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70화 (170/214)

170

"이상으로 저희 조의 과제인 컴플라이언스와 윤리의 한계 대한 발표를 모두 마칩니다. 오늘 발표한 내용에 대해 질문 있으십니까?"

라희는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손드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인사를 마치자 박수가 쏟아졌다. 다음 주가 기말고사. 학과 특성상 이번 주는 대부분의 과목이 조별 발표다. 오늘을 시작으로 하루에 한 과목씩 라희의 프레젠테이션이 예정되어 있다. 라희는 주말에 아르바이트하느라 조별 모임 활동에 참가하지 못하는 대신 발표담당을 맡았다. 발표 날에는 아르바이트 할 때와 마찬가지로 깔끔한 블라우스에 검은색 스커트를 입고 프레젠테이션을 했는데, 직장인 같은 단정한 복장 때문인지 교수님들이 흡족해하면서 점수를 후하게 주었다.

"휴."

드디어 월요일 마지막 수업인 경영윤리가 끝났다. 강의실 창밖은 6시가 다 되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가방을 챙겨서 나가려고 책상 위의 책과 필기구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같은 조원인 남자 선배가 말을 걸어왔다.

"라희야."

"네. 선배."

라희는 고개를 들고 선배를 힐끗 바라보았다. 어깨너머에 다른 팀원들이 보였다. 여자 둘 남자 넷.

"지금 우리 조원들 모여서 뒤풀이 갈 건데 같이 갈래?"

다른 때라면 생각해 봤겠지만, 오늘은 불가능했다. 수업 끝나고 바로 기숙사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서 3호선을 타고 엄마를 보러 가야 했다. 라희는 상대가 불쾌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 저. 선약이 있어서요."

그러자 뒤에 있던 다른 남자 선배가 와서 말을 건넸다. 지금 앞에 있는 선배와 같은 학번으로 절친한 친구 사이다.

"그러지 말고, 이제 학기도 끝나는데 뒤풀이 가자. 친목도 다질 겸. 다음 학기에 또 같은 수업 들을 거잖아."

"그게, 오늘 엄마가 지방에서 올라오셨거든요. 그래서 오늘 모처럼 같이 식사하기로 했거든요. 죄송합니다. 힘들 것 같네요."

라희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하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다면 할 수 없고."

둘은 몸을 돌려 다른 팀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가방을 챙겨 든 라희의 뒤로 서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내가 라희는 안 올 거라 그랬지?"

"그러게 좀 친해지고 싶은데 여간 힘들다. 기숙사에 틀어박혀서 평소 수업 때 아니면 말 걸기도 여의치 않은데."

"라희 걔 여기서나 예쁘장하지 진짜 예쁜 애들 클럽 가면 많아. 밥 먹고 저녁에 클럽이나 가자."

강의실을 나와 기숙사로 걸어가는데, 조금 전 둘의 대화가 머릿속에 떠다녔다. 라희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캠퍼스 길거리를 지나는 여자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연예인이 아닌 이상 입을 딱 벌리고 멍하니 바라볼 만큼의 미인은 아니었지만, 라희 또래 대학생들, 특히 보통이나 조금 마른 체격에 스커트나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여대생들은 어지간하면 다들 예뻤다.

어중간한 미인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멀리 찾을 것도 없었다. 주말마다 마주치는 코엑스 아르바이트 홍보 도우미들이나 나레이터 모델들도 죄다 예뻤다. 라희뿐만 아니라 거기서 일하는 도우미들에게 남자들이 다가와 명함을 건네며 만나자고 제의하는 일은 아주 흔했다. 이쪽 일을 하지 않는 수진이나 신기해하지 그곳에서는 자랑거리도 되지 않았다.

'잊었겠지....'

라희는 멀거니 허공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뿐 아니라, 뉴욕 특히 맨해튼은 여초 도시다. 더군다나 세계적인 미인들은 죄다 모여있는 곳이니. 더군다나 바흐는 여느 여자라면 마다하지 않을 조건. 거기까지 떠올리자 갑자기 입안이 썼다.

기숙사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 지하철에 올라탔는데 핸드백에 들어있던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발신인은 엄마였다.

"왜 엄마."

-라희니? 아직 도착안한거지?

"응. 가고 있는데."

-그럼, 경복궁역에서 내려서 녹궁으로와.

"녹궁? 식당이야? 왜 갑자기."

-일단 와. 와보면 알아.

무조건 그쪽으로 오라는 말을 남기고 엄마는 전화를 끊었다. 라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휴대폰으로 녹궁을 검색해 보았다. 유명한 평창동 한정식 식당. 오늘 저녁 간단히 오빠 자취방이 있는 경복궁역 근처에서 저녁을 먹을 줄 알았더니 식당이라. 그것도 집안 행사 때나 가는 한정식 식당. 갑자기 기분이 싸했다. 아마도 뿔테 때문에 한정식 식당에 트라우마라도 생긴 듯 했다.

경복궁역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목적지를 녹궁이라고 말하고 나니 십여분 지나 고풍스러운 검정 기와 솟을대문 앞에 내려주었다. 검정색 현판에 녹궁이라고 한자로 써있는 문을 지나 들어가자 아담한 마당에 잘 가꿔진 정원이 나왔다. 뿔테와 갔었던 필경재와 비슷했지만, 규모는 매우 작았다. 기와건물인 식당안으로 들어가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바로 엄마가 마중나와 미닫이 문 즐비한 복도쪽으로 이끌었다.

"엄마, 무슨 바람이 불어서 한정식집이야? 여기 고궁 근처라 비싸보이는데."

"얘는. 오늘 만날 사람이 있어서 그래."

"누구?"

라희의 물음에 엄마는 뭔가 생각하는듯 눈을 깜빡이다가 목소리를 낮춰서 조곤조곤하게 대답했다.

"오늘, 너네 오빠집에 갔더니 글쎄."

엄마는 말을 멈추고는 다시 목소리를 한층 낮춰 속삭였다.

"여자가 있더라."

"......."

여자라. 작년 가을, 노량진 옥탑방에서 오빠와 함께 있던 그 여자일까? 그때 듣기로는 임용고시 공부하는 척 코스프레하면서 오다가다가 만난 사이 같던데. 아니면, 다른 여자? 고새 또 여자를 사귀었을까.

라희는 복잡한 심경으로 아무런 대꾸없이 서 있었다. 본인이 던진 말에 깜짝 놀란 딸을 예상했다가 의외로 라희가 덤덤하게 아무말 하지 않자, 엄마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이며 물었다.

"너 혹시 알고 있었어?"

"아니. 몰랐어. 근데 오빠에게 먼저 연락 안하고 집에 간거야?"

라희의 물음에 엄마는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여기 이사한 자취방 내가 계약해서 번호키를 알고 있었거든."

결국 연락하지 않고 불쑥 찾아갔다는 뜻이다. 구정이후 라희는 집안에 일체 연락을 하지도, 작년 여름 이후 집안에서 생활비 지원을 받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일은 몰랐다. 라희야 기숙사에 살고 있으니 신경쓸 일이 없다지만, 그래도 서른이 다 되어가는 오빠의 자취방 계약에 시골에 사는 엄마가 올라와 나섰다는 말을 듣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여튼, 안에 오빠 여자친구 있으니까 그리알고. 이만 들어가자."

엄마는 말을 마치고 미닫이 문을 열었다. 4인용 테이블이 있는 아담한 방안에는 오빠와 처음 보는 여자가 앉아있었다. 갈색으로 염색하고 허리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린 긴머리의 화려한 인상의 여자는 풀메이크업을 한 얼굴로 활짝 웃으며 라희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라희씨. 말씀 많이 들었어요."

교태어린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알 것 같았다. 작년 가을, 옥탑방의 그 여자였다.

"안녕하세요. 성함이...?"

라희가 쌩하니 묻자, 여자는 싱긋 웃었고 여자 옆에 앉아있던 오빠가 대신 말했다.

"김미현씨야. 앉아라."

이내 테이블 위로는 주문한 코스요리가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먼저 죽이 나왔고 그다음 물김치, 그리고 구절판과 냉채등 한정식 집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메뉴들이 테이블 위를 채웠다. 미현은 시종일관 웃는 낯으로 오빠와 엄마에게 애교어린 목소리로 음식을 권했다.

"오빠, 이거 내가 싼 구절판인데, 아 해봐."

"우리 미현이가 만들어 주는 거라면 뭐든 맛있어."

건너편에서 싸늘히 내다보는 라희의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은 둘은 익숙한 듯 닭살행각을 이어갔다. 곧 에피타이저인 전복과 소라무침이 나오자 미현은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님, 전복구이 좀 드셔보세요. 데리야키 소스라서 간이 짭짤하니 맛있어요."

"그래? 먹어볼까."

엄마는 미현이 권한 음식을 먹으며 미소를 보였지만, 라희는 갑작스러운 이 자리가 껄끄러워 젓가락만 깨작거렸다.

"어머, 라희씨 전복 싫어하시나봐요. 손도 안대셨네. 이거 오빠 드려도 되요? 우리 라현씨가 전복 좋아하거든요."

어느새 연신 라현씨 라현씨,라고 오빠 이름을 부르며 혀짧은 애교 목소리로 오빠를 챙기는 극성에 라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고마워요. 오빠, 아."

"음, 맛있다."

직계 가족을 앞에두고도 둘은 깨가 쏟아졌다. 후, 긴 한숨을 내쉰 라희가 앞에 놓인 소라무침을 젓가락 끝으로 밀어 저만치 내놓자, 미현이 냉큼 접시를 집어들며 말했다.

"라희씨는 소라 알레르기가 있으시다면서요? 이거 오빠 드려도 되죠?"

"아.....네."

무심결에 대꾸하는데, 갑자기 기분이 묘했다. 라희는 미현을 응시하며 날카롭게 물었다.

"그거, 어떻게 아셨어요?"

"아, 전에 오빠가 동생 사진 보여준다면서 라희씨 블로그 보여준 적 있거든요. 거기에 적혀 있어서 알았어요."

"네?"

"포스트 2개인가 있던데, 그중 하나가 기숙사 친구들끼리 놀러 간 소래포구에서 소라찜과 대하구이를 시켰는데 소라 알레르기가 있어서 아무것도 못 먹었다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공강 시간에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커피 마시는 사진이던데요."

생갔났다. 대학교에 1학년 때 기숙사 룸메이트들과 함께 사이좋게 지내다가, 그중 부모님이 소래포구에서 장사하는 친구가 있어서 거기에 놀러 간 적이 있다. 당시에 학교 과제로 파워블로그를 주제로 레포트를 쓰다가 문뜩 N사에 블로그를 만들고 두어 개 정도 포스팅 하고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라희씨 이름 입력하면 바로 블로그가 떠요. N사 포털에."

미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뱉은 말을 듣고 있으려니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이제야 설명이 되었다. 그렇게 알았구나. 바흐는. 인터넷으로 라희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봤던 거다. 이제야 버즈 알 아랍 레스토랑에서 바흐가 알고 있었던 정보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당시 블로그를 개설할 때 레포트에만 신경을 쓰느라 닉네임조차 설정하지 않고 실명으로 개설했는데, 그것 때문에 바흐가 알고 있었다니. 반면에 라희는 한 번도 한진욱이나 데이빗 한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해 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독히도 무심했구나. 나는.'

뉴욕에서 고작 몇 번 본 제프가 반복해서 지적했던 냉담하다는 평가는 틀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냥, 수동적으로 주어진 상황을 미련스럽게도 거부하느라 그랬던 것 같다. 원치 않은 관계. 원치 않은 장소. 원치 않은……. 이라는 핑계를 끊임없이 마음속 높은 성벽처럼 둘러치면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쩜 지금 상황이 당연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심을 보여 봤자 반응 없는 냉담한 상대. 어느 날 함께 지내던 뉴욕에서 그동안 받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연히 귀국해버렸다면, 상대가 누구든 잊지 않는 편이 이상하다.

라희가 미간을 좁히고 있는 사이, 테이블 위로는 식사 메뉴인 비빔밥이 나왔다. 반질반질한 넓은 유기그릇에 색색이 둥그렇게 놓인 비빔밥 고명은 과연 한정식 전문점이구나 싶을 정도로 고왔다.

잠시, 라희가 비빔밥 모양을 감상하는 동안 맞은편 오빠가 빠른 손놀림으로 쓱쓱 비벼서 게걸스럽게 입안 가득 떠먹는 모습이 모였다. 같이 성장하면서 늘 보아왔지만, 볼 때마다 참 지저분해서 동석한 사람 밥맛 떨어지게 먹는다 싶은 그런 더러운 모습이었다.

몇 번 수저가 오가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오빠 그릇 안 비빔밥은 싹 다 비워졌다. 제 밥을 다 먹은 라현이 양이 부족한 듯한 표정으로 빈 그릇을 내려다보자, 옆에서 비빔밥을 비비던 미현이 오빠의 빈 그릇에 자신의 밥을 절반가량 옮겨 담으며 활짝 웃었다.

"어머, 우리 자기 시장했나 보네. 어서 드세요."

"어어, 이거, 이거 나만 먹을 수 있나. 자, 내가 한입 떠 줄게. 아."

두 사람은 서로의 침 묻은 숟가락을 입에 넣어주며 활짝 웃었다. 눈앞에서 보기에는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지저분한 행위였지만, 개의치 않아 보였다. 그다음 코스는 디저트였다. 잣과 대추가 동동 띄워진 수정과와 과일이 나왔다.

"미현이가 우리 라현이를 잘 챙기는구나. 역시 여자친구라서 데면데면한 동생이랑은 다르네."

엄마가 수정과가 담긴 잔을 기울이며 말을 건네자, 미현은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요, 어머님. 저희 천생연분인걸요. 오죽하면 이름도 끝자가 같잖아요. 라현, 미현."

"미현이가 있어서 안심되는구나. 내가 매번 라희에게 같은 서울에 살고 있으니 가끔 가서 오빠 방 청소도 하고 음식 좀 챙기라고 해도 소용없었거든."

"어휴, 그건 걱정 마세요. 어머님. 오빠가 어찌나 제가 만든 음식을 좋아하는지 밥을 두 공기씩 비워요."

미현이 눈웃음치며 말하자 라현이 덧붙였다.

"우리 미현이는 라희랑은 차원이 다르지. 라희는 엄마가 시키면 시킨 것만 뚱한 얼굴로 마지못해 했잖아."

"...그래, 잘됐구나. 여자가 음식 잘하는 것도 남자 복인데. 그런데 아까 이야기 나누다 말았는데 대학 졸업하고 지금 하는 일이...?"

아침 드라마에서 아들의 여자친구를 앞에 둔 어머니들이 그렇듯, 엄마가 은근히 떠보는 말투로 말꼬리를 올리자, 라현이 말을 자르고서 입을 열었다.

"전에 노량진에 있을 때 거기 카페 아르바이트했는데, 내가 그만두라고 했어."

흘기는 눈짓을 받은 라현은 팔을 뻗어 옆에 앉은 미현의 어깨를 감싸 쥐어 자신을 향해 끌어안다시피 하며 말했다.

"나 이번에 취직했잖아. 우리 미현이 초대 졸에다가 학점이 안 좋아서 어차피 아르바이트 밖에 못해. 괜히 돈 몇 푼에 스트레스받으며 일하는 거 보느니 그냥 내가 번역 아르바이트라도 하면서 좀 더 벌려고. 그리고 우리 곧 결혼할 거야 엄마.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건 알지?"

불쑥 꺼낸 오빠의 결혼 발표를 들은 엄마는 순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너 취직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지금 내가 다니는 곳이 중소기업이긴 해도, 정년 보장된 탄탄한 곳이고 이제 불안정한 인턴도 끝나고 정사원 되었잖아. 그냥 둘이서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을 거 같아. 남자로서 사랑하는 여자가 돈 몇 푼 벌려고 밖에서 아등바등 고생하는 거 보기 싫고. 그냥 집에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편히 지냈으면 좋겠어."

"........"

너무나도 당당한 선언이었다. 할 말을 잃은 엄마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옆에서 생글거리며 뿌듯한 표정으로 라현을 바라보던 미현이 고개를 돌려 엄마를 향해 말을 건넸다.

"어머님, 제가 앞으로 오빠를 책임지고 잘 내조할게요. 걱정 마세요."

미현은 해맑게 웃었다. 엄마는 수정과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서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

"아, 그리고 엄마."

라현은 잔뜩 기분이 가라앉아있는 엄마를 불렀다. 엄마가 고개를 들자, 라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 말을 뱉었다.

"지금 사는 데가 월세라서 다달이 적잖이 부담되는데, 혹시 전세금 좀 있으면 도와줘. 거창하게 아파트까지는 안 바랄 테니까, 빌라라도 신혼기분 낼 수 있는 깨끗한 곳이면 좋겠어. 어차피 나 장가보낼 생각은 하고 있었던 거지?"

"그래요 어머님. 저희 이대로 계속 월세 살면 돈 못 모아요. 도와주실 수 있으시면 조금 도와주세요. 네?"

옆에서 미현이 생글생글 애교 있게 웃는 낯으로 거들었다. 엄마는 긴 숨을 한번 내쉬고는 옆에 앉은 라희를 힐끔 보며 눈치를 봤다.

"실은, 오늘 가져온 돈이 조금 있긴 한데…. 얼마 되지도 않고, 라희에게 주려던 돈이라서. 오늘 이 돈 때문에 라희를 부르기도 했고."

엄마는 머뭇거리며 라희의 기분을 살폈다. 아무래도 오빠에게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엄마가 꺼낸 말을 들은 오빠가 반색하며 곧바로 물었다.

"얼만데?"

"……. 천만원."

라희는 두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작년 가을쯤에 엄마가 준다고 했다가 소식이 없던 5백만원이 불어 천만 원이 되었나보다.

"야, 라희 너."

라현이 라희를 향해 눈매를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때 의사 남친 있었지?"

"어머, 아가씨 남자친구 의사에요? 어쩜!"

옆에서 미현이 높은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접때 그 돈도 그 친구가 준거 아니야?"

그 돈. 오천만원을 말하는 건가. 라희는 잔뜩 날을 세운 눈으로 라현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오빠."

"너 천만원 필요없지? 어차피 남자친구 돈이잖아. 그친구 여자친구에게 돈도 척척 내줄정도인데, 그냥 이돈 내가 쓸게."

기가찼다. 지금껏 라희가 오빠 대신 돈을 갚아서 편히 살았음에도 일말의 미안한 감정이나 불편한 기색 없이 떳떳한 태도라니. 라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크게 말했다.

"듣자하니까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그 때 그 돈, 오빠 내가 대신 갚은거 알기나해?"

"그니까. 고맙다고. 니가 징징대니까 능력있는 남자친구가 갚아준거 아니야. 넌 어차피 그 치랑 잘 될거 같으니까 이돈 내가 쓴다고. 오천만 원도 껌으로 갚아줬으면 돈푼깨나 있을거 같은데. 야, 유니세프 돕지 말고 가까이 있는 친오빠나 도와라. 듣자하니 너 요즘 잘나간다며? 집에서 돈 한푼 받지 않아도 될만큼 아르바이트로 잘 벌고 있다며. 너는 너혼자 벌어서 니가 쓰면 되지만, 우린 이제 부부가 될거고 둘이잖아. 외벌이로 둘이 살면 얼마나 팍팍하냐, 그나마 여유있는 니가 양보해야지."

적반하장이었다. 라현은 라희가 자신의 돈을 갚아준 것이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라희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서 주먹을 말아쥐었다가 옆에서 찍소리 않고 있는 엄마를 향해 날카롭게 물었다.

"엄마. 엄마가 말해봐. 천만 원, 오빠 줄 거야? 지난가을, 나 주려다 만 돈이지? 그거."

"아니…. 그게. 넌 든든한 남자친구도 있고, 통역 아르바이트인지 해서 돈도 잘 벌고 있는 거 같길래.."

"하!"

라희는 커다란 실소를 터트렸다.

역시 뉴욕에서 혼자서 내린 결론이 맞았다. 결국, 진짜로 주제넘었던 거다. 라희가 오빠 돈을 갚느라 전전긍긍하며 신경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고생하는 동안, 오빠는 겉으로는 임용 준비한다 말해 놓고서 속으로 여자친구와 희희낙락 연애했고, 엄마는 말로만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다, 걱정된다 하면서 정작 빚 갚으라고 모아둔 돈을 라희에게 건네는 대신 오빠에게 주고 싶어했다.

갑자기 정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정신이 화들짝 들었다. 대체 이 사람들이 라희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평생을 함께 가족으로 자란 라희는 오늘 처음 본 미현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좋아. 그 돈 오빠 가져. 그리고 엄마."

라희는 싸늘히 입을 열었다.

"아니, 오빠, 엄마, 미현씨 다 똑똑히 들어 줬으면 해."

방안 모두의 시선이 라희를 향한 가운데 라희는 분에 못이겨 눈을 한번 질끈 내리감았다가 뜨고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맘때였지. 지난여름에 오빠가 차 사고 낸 돈 오천만 원. 내가 대신 갚았어. 오빠나 엄마의 터무니 없는 망상처럼 부자인 의사 남자친구가 갚아 준 것도 아니었고, 떳떳지 못한 돈으로 직접 갚았어. 일 년 이자만 천오백이었고. 총 육천오백이었어. 아직도 남았고, 그 돈 갚느라 허리가 휠 정도야. 그리고 내겐 의사 남자 친구 따윈 없어. 지난가을 집에 왔던 그 남자는 그냥 알고 지낸 사이였고 그때 끝났어."

실제 사실관계 따윈 고려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들은 모르니까. 라희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숨을 몰아쉬고는 다시 이었다.

"그러니까, 나, 이 정도면 자식 된 도리 남매 된 도리 충분히 했다고 봐. 지금도 그 빚 나 혼자 갚고 있으니까 앞으로 일 년에 천 오백씩 대신 이자 내주던가, 전체 원금 갚을 돈 주던가 할 때까지, 나한테 일절 연락하지 마. 엄마와 오빠는 물론 그쪽 미현씨도 내게 연락할 생각 하지 마요. 이런 식으로 밥 먹자, 어쩌자 불러내지도 말고, 명절 때도 갈지 안 갈지 전날 문자로 통보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말을 마친 라희는 벌떡 일어나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라희야!"

뒤에서 다급하게 엄마가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깨끗이 무시하고 빠른 걸음으로 한정식집을 뛰쳐나갔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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