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71화 (1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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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미친개에 물렸다, 혹은 길가다 개 똥을 밟았다 치고 잊어버리기에는 그간의 대가가 너무 컸다. 머릿속 복잡한 생각들을 헤집으며 라희는 한정식집 으리으리한 솟을대문을 빠져나와 오렌지빛 가로등이 환히 비추는 어스름 깔린 거리를 걸었다.

오빠. 그리고 엄마. 미현인지 뭔지 하는 여자까지. 취직한 오빠가 스스로 자신의 빚을 갚길 바란 것이 오판이었다. 지난 여름 채무 상황의 덫에서 훌훌 벗어난 오빠는 마음껏 날아올라 자신의 삶을 즐겼다.

다시 임용 공부를 시작한다는 핑계로 사과나무와 논 밭 뿐인 충주를 벗어나 서울 노량진 원룸촌에 방을 얻고 슬렁슬렁 카페나 돌아다니며 놀다가 아르바이트생과 눈이 맞았다. 가을 무렵 둘이 옥탑방을 오가며 지내는 것은 알았었는데, 이제 결혼한다니. 그것도 취직한 후 본인 직장이 안정되었으니 사랑하는 여자가 그깟 아르바이트하면서 돈 몇 푼 번다고 동동거리느니 차라리 자신이 좀 더 고생해서 여자는 집에서 편히 쉬게 한다는 말을 찍찍 내뱉은 오빠는 라희 앞에서 자신있게 떵떵거렸다.

그래. 둘은 사랑하는 연인이니 오빠의 그런 태도는 당연하다고 치자. 연인을 위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이니까. 하지만, 오빠가 지금 누리고 있는 안락은 라희가 온전히 희생한 대가였다. 라희가 떠맡은 빚. 그 빚을 고스란히 오빠에게 그대로 돌려준다면, 아마 지금 연인과의 달콤한 결혼을 꿈꾸기는커녕, 불법 채무 추심이 직업인 무시무시한 사내들에게 협박당하고 괴롭힘 당하며 하루하루 이자 채워 넣기도 빠듯할 거면서.

오랜 속담에도 있듯이, 아무리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사람 마음이 완전히 다르다 해도, 이렇게까지 적반하장일 수 있을까.

라희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숨을 천천히 몰아쉬었다.

"후......."

문뜩, 발걸음을 멈춘 라희의 시선이 비스듬히 돌았다. 한정식집을 걸어나와 정처 없이 걷다 보니 갈림길이었다. 위로는 언덕길이었고, 아래로는 내려가는 경사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종로구 평창동.

머릿속으로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지난해 늦은 여름 바흐의 차를 타고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 올라가 방문한 바흐의 본가가 위치한 곳도 평창동.

어제 퇴근 후, 지하철에서 바흐를 닮은 남자의 뒷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들쑤셔진 마음이다. 지금 바흐의 본가가 위치한 평창동에 와 있는 것을 깨닫자마자 속이 뒤숭숭하고 심란했다.

'어디쯤이었지.'

물론, 단 한 번 와보았고 그것도 밤 중에 차로 이동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그 다음날 낮에 바흐의 집을 빠져 나갈 때 언뜻 본 기억으로는, 대충 본가에서 아래로 쭈욱 내려가다 보면 한자 표지의 모던한 건물이 있었다. 무슨 문학관인가 그랬는데.

"푸훗....."

갑자기 실없는 웃음이 났다. 나 참, 뉴욕에서 그렇게 매몰차게 돌아설 때는 언제고 이렇게 바흐만 떠올리면 먹먹하게 집착하는 지긋지긋한 인간이라니. 그것도 엄마와 오빠에게 잔뜩 열 뻗쳐 있는 심각한 상황에서조차.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냥 스스로가 몹시 웃겼다. 라희는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덮고서 마음껏 실소를 내질렀다. 어차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다.

한참을 그렇게 서서 자조 섞인 비웃음을 흘리던 라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북악산 바로 아랫자락에 위치해 이 붐비는 서울 도심에서도 고즈넉하고 공기도 좋다는 이 고급스러운 동네의 향취를 가슴 가득 들이켰다. 상쾌한 줄은 도통 모르겠다. 단지 그냥 밤 공기구나 싶을 뿐. 그래도 심호흡을 하면서 머릿속까지 공기로 가득 채우고 나니, 무거웠던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라희는 다시 조금 전 오빠와 미현이 나란히 앉아있던 모습을 떠올렸다. 서울 시내 중위권 대학을 나온 오빠의 스펙과는 한참 쳐지는 미현의 조건. 그 둘을 생각해보니 어쩐지 뿔테 가족이 라희를 보며 느꼈을 법한 감정의 실체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굳이 그날 냉랭했던 나영만 탓할 것이 아니었다. 오늘 라희가 미현에게 보인 태도 역시, 싸늘하고 쌩했다. 물론 라희가 뿜어낸 서늘한 냉기는 미현이 아니라 오빠를 향한 것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뿔테도 형수와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했으니 뿔테와 함께 한정식집에 불쑥 나타난 라희를 본 나영이 그런 냉소적인 태도를 내보였을 만 했다.

오늘 오빠와 집으로 돌아가 단둘이 남은 미현은 무슨 말을 하려나. 아마도 오빠네 동생은 싹수가 노랗다던가, 재수 없다던가 그런 말이 오가겠지.

확실히, 경험이란 이해의 폭을 확장시킨다. 라희는 어디선가 읽었던 그 글귀를 깊이 공감했다. 오늘 오빠와 미현의 일을 겪자 그때 필경재에서 뿔테네 가족이 보인 반응을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부질 없는 이해만 늘어나네.'

그랬다. 정말 오늘은 쓸데없는 이해의 폭만 넓혔다. 그런데 오늘, 무의미한 오빠와 미현과의 만남에서 마음속에 한가지 뾰족한 가시처럼 마음속에 걸린 것이 있었다. 그것은, 오빠가 미현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언급했던 말.

-남자로서 사랑하는 여자가 돈 몇 푼 벌려고 밖에서 아등바등 고생하는 거 보기 싫고. 그냥 집에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편히 지냈으면 좋겠어.

오빠의 입장에서 미현이 버는 돈은 카페 아르바이트 비용이니 법정 최저 시급 5,500원 정도 일 것이다. 대충 시급 6천 원 정도. 보통 6-8시간 일하니까, 최대 8시간이라고 치면 5만 원가량. 최대금액과 최소 금액 중간 정도의 금액이 4만 원이라 치면, 하루 종일 4만 원 버느라 동동거리는 것보다는 그냥 집에서 지내는 편이 낫다는 말이었다.

오빠가 지껄였던 말을 곰곰히 곱씹다가보니, 묘한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바흐가 관계후 따로 돈을 준 것이 그저 화대일 뿐이라고 치부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화대를 선금 오천만 원으로 지불했었고 그 뒤 라희가 따로 돈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는데 계속 돈을 주었다. 이점이 마음에 걸렸다.

실상, 그 돈에 담긴 의미는 괜히 나가서 일하지 말고 계약기간 동안 하고 싶은 거 맘 편히 하고 지내라는 의미였을까. 생각해보면, 뉴욕에서도 계약기간이 아니었는데 편히 쓰라고 돈과 카드를 건네줬었지.

아니, 아닐지도 모른다. 바흐의 입장에서는 그저 별생각 없이 팁으로 준 돈일 뿐일텐데도 괜히 의미를 부여해 생각한 것이 아닐까. 단순한 억측일지도.

라희는 고개를 휘휘 저어 머릿속 가득 찬 생각을 내몰았다.

어차피 뉴욕에서 정리된 관계다. 바흐가 일하는 지역, 만나는 사람, 의식주를 소비하는 공간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앞으로 라희와의 접점은 없다. 그냥 이대로 바쁘게 시간을 흘려보낸다면, 어느 순간 잊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뿐.

이곳 평창동만 해도 그렇다. 라희는 아마도 지금이 아니라면, 앞으로 이 지역 자체에 발 디딜 용무가 전혀 없었다. 고급 주거단지인 이 지역에 아는 지인이 한명이라도 있는 것도 아니고, 주거지 외에는 갤러리와 전시관만 존재하는 곳이니 앞으로 이곳에서 근무할 일은 더더욱 없다.

'평창동은 오늘이 마지막인가.'

오빠의 새 자취방이 있는 동네는 경복궁역 근처로, 평창동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다. 만약 오늘 한정식집에서 식사 약속이 잡혀 있지 않았다면, 결코 발걸음 하지 않았을 지역.

'그래, 마지막이니........'

더는 미련이 남지 않도록, 바흐의 본가에 한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어쩌면 뒤숭숭한 마음이 깨끗이 정리될 지도 모르고.

라희는 휴대폰 화면을 켜고 지도 앱을 실행시켰다. 바흐집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문학관. 휴대폰 GPS 버튼을 꾹 누르고 나서, 지도 상에 표시된 문학관을 살폈다. 오래지 않아 바로 보였다 XX 문학관. 현재 위치로부터 약 1km. 걸어서 15분 남짓한 거리.

라희는 지도 상 목적지를 문학관으로 설정해 놓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경사진 언덕길을 올라 구불거리는 골목으로 들어가니 문학관 건물이 보였다. 본가는 여기서부터 위쪽 길.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걸어갔다. 고급 단독 주택가답게 집집마다 모양이 각기 달라서, 오히려 길 찾기가 수월했다.

한참을 위로 거슬러 올라가자 CCTV 즐비한 골목이 나왔다. 이내 커다란 검은색 대문과 두 개의 널찍한 주차장 셔터가 나란한 집이 눈에 보였다.

바흐의 본가.

요새처럼 우뚝 솟은 담벼락 너머 넓은 정원 안쪽에 위치한 3층짜리 석조 건물은 은은한 조명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라희는 눈을 들어 본가의 3층을 살폈다. 실제 바흐가 거주하는 공간은 3층. 잠시 스친 기대와는 다르게, 건물 실외 조명등을 제외한 안쪽 창문은 어두컴컴하게 꺼져 있었다. 당연했다. 바흐는 뉴욕에 있을 테니까. 아주 잠깐, 3층 실내등의 불이 환히 켜져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서서 한참을 3층만 멀거니 바라보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서 손에든 휴대폰 화면을 키고서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지금은 벌써 9시가 훌쩍 넘었다. 후, 라희는 짧은 숨을 내쉬었다. 내일은 아침부터 발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조원들이 메일로 보내준 발표자료를 달달 외워서 능숙하게 프레젠테이션 하기 위해서는 일찍 기숙사로 돌아가 봐야 했다.

당장 이곳에서 출발해서 마을버스를 타고 나가 지하철을 타고 기숙사에 도착해도 10시는 한참 넘을 시간. 가서 씻고 정리하다 보면 발표 준비 시간은 더욱 부족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가자..."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리던 라희가 건물에 고정된 눈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마치 멀리서 중얼거림을 듣기라도 한 듯 본가 3층 구석 쪽 불이 환히 켜졌다. 위치상 바흐의 방.

"........!"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쿵쿵쿵. 가슴 가득 시끄럽게 울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라희는 눈을 크게 뜨고 3층을 응시했다. 불이 켜진 지 채 30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팟하고 불이 꺼졌다. 아까 전처럼 컴컴한 창문이 보였다.

방금 본 것이 헛것이었나 싶을 정도로 기가 막힌 타이밍. 라희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서 있다가 퍼뜩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홀린 듯, 멀리서 지켜보던 검은색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손을 들어 대문 벽에 붙어 있는 둥그런 초인종 버튼을 눌렀다.

"누구세요."

딱딱하고 메마른 중년 여성의 목소리를 듣자, 순간적으로 확, 정신이 돌아왔다.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란 라희는 그 길로 몸을 홱 돌려 언덕길을 뛰어 내려갔다.

어쩌자고 이런 짓을.

바보!

미쳤구나 드디어.

스스로를 향해 머릿속으로 온갖 비난의 말을 늘어놓으며 한참을 뛰어가 도착한 곳은 마을버스 정류장이었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한가한 마을버스에 몸을 싣고 빈자리를 찾아 털썩 앉아 있는데, 도무지 방금 저지른 일이 실감 나지 않았다. 진짜로 바흐의 본가를 찾아가 대담하게도 초인종을 눌렀을 줄이야. 분명, 인터폰으로 말을 건넨 목소리는 기억 속 임여사다.

화르륵. 순식간에 얼굴 위로 열감이 치솟았다.

라희는 한 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부끄럽고 민망했다. 갑자기 3층에 불이 켜졌다가 꺼진 것은 아마도 임 여사나 그 딸이 다른 용무로 방안에 잠깐 들어갔었을 때 잠시 불을 밝힌 것이었을 텐데, 스토커처럼 그걸 가만 지켜보고 서 있다가 대문까지 다가가서 무심코 초인종을 눌렀다니. 거기다 인터폰 화면 상으로 멍청하게 초인종을 누르고 있다가 누구냐고 묻자 화들짝 놀라 내뺀 모습이 또렷이 다 보였을 텐데. 창피하고 남부끄럽고 진짜 최악이었다.

"와아... 가지가지 한다. 진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푹 수그린 라희가 스스로를 향해 낮게 중얼거렸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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