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69화 (169/214)

169

마감 직전. H 백화점 식품관은 복작이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마감 떨이 초밥과 롤이 3개 만원!"

"고로케 5개 만원!"

"지금부터 케익 만원!"

사방에서 시끄럽게 호객하는 소리가 들린다. 코엑스에서 퇴근하고 걸어서 10분 거리. 여기까지 이동하는 시간 내내 고민했지만, 아직 메뉴를 정하지 못했다. 라희는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3묶음 4묶음씩 랩핑되어 수북이 음식물이 쌓여 있는 매대와 큰 포장으로 두 개씩 묶인 요리코너를 지나다가 매운 볶음밥과 캘리포니아롤 2묶음을 집어 들었다.

"만원입니다."

직원에게 현금을 건네 물건값을 치르고 나서 백화점 쇼핑백을 손목에 걸치고 터벅터벅 걸어 지하철에 올라탔다.

일요일 저녁이라서인지 지하철 내부는 토요일인 어제보다는 한가했다. 습관처럼 귀에 이어폰을 꽂고서 멍하게 지하철 창문에 붙은 광고용지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음악을 들었다. 학교까지는 15 정거장 남짓.

규칙적으로 정차와 운행을 반복하는 지하철 내에서 멀거니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였다. 유리창 저 너머 승강장을 오가는 사람 중에 키가 큰 남자가 계단 쪽으로 스쳐 지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라희는 못 박은 듯 그 남자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남자가 위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뒷모습만 보였다.

비슷한 큰 키. 비슷한 검은색 윤기나는 머리카락. 하지만, 입고 있는 옷은 깔끔한 세미 케주얼 정장이 아닌, 칙칙한 회색 후드 점퍼에 헐거운 청바지다. 어깨에 멘 백팩까지.

아니다. 그가 아니다. 바흐가 대중교통을 이용할 일은 전혀 없으니까. 그리고 옷차림새도 다르고. 그는 항상 단정한 모델핏의 디자이너 수트만 입었다. 심지어 케주얼 룩도 그랬다. 그러니, 저기 저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분명하다.

하지만 라희는 홀리듯 남자가 사라진 계단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정차했던 지하철이 운행을 시작해 유리창 너머 승강장이 차츰 멀어져 완전히 시커먼 어둠 속에 묻힐 때까지. 눈 하나 깜빡이지 못하고서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언니!"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어와 기숙사 문을 열자, 룸메이트인 수진이 문앞으로 달려와 반갑게 맞았다.

"저녁 뭐 사왔어요?"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맘이 있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수진은 라희의 귀가보다는 손에 들고온 백화점 쇼핑백에 온통 정신이 쏠려 있었다. 쇼핑백을 받아든 수진이 안을 벌려 음식이 뭐 뭐 있나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맛있는거? 어제 고로케와 만두는 너무 기름져서 느끼하던데. 와, 캘리포니아 롤이네요!"

"응. 같이 먹자. 일부러 넉넉하게 사왔으니까. 너 좋아하는 연어 롤도 하나 챙겼고."

"언니, 고마워요."

수진은 뛸 뜻이 기뻐했다. 같은 과 1년 후배인 수진은 학기초 기숙사 룸메이트 배정 기간중에 일부러 라희가 지내는 방을 신청해 입관했다고 했다. 같은 과라서 과제나 수업 들을 때 도움받을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라희 동기들로부터 성격이 무난하다는 평가를 들었다며 잘 부탁한다고 악수를 건네를 수진은 귀여워보였다. 함께 지내는 동안 만약 라희에게 여동생이 있다면 수진이 같이 밝은 성격이면 잘 지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오늘은 몇 장 받았어요?"

입안 가득 연어롤을 오물거리며 수진이 물었다. 라희는 나무젓가락을 들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턱끝으로 침대 위에 놓아둔 핸드백을 가리켰다.

"별로야. 실망스러울 걸? 직접 확인해봐."

라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쪼로로 침대맡으로 달려간 수진은 핸드백을 열어 구석에 나뒹굴던 명함을 찾아냈다. 하얀색 두 장.

원래는 죄다 버리는 거였는데, 어느날 미처 버리지 못한 명함 한장을 수진에게 들킨 이후 이 기묘한 확인작업이 시작되었다. 라희가 주말동안 일하는 도중 남자들로부터 받은 명함 장수를 확인하는 일에 묘한 흥미를 보인 수진은 명함을 버리지 말 것을 부탁했고, 라희는 수진의 요구대로 남자들에게 받은 명함을 고스란히 기숙사까지 들고와 수진에게 주었다.

"에게? 꼴랑 이게 다에요? 과장, 그리고 팀장. 직급도 그저그러네. 오늘 진짜 수확이 저조하네요. 역대 최저에요."

수진은 몹시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곧바로 손에 든 명함을 챙겨 자신의 책상 서랍을 열고 원래 있던 명함 뭉테기에 쌓아놓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가만보자, 지난번 언니가 제일 많은 명함을 받은 날이 열 두장이었는데. 오늘은 앞에 10장이 뚝 날라갔네요. 두 장이 뭐야. 두 장이. 언니 분발해욧!"

"분발은 무슨."

라희가 건조하게 대꾸하자 수진은 책상 위 펼쳐놓았던 연어롤을 하나 집어 들고 입에 넣었다.

"언니, 어찌 보면 진짜 얄밉다. 막 남자들 보면 무감감해요? 마구마구 질리도록 대쉬받아서? 지난번 명함에 상무인지 이사인지도 있었잖아요. 그런 남자들 보면 사귀고 싶다는 생각 안들어요? 학생과 달리 돈도 많을 텐데."

"왜? 남자가 돈 많으면 좋아?"

"당연한 소리를 하세요. 언니 가만보면 가끔 이상한 질문을 던지더라. 돈 많으면 좋죠. 데이트할 때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차 타고, 나중에 혹시 결혼해서 잘 되면. 에이 알잖아요. 남들 보다 편하게 사는거. 어쩌면 지긋지긋한 취업난 겪지 않아도 되고요."

"취집하고 싶어서 그래?"

라희가 뾰족하게 묻자,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졸업하고 어디 취업해서 먹고 살아야하나 막막할때 여자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 해보지 않아요? 선배 언니들 이야기 들어보면 어차피 입사해서 직장생활 반짝하고 좋아봐야 5년이고 그 다음부터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다닌다던데. 거기다 결혼하고 맞벌이까지하면서 애라도 생기면 완전 헬게이트 열린다고 했단말이에요. 언니는 그런 생각 안해봤어요?"

수진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라희는 볶음밥을 떠먹던 수저를 입술 위에 올리고서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 그러다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안해봤어."

"우아, 더 얄미워졌어. 언니가 그런말 하니까 막 힘빠지는거 있죠. 왜요? 왜 안 해봤어요? 이제 한 학기 지나면 4학년이고 바로 졸업반이잖아요."

"그거, 많아 봐야 남의 돈이잖아. 내 돈도 아니고.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 모르니? 졸업과 동시에 취직 성공해서 내가 벌어 내가 쓰며 맘 편하게 살아야지."

"왠지 언니가 태연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니까, 공익 방송 홍보멘트 같아요. 이를테면 여성부? 언니는 전혀 그렇게 안 생겼는데. 그냥 남자 골라서 시집가서 편히 살아도 될 외모거든요. 그래서 언니는."

수진은 씨익 웃었다.

"반전매력 있어. 언니가 이런 강철 멘탈인 거 우리과 남자 선배들 다들 모를걸요? 그러고 보니 조별모임 과제 프레젠테이션 할 때 똑 부러진 모습과 일치하긴 하네요. 언니 별명 A+ 폭격기잖아요. 일단 조별 프레젠테이션하러 떴다 하면 그 조는 A+이라고. 근데, 안 떨려요? 사람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할 때?"

"그거야, 지금 하는 아르바이트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잖아. 그리고. 음."

그깟 일로 떨릴 이유도 없고. 이어지는 뒷말은 그냥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그보다 더한 일들을 충분히 겪었다. 나영, 유진, 그리고 처음 보는 뿔테 가족들까지. 싸늘한 경멸의 눈초리 흘리며 앉아 있는 대상도 아니고 아무런 악의도 적의도 가지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 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일이 떨릴 것이 없잖은가.

이내 이어지는 수진의 끊임없는 수다 속에서 느긋한 저녁 식사를 마쳤다. 내일 아침은 월요일. 첫 수업은 재무관리, 그다음은 조직 행동, 기업윤리 이렇게 3과목이다. 전부 3학점짜리 전공 필수수업으로 오후 6시까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공강 시간이 없다.

'가만, 내일 제출해야 할 마지막 레포트가...'

책상의 서랍을 뒤적이며 미리 작성해둔 레포트를 찾고 있는데, 침대 위에 놓아둔 핸드백 속에서 요란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니, 여기 전화요."

책상에서 멈칫하던 라희를 대신해 수진이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내 가져와 라희에게 건넸다.

[엄마]

발신인을 확인한 라희는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응, 엄마."

-라희니? 저녁 먹었어?

"응. 먹었어. 근데 왜?"

-아, 그게 내일 밑반찬이랑 김치 좀 가져다 주러 엄마가 오빠네 가거든 겸사겸사 저녁에 시간 맞으면 볼까 해서. 같이 저녁 먹지 않을래?

"......."

귀국한 이후, 구정 때 오빠를 본 일을 제외하고는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구정 당일날 시골집에 내려온 오빠는 지난해 임용시험에 실패하고 나서 일반 회사에 인턴으로 취직했다고 제법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라희야?

채근하듯 묻는 엄마의 목소리. 오빠와 마주치기는 싫지만, 엄마를 보려면 어쩔 수 없다. 라희는 짧게 답했다.

"알았어. 내일 어디서 봐? 이사한 주소 잘 모르는데."

-강북이야. 주소 보내줄 테니 거기로 오렴.

"그럼 내일 봐. 엄마."

통화가 종료된 휴대폰 화면을 팟 하고 끄고 나서 라희는 책상에 앉아 턱을 괴고 멍하니 앉아 생각에 잠겼다. 엄마와 통화 이후 조금 전 먹은 음식이 체한 듯 속이 갑갑했다.

살풋 미간을 찡그리던 라희의 두 눈이 책상 구석에 놓인 탁상 달력에 고정되었다. 곳곳에 붉은 글씨와 동그라미가 어지럽게 그려져 있다. 다음 주 부터 있을 기말고사 스케줄. 몰아치듯 기말고사가 끝나면 곧바로 여름 방학.

올 여름방학은 교직 이수 학점 때문에 계절학기 수업을 듣느라 바쁘게 지낼 계획이다. 실상, 작년부터 들어서 학점을 맞췄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빠 때문에. 그리고 오빠 때문에 바흐를 만났다.

문득 오늘 지하철에서 스치며 지나간 남자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단지 바흐와 체격과 머리스타일이 닮은 사람을 본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한동안 먹먹한 느낌이었던 심장은 이내 저릿하게 아파져 왔다.

그날. 갤러리에서 바흐가 모습을 감춘 이후, 라희는 JFK공항 새벽 첫 비행기에 올랐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잔상. 망막에 새긴 듯 또렷이 남아 있는 그의 뒷모습. 한동안은 눈을 감았을 때도 눈앞에 아른거렸었다. 이제 시간이 흘러 많이 잠잠해졌다 싶었는데, 오늘 바흐와 비슷한 외형의 남자를 본 것만으로도 마음이 이리저리 들쑤셔져 뒤죽박죽 심란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머릿속 생각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림으로 튀어나왔는지, 옆 책상에서 만화책을 활짝 펼쳐 들여다보던 수진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누구요? 언니 엄마?"

"아니...... 응. 엄마. 엄마 생각했어."

라희는 급히 말을 정정했다. 그러자 수진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어차피 내일 만나기로 한 거잖아요. 지금 걱정할 필요없이 내일 가서 확인해 보면 되겠네요."

"그래. 그래야지."

라희가 무겁게 가라앉는 눈꺼풀을 내리 닫으며 짧게 답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