다정한 위로처럼.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현관으로 들어와 얼굴을 마주한 임 여사는 무표정하게 인사하고는 바쁜 듯 주방 쪽으로 재빨리 모습을 감췄다. 다행히 지난번 초인종을 누르고 내뺀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임 여사 딸은 라희를 거실 쪽으로 안내했다.

"도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소파에서 편히 기다리고 계세요."

탁 트인 거실 가운데 놓인 널찍한 가죽 소파 위로 라희는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소파 바로 오른쪽은 전면이 통 창으로 창문 너머 바깥쪽 잘 가꾸어진 집안 정원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차는 무엇으로 준비해 드릴까요? 커피 아니면 녹차, 홍차 뭐든 드시고 싶은 것으로 말씀해주세요."

임여사 딸은 상냥하게 물었다. 라희가 잠시 뭘 고를지 생각하는 기색이자, 임여사 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메리카노로 준비해 드릴까요?"

".......네?"

고개를 들고 묻는 라희를 향해 소파 앞에서 가만 서 있던 임 여사 딸이 말했다.

"지난번 오셨을 때, 다음번 식후에는 녹차 말고 아메리카노로 준비하라는 말씀을 들었거든요. 좋아하신다고."

"아...네."

놀란 라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임여사 딸은 온화한 표정으로 잠시 기다리시라 말하고는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녹차. 라희는 예전에 이곳에 바흐와 함께 왔을 때 거실 뒤편의 주방에서 먹었던 점심 식사를 떠올렸다. 그때 식후에 녹차가 나왔었는데, 방금 임여사 딸의 말에 의하면, 바흐가 다음번 식후에는 아메리카노로 준비하라고 말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 오후에 바로 비행기를 타고 두바이로 향했고, 바흐는 그곳에서 홀로 뉴욕에 가버렸다.

'다음번 식후라면...'

혹시, 그때 바흐의 고모님이 쓰러지지 않으셨다면 다시 이곳, 본가로 돌아올 예정이었을까. 하긴, 그때 약정한 기간이 일주일가량 더 남아 있긴 했었다.

'그래도...'

거의 일 년 전에 말해 두었던 내용일 텐데, 용케 기억한다 싶었다. 처음 이랬던가, 이 집을 방문한 여자가. 임여사 딸이 전해준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으려니, 마음속 한구석에 놓인 작은 깃털이 부드럽게 움직여 간질이는 것마냥 가슴이 작게 두근거렸다.

-탁.

임여사 딸이 가져온 연한 갈색 아메리카노가 심플한 커피잔에 담겨 소파 유리 테이블 위에 놓였다.

"기다리시는 동안 텔레비전이라도 보시겠어요?"

임 여사 딸은 라희에게 소파 테이블 위 리모컨을 가리키며 물었다. 라희는 고개를 작게 저으며 재빨리 중얼거렸다.

"아니요. 괜찮아요. 커피 마시고 있을게요. 그냥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요, 그럼."

거실에 홀로 남은 라희는 커피잔을 기울였다. 넓게 트인 공간. 숨 막히도록 조용한 거실. 텔레비전. 홈시어터. 소파테이블. 소파. 자질구레한 물건 하나 없이 기본적인 거실 가구들만 배치된 무미건조한 공간은 두 여자가 쓸고 닦고 가꾸어서인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혼자 사는 집이라서 그럴까. 전에 바흐가 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릴 때 이곳에서 성장한 것 같았는데. 어린 그가 부모님과 복작이며 살았을 때도 이렇게 조용하고, 건조한 공간이었으려나. 커피를 마시며 거실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라희는 이내 고개를 돌려 통 창 너머를 바라봤다. 작은 수목원에 온 것처럼 잘 가꾸어진 정원을 바라보며 손에 든 커피잔을 비워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주방 쪽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바로.

-달깍.

현관 쪽에서 작은 문소리가 들렸다. 바흐? 라희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섰다. 거실 안쪽에서는 현관이 보이지 않는다. 저쪽으로 걸어나갈까 말까 망설이던 그때.

"오셨습니까."

조금 전 들었던 임여사의 목소리가 들리고.

"음."

짧게 대꾸하는 나직한 음성이 집안 공기를 타고 흘렀다. 바흐의 목소리. 쿵쿵쿵, 바흐의 목소리를 들은 심장이 고장 난 기계처럼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아, 오셨군요."

조금 이상하게도 임여사가 다시 말했다.

"거실에 손님이 와 계십니다."

임여사의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현관 쪽에서부터 빠르게 움직이는 둔탁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거실의 앞쪽에 바흐가 모습을 드러냈다.

"......."

거의 6개월 만에 보는 그는 예전과 다름없었다. 윤기나는 새카만 머리카락, 어느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잘생긴 얼굴. 깔끔한 옷차림. 단정한 자세. 단지, 조금 다른 점이라면 날카로워진 턱선과 약간 야윈듯한 뺨 그리고 그 위에 더 깊어진 눈매랄까.

끝을 알 수 없이 깊은 검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라희는 그대로 마비되듯 굳어버렸다. 미동도 할 수도 없었다. 몸 안 가득 걷잡을 수 없는 두근거림으로 가득 차서 빳빳해졌다.

위에서 아래로 온몸을 샅샅이 훑고 지나는 고요한 눈동자. 시선이 닿는 곳마다 몸이 반응해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쿵쾅거리던 심장 소리는 머릿속 가득 울려 퍼졌다. 허리를 세우고 서 있는 몸이 잘게 떨리면서 감각이 바짝 긴장했다.

무겁게 공기를 짓누르는 정적. 마치, 오늘 날씨와 같은 습습한 담요처럼 살갗 위를 내리누르는 무지근한 침묵. 서로 마주한 거실은 적막이 드리워졌다. 그런데 갑자기 현관 쪽에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다른 사람.

".......!"

좀 전까지 세차게 두근거리던 심장이 일순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얼어붙은 라희의 시선이 바흐의 어깨너머를 향했다. 여자였다. 스무 살 후반, 깔끔한 투피스를 차려입은 늘씬한 미인. 놀란 라희의 눈길을 받은 여자는 입매를 가볍게 올리고서 바흐 뒤에 가만 서 있었다. 좁힌 눈매로 여자를 바라보던 라희의 눈동자가 천천히 이동했다.

다시 바흐를 바라보며 서 있는데, 그답게도, 그는 본가를 찾아와 거실에 서 있는 라희를 가만 바라볼 뿐 단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뒤에 서 있는 여자, 신경 거슬리는 미인. 여자와 동행한 이곳은 다른 어느 장소도 아니고 바흐의 본가.

그대로 공식적인 자리에 참석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깔끔한 투피스를 차려입은 것으로 보아, 여자는 바흐의 집에 작정하고 온 듯 보였다. 단정하게 빗어내린 머리, 풀메이크업.

'누굴까. 어떤 관계일까. 다른 곳도 아닌, 본가까지 올 정도라면.'

뒤엉킨 심경이 담긴 눈빛을 받은 여자는 입매를 올리고 서 있을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렇게 가만 보고 있던 여자는 조심스럽게 라희를 향해 탐색하는 눈길을 보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는 시선을 느끼자 화륵,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대학교 수업 듣는 편한 옷차림에 얼굴에 화장은커녕, 립글로스조차 찍어 바르지 않고 왔다. 라희는 입술 안쪽을 잘근 깨물었다. 순간 입술 위로 따끔한 시선이 느껴졌다. 바흐다.

라희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서 떨리는 입매를 다잡으며 입술을 벌렸다. 집주인을 봤으니 인사를 해야겠지.

".....안녕하세요."

두꺼운 정적을 가른 라희의 목소리가 미세히 떨리며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갔다.

"......."

인사를 건네자 그는 단지 눈을 가늘게 좁혔을 뿐이었다. 미간을 미미하게 접고서 무심히 내려다보는 무표정한 얼굴에서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여자는 바흐와 라희를 번갈아 보면서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라희는 눈을 들어 잠시 바흐를 마주하다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냉랭하지도, 싸늘하지도 않지만, 대놓고 반가워하는 기색도 찾을 수 없는 덤덤한 집주인과 흥미로운 표정으로 라희를 바라보는 여자를 앞에 두고서 넓은 거실에서 홀로 쭈뼛거리고 있으려니 정말 어색했다. 초대받지 못한 파티에 불쑥 끼어든 불청객이 된 느낌.

'얼굴도 봤으니 이제 그냥 가버릴까.'

아니. 아직 안돼. 라희는 뒷걸음쳐 도망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바흐가 보낸 음악을 듣고서 용기 내 정신없이 이곳까지 급히 온 이유. 지난 몇 달 동안 마음속 가득 차올라서 상대에게 말하지 않으면 답답해 미쳐버릴 것 같은 감정을 토해내야 했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당사자에게 솔직하게 터트리고 나면 맺혔던 속이 확 풀릴 것 같았다. 그럼 미련없이 돌아설 수 있겠지. 마침, 새로운 여자도 확인했으니까 더더욱.

"저기."

긴장 때문인지 목소리가 잔뜩 잠겨서 나왔다. 집요하게 쏘아지는 곧은 시선 속에 갇힌 라희는 목을 한번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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