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72화 (17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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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학기 마지막 발표 수업이 몰려 있는 빡빡한 한주가 지나자마자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몰아치듯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하루에 두세과목씩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니 바로 다음주 월요일부터 하계 계절학기가 시작되었다.

계절학기 최대 신청학점은 6학점. 라희는 교직 과목 2학점 짜리 3개를 신청했다. 교육학개론과 교육심리 그리고 교육사회를 신청했는데 일반 수강과목처럼 일주일에 하루 수업이 있는 것이 아닌, 3주간 매일 각 과목당 2시간씩 수업이 있었다.

아침 첫 수업에서 부터 연속으로 매일 6시간. 시간표가 고정되어 있어서 전처럼 금요일 수업을 뺄 수가 없었다. 라희는 에이전시에 연락해서 앞으로 3주간 일을 쉰다고 통보해 두었다.

"아아. 힘들다."

첫날 수업을 마치고 오후 늦게 기숙사로 돌아온 라희가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 중얼거리자 책상에 앉아서 손톱정리를 하고 있던 수진이 고개를 빼꼼이 들고 물었다.

"언니, 내말이 맞죠? 3과목 꽉 채워서는 무리라니까요. 나처럼 하나 듣는게 장땡인데."

룸메이트 수진 역시 방학기간 동안, 지방인 집에 내려가지 않고 계절학기 한과목을 신청해 두었다. 1학년 때 수강했던 교양과목인데 C를 맞아서 A+을 노리며 재수강중이었다.

"한과목 아침 일찍 후딱 수업듣고 하루종일 슬렁 슬렁 놀면서 엄마 잔소리 없이 매끼 뜨신밥 먹고 친구들 만나고 노는게 얼마나 꿀인데. 언니는 고생을 사서하고 있어."

"그러게. 아, 머리아파. 첫날 부터 OT도 없이 바로 수업하고 과제로 레포트 내주다니 계절학기는 확실히 실전인가봐."

침대에 누운 라희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수진은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그래도 점수가 후해서 다행이죠 뭐. 출석일수 채우고 적당히 레포트 두개 내고 하면 B이상은 보장되어 있잖아요."

"그래 그리고 조별과제가 없어서 마음에 들어."

라희의 말에 수진은 손톱을 가지런히 모아 펼쳐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격하게 동의했다.

"그건 그래요. 우리 과는 정말 모든 수업이 팀플인데. 타과는 덜한 거 같더라고요. 특히 교양은 거의 일반 수업이라 좋고요. 조별과제 정말 싫다."

"나처럼 그냥 발표 파트 맡아버리지. 그럼 일이 줄어들거든."

"어휴, 그건 아무나 하나요. 전 사람들 앞에 나서면 심장 떨려서 말 못해요. 언니, 그래도 계절학기 듣는 동안 주말은 널널하겠네요? 아르바이트 없으니까."

수진의 물음에 라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학기 중에 거의 주말마다 일이 있어서 쉬지 못했으니, 앞으로 3주간은 몇달만에 맞아보는 황금 같은 주말이었다.

"응. 간만에 늦잠도 자고 쉬면서 도서관에 대출한 책도 보고 미드도 보고 뒹굴거릴거야. 요즘 미드 새 시즌 시작했다고 난리더라. 무슨 호주출신 배우가 뜨고 있다던데 이름이……. 아."

갑자기 말을 멈춘 라희는 무언가 생각난 표정으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 위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라희의 행동을 지켜보던 수진은 궁금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왜 그래요 언니?"

"잊고 있었어."

"뭘요?"

라희는 눈을 깜빡이며 휴대폰 주소록을 확인했다. 기존에 쓰던 통신사 웹페이지의 주소록을 복구한 것으로, 주르륵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니 마침내 찾던 이름이 나왔다.

[미라]

라희는 눈을 깜빡이며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멋쩍게 웃다가 수진을 향해 답했다.

"내친구. 작년에 워킹홀리데이 갔었거든. 돌아올 때가 돼서,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잊고 있었어. 나 전화번호가 완전히 바뀌어서 그 친구가 내 번호를 모르거든."

"그럼 어서 연락해봐요. 귀국해서 연락했는데 없는 번호라고 멘트나오면 황당하겠다."

라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통화 버튼을 길게 눌렀다. 작년에 마지막으로 걸었을 때는 고객의 사정으로 정지된 번호라는 안내가 나왔는데 귀국해서 상태를 변경했는지 이내 뚜르르 뚜르르르 규칙적인 신호음이 귓속을 타고 흘렀다.

-여보세요.

건너편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미라야."

라희가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잠깐 당황하는 기색이 전해져왔다.

-응? 모르는 번호인데. 누구세요? 누구지? 누구야?

옆에 사람이 있는듯 그쪽을 향해 묻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 라희."

그제야 밝아지는 목소리. 휴대폰 너머 미라가 크게 소리쳤다.

-에? 야, 너 너무한다. 세상에 그동안 연락 한통 없다가 지금에서야 연락해?

"너 워홀가있는 동안 이메일은 꾸준히 답장했잖아."

-야, 그건 그거구. 그리고 라희 너, 한동안 연락 안 되더니 어디서 뭐 했어? 얼른 썩 고하지 못할까! 아니야, 아니. 야, 우리 만나! 당장 만나!

미라는 늘 그랬든 오늘도 불쑥 만남을 청했다. 오늘은 계절학기 수업 첫날이라서, 조금 피곤했기 때문에 라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 그건.."

-어허, 네 유일한 절친이 말하는데 토를 달다니. 너 어딘데? 서울이지?

말을 자른 미라가 다그치듯 물었다.

"응, 기숙사. 이번에 계절학기 듣고 있어."

-야, 너 또 귀찮아서 그러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할 일이 없는 내가 가마. 마침 나 종로거든? 너네 학교 앞에서 한 시간 뒤에 보자. 오늘은 니가 쏴. 알았지? 나에게 통 연락도 안 하고 이 계집애가. 지은 죄가 있으니 사죄하는 공손한 마음으로 쏘란 말이야. 알았어?

솔직히 나가기는 귀찮았는데, 미라가 먼저 학교 앞으로 온다고 청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라희는 밝게 답했다.

"그래, 와라. 내가 쏠게. 요즘 아르바이트해서 한끼 밥값 술값 정도는 쿨하게 쏠 수 있어.

-오예! 간다. 거기, 아가씨! 목욕재계하고 다소곳이 날 기다려! 우후훗!

뚝, 저쪽에서 경쾌하게 통화를 끝냈다. 전화 통화를 마치고 서 있는 라희에게 수진이 말을 건넸다.

"언니, 그 미라라는 분. 성격 화끈하네요. 전화하자마자 당장 만나자고 하다니."

"미라가 원래 성격이 좀 활달해서. 그래. 오늘 너랑 같이 식당 내려가 저녁 먹으려고 했는데, 조금 있다가 나가봐야겠다."

"그래요, 나는 옆방 수미랑 같이 밥 먹으면 되니까. 걔도 지난 학기 교양하나 빵구나서 땜빵하려고 이번에 계절학기 신청했어요."

"그래, 그럼. 아, 조금 누워 있다가 전화가 오면 나가야겠어. 피곤해."

라희는 다시 침대로 걸어가 털썩 누워 몸을 뒤집었다. 침대 위에 엎드려 몸을 길게 뻗고 누웠다.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으려니 스르르 눈꺼풀이 감겨왔다. 라희는 눈을 가만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일 년만의 재회. 많이 달라졌으려나. 미라까지 돌아오고 나니, 새삼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 실감 났다.

벌써 일 년.

하아, 긴 숨을 내쉬던 라희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

"여! 라희씨!"

학교 정문 앞에 선 남자가 라희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중간 정도의 키. 약간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에 가득한 유들유들한 웃음. 그 옆에 서 있는 세련된 차림의 여자는 미라가 분명했는데, 남자는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 둘을 향해 가까이 걸어가면서 라희는 연신 눈매를 좁혔다. 재빨리 기억을 헤집다가, 마침내 생각해냈다. 남자의 이름은 기현.

"안녕하세요. 기현씨."

"우와, 기억하시네요? 그때 딱 한 번 봤는데."

기현이 반갑게 말을 건네자, 옆에 서 있던 미라가 라희를 향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놀랐지? 혹 달고 와서. 종로에서 그만 집에 가라고 떠밀어도 말을 안 들어서 결국 데리고 왔다. 미안해. 대신 기현 선배가 밥 살 거야."

그러자 기현이 미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라희씨 만나러 간다는데 내가 빠질 수가 있나. 자, 일단 움직입시다. 어디가 좋아요? 골라봐요. 라희씨"

"아무거나 괜찮은데요."

"그냥 밥, 술, 차 다 해결되는 뷔페가. 메뉴 고르기 귀찮아. 요 앞 빕스 가자 빕스."

일행은 학교 건너편 빕스로 향했다. 저녁 시간 바로 직전이라 웨이팅도 없이 한가했다. 바로 매장에 들어가 착석하고 나서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가져와 식탁 위에 늘어놓고 나서 마침 세일중이라는 생맥주를 주문해 건배하고 난 뒤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두 사람."

라희가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묻자, 미라가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쩌긴. 이렇게 된 거지."

라희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라를 보고 있자, 기현이 입을 열었다.

"그때, 라희씨 봤던 날요."

"일년 전에요?"

"네, 그날요. 그날 이렇게 된 거죠."

그날이라는 말에, 라희는 눈을 깜빡이며 일 년 전 기현과 미라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미라가 워킹 홀리데이 간다고 짐을 챙기러 캠퍼스에 들렀던 날. 바흐가 사촌 동생인 우현을 위해서 회장으로 있는 고전음악 동호회 전체를 밥 사주기로 했던 날. 그날, 스카이 라운지에서 기현과 미라와 함께 와인을 진탕 마셨었다. 술에 취한 기현은 대리기사를 불렀고 미라와 함께 차를 타고 귀가한 줄 알았는데.

거기까지 떠올린 라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라를 바라보자, 미라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큼, 하고 콧소리를 내고서 말했다.

"아휴. 술이 웬수지. 이제 와 말하는 거지만, 결국 일 쳤잖아. 그날. 후, 하필 사물함 짐을 이 망할 인간의 차에다 넣어둘 건 뭐였담."

미라가 말하는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일 년 전 이맘때쯤 대리기사를 불러 귀가하는 중에 미라의 자취방에 사물함 짐을 내려다 주러 먼저 들렀었고, 거기서 짐을 건네주다가 기현이 갑자기 라면 먹고 싶다고 떼를 썼다고 했다. 아무리 말려봐도 막무가내로 라면을 외치는 기현 때문에 일단 먼저 대리기사를 돌려보내고서 그날 밤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라면이라니 너무 고전적인 거 아니에요?"

라희가 장난스럽게 묻자, 기현은 눈을 미라에게 흘기면서 답했다.

"뭐, 이를테면 신호였죠. 원래 썸 타다가 남자가 먼저 과감하게 신호를 보내보는 거라고요."

어쩐지. 그날 처음 본 미라와 기현은 스스럼없이 사이가 좋았다. 썸 타고 있었구나. 라희의 기억 속에서 기현이 라희를 보고 예쁘다고 칭찬하자 옆에서 바로 툴툴거리던 미라가 떠올랐다. 그날 오후 내내 동호회 술자리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버티던 라희가 마침내 허락하자, 둘은 하이파이브하면서 뛸 듯이 기뻐했었다. 남자와 손바닥을 맞댄 자연스러운 하이파이브. 그때 바로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눈치챘었어야 했던 걸까.

"그뒤 호주로 워홀 갔었잖아?"

"말도 마. 이 인간이 어찌나 귀찮게 들러붙던지. 어휴, 거기 예쁜 금발의 푸른 눈 미남들이 완전 그림의 떡이었지. 영양가 없이, 눈만 잔뜩 호강하다 돌아왔다야."

듣자하니 기현은 미라가 워홀가있는 동안 수시로 호주를 방문했다고 했다.

"아휴, 진짜 일만 하다 왔다. 어디 놀러 가도 못 먹는 감 천지라서 찔러보지도 못하고."

미라가 푸념하듯 말하자, 기현은 유들유들 웃으며 미라를 꼭 껴안았다.

"미라 너, 고약한 성질머리 받아줄 나만 한 남자가 어디 있다고 눈을 돌리시나. 응?"

"흐응. 그건 인정. 선배 유일한 장점이잖아? 다섯 명의 누님들 덕분에 하드 트레이닝 된 여성형 화법의 달인. 눈치가 빨라서 그나마 데리고 있는 거야. 알겠어?"

미라는 씨익 웃으며 기현의 정수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훈련이 잘된 강아지를 칭찬하는 표정으로 흡족하게 바라보면서.

"미라, 너 박씨 집안 4대 독자님을 만나서 시어머님이 6명인 거는 각오하고 있는 거야? 그때 그런 말 들었던 거 같은데."

자연스러운 연인들의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을 보면서 라희는 짓궂게 말을 건넸다.

"그거야, 알고 있지만 뭐. 어쩔 수 없더라.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미라가 입술을 쌜죽하게 내밀며 답하자 기현은 그런 미라를 꽉 껴안으며 얼굴을 가까이 대고서 뺨을 맞대 가볍게 비볐다.

"걱정 마, 우리 공주님. 나 4대 독자잖아.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귀하게 컸거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시어머니 6명이래도 다 내가 이겨줄게. 나만 믿어."

"헤에. 믿어 돼? 공수표 남발하는 거 아니야? 라희 너, 지금 이말 휴대폰 녹음해라. 꼭, 나중에 딴말하면 들려주게."

라희가 대답없이 빙긋 웃고 있자, 두 사람은 이내 행복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킥킥거리며 웃었다. 어느덧 앞에 놓여 있던 음식이 죄다 비워지자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새 접시를 가득 채워왔다.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두 번째 접시를 비우다가 미라가 문뜩 말을 건넸다.

"라희 너는 그동안 좋은 소식 없었어? 생긴 것과는 딴판으로 통 남친 소식이 없단 말이야. 이 계집애."

"나?"

라희는 포크를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나야 뭐 늘 그렇지."

그러자 미라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기현을 향해 말했다.

"얘 봐, 얘봐, 기현 선배, 얘가 그 유명한 철벽녀야. 다가오는 남자 죄다 철의 장막을 치듯이 차단해버려. 그때도 한번 말 했었던 거 같은데."

"어, 맞아. 기억난다. 남자 싫어한다고 했던 거. 오빠 때문이었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맞죠? 라희씨."

기현이 확인하듯 물었다.

"아.."

대답 대신, 라희는 애매한 미소로 얼버무렸다.

"아, 맞다. 그때. 깜박 잊어버리고 말 안 했는데."

갑자기 미라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크게 외쳤다.

"그때! 왜, 이 인간이랑 엮인 그날 이후 며칠 있다가 강의실 앞 복도에서 바흐 선배 만났었거든? 평소 우리 안면만 트고 지내는 사이였는데 그날은 그 선배가 갑자기 말을 걸더라."

".......?"

라희가 눈을 들어 궁금한 표정을 보내자, 미라는 기억을 되돌리려는 듯 잠깐동안 눈동자를 위로 들어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날 밤 동행했던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던데. 근데 그 선배, 진짜 말 없기로 유명하거든. 갑자기 다가와 먼저 말을 거니까 왠지 기쁘더라니까. 마치 연예인과 이야기한 기분? 하여튼, 너 때문에 그때 바흐 선배랑 말도 해보고. 그랬다고. 그러니까. 너 그렇게 우중충하게 혼자 다니지 말고 나가서 연애 좀 해. 너 생각보다 잘나간다니까."

미라의 말을 듣던 라희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숨을 잠시 멈춘 마음 한구석이 딱딱한 뭔가로 콕콕 쑤시는 듯 들썩이다가, 이내 간질간질거렸다.

"내가 연애를 해보니까, 쫌 좋더라. 그러니 너도 좀 해. 좋은 것은 나눠야지. 응? 뭣하면 우리과 남자 소개시켜줄까? 라희야, 어때? "

미라가 앞에서 부르는 소리에 라희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들쑤셔진 마음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는 것 같아서 민망했다. 라희가 조금 부자연스러운 얼굴로 재빨리 시선을 피해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를 들이켜자, 미라는 그런 라희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눈을 껌뻑였다.

"변했어. 변했어! 예전이라면 무슨 소리냐고, 딱 잘라 말하며 정색했을 텐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제는 싫지가 않은가 보네. 알았어 얘. 내가 이렇게 말만 할 게 아니라, 조만간 좋고 튼실한 놈으로다가 잡아서 대령해줄게. 나만 믿어."

미라가 자신의 윗가슴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호언장담했다. 이후 두 사람과 식사를 계속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진 그 시간까지, 라희는 오가는 이야기에 적당히 대꾸하며 대화에 호응만 해주었을 뿐 온전히 집중할 새가 없었다. 미라가 바흐에 대해 언급한 이후, 다른 말은 라희의 귀를 단지 스쳐 지나갈 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아..."

기숙사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 긴 한숨을 흘리던 라희는 눈을 감고 두손을 들어 마른 세수를 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손을 내려 드르륵, 책상 첫번째 서랍을 열고 안쪽 깊숙이 넣어두었던 메모를 꺼냈다.

"......"

귀국 당일날, 제니퍼가 건넨 메모지. 그날 이후 하도 만지작거려서 귀퉁이가 너덜너덜해졌다. 메모지 정중앙에 동글동글한 글씨로 적힌 긴 숫자를 한참동안 들여다보던 라희는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세워 이마를 세차게 문지르다가, 이내 짧은 한숨 쉬고서 다시 책상 서랍 안쪽으로 메모를 집어넣었다. 탁. 눈을 내리감은 라희의 귓가에 책상 서랍이 다시 굳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종이책 설문은 일단 올려봤는데 PC에서는 보이네요. 모바일에서는 화면 맨 위 상단 오른쪽 점세개(...) 누르면 설문참여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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