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68화 (168/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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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희씨. 여기."

안경 쓴 매니저가 손짓하며 불렀다. 옆에는 덩치 큰 백인이 서 있었다. 와이셔츠, 정장 바지 그리고 목에 건 신분증까지. 신분증에 걸린 푸른색 글자를 보니 이번 국제 의료기기 전시회에 참가한 바이어였다.

"네. 제가 할게요. How can I help you? Sir."

라희는 능숙하게 백인 남자 옆으로 다가갔다. 남자는 앞에 놓인 기계를 가리키며 설명을 요구했다.

"This is a capsule massager along with acupressure treatment. This is for medical application and only to be carried out by a physician. It offers you three types of therapy such as audio sonic, percussion and gyrators.."

라희는 어제저녁 밤새 달달 외운대로 캡슐 모양 마사지 기계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백인 바이어는 직접 들어가 누워서 사용해 보기도 하고, 옆에 달려있는 스위치에 대해 물어보기도 하면서 제품에 대한 흥미를 나타냈다. 라희는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고 마침내 만족한 바이어는 매니저를 만나러 전시실 부스 안쪽으로 들어갔다.

"휴."

라희가 짧은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폐장시간이 코 앞이라 그런지 넓은 전시회 장내는 한산했다.

코엑스에서 열린 총 3일간의 전시기간 중, 오늘이 마지막 날. 아침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정해진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내내 하이힐을 신고 바른자세로 서 있어서인지 폐장시간이 다 되어가자 발바닥부터 종이리까지 아릿하게 저려왔다.

이제 30여분만 있으면 근무가 끝나기 때문에, 에이전시에서 총 3일간의 계약근무 임금을 지급할 거였다. 3일 내내 성실하게 일했기 때문에 보너스로 몇만원 더 얹어 줄거 같았다. 이제까지 계속 그렇게 받아왔으니까.

이번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다음 주에는 LED Korea라는 전자기기 박람회가 예정되어있다. 오늘과 마찬가지로 전시 통역 도우미다. 이번달은 주말마다 스케줄이 꽉 차있어서 당분간 돈 걱정은 없을 듯 했다. 금토일 이렇게 삼일 꼬박 근무하면 손에 쥐게 되는 돈은 50여만원 남짓. 일 자체도 크게 힘들지 않고, 한달 동안 서너번의 행사가 있으니 받은 일당으로 생활비와 용돈을 충당하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다행이지.'

라희는 지난 겨울에 귀국해서 대학교 봄학기에 바로 복학했다. 학과 수업을 듣고 자격증 준비로 정신없이 바쁘게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복도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온 같은 과 동기를 만났다. 이름은 이지영. 중학교 때 대기업 주재원인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에서 3년 동안 살다가 귀국한 지영은 사교적인 성격으로 라희를 보자 굉장히 반가워했다.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 작년에 전화번호 갑자기 바꿨잖아? 페북도 안 하고. 카톡도 안 하고. 과방에도 없고 통 연락이 돼야 말이지. 아휴, 우리 그때 친하게 지냈던 동기 중에 지금 학교 다니는 애들 몇 없다 얘. 다들 어학연수다, 휴학이다, 공무원 준비다 해서 뿔뿔이 흩어져서 말이지."

지영은 라희를 바로 이런저런 근황을 물었다. 2학년 때까지는 학교에서 얼굴 보고 연락했던 친구였기에 라희도 모처럼 만난 지영과 반가운 마음으로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가볍게 수다를 나누었다. 종종 지영이 코엑스에서 통역 도우미 아르바이트 할때 쇼핑갔다가 일부러 보러 가기도 했을 정도로 그나마 과 동기들 사이에서는 가까운편이다.

"영국에 있었구나. 돌아와서는 기숙사에서 지내는 거야? 이번 신관 생겨서 시설이 좋다는 말 들었어. 어때?"

"좋던데? 깔끔한 2인실에 전부 새 거라서 기분이 산뜻해."

"인원도 줄었네? 예전에는 4인실이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라희 너는 1학년 때부터 기숙사 살았었잖아. 아니다. 지난해에는 자취한다고 했었나? 그럼 다시 돌아온 거네."

"응. 이번에 신관으로 바뀌면서 2인실과 1인실이 새로 생겼더라고. 1인실은 아무래도 부담돼서. 가격이 거의 두 배거든."

"1인실이 좋긴 하지만, 역시 비싸면 부담이지. 참, 혹시 아르바이트하지 않을래? 영국에서 지냈으면 대충 말하는 것은 되니?"

지영은 자신이 일하고 있는 통역 도우미 에이전시에서 이번에 큰 국제 전시를 맡게 되었는데 인원이 부족하다는 말을 했다. 별일은 아니고 지나는 외국인이 도움을 요청하거나 부스에서 매니저들이 영어 통역 요구하면 가서 말만 전해주면 되는 거라서 기본적인 의사소통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앞으로 쭉 통장에 남아 있는 돈으로 생활하는 일은 심리적으로 상당한 부담이었기에 뭔가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얼만데?"

라희의 물음에 지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쪽 일이 등급이 있어서. 라희 너는 제일 낮은 액수를 받게 될 거야. 처음이니까. 나중에 경력도 쌓이고 Akei(한국전시산업진흥회)에서 전시회 통역사 교육 수료하고, 자격증 따고 그러면 등급이 올라가. 어때? 해볼래? 하루에 8만 원 정도 받을 거 같은데."

그렇게 지영을 따라가 에이전시에 등록하고 통역 도우미 일을 시작했다. 일은 생각보다 편했다. 단정한 하얀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스커트 그리고 살색 스타킹 검은색 하이힐 이렇게만 입고 온종일 서서 바이어들이나 입장객의 통역 요청이 있을 때 친절히 응대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몇 달을 일하자 등급이 올라가서 전시회 일반 도우미가 아닌, 개별 부스에 소속된 통역사로 일하게 되었다. 기본적인 제품이나 안내사항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전문용어와 내용을 사전에 숙지해 달달 외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대신 임금이 높아졌다. 간혹 가다 처음 에이전시를 소개해준 지영과 함께 일하기도 해서 가벼운 수다로 근무 중의 피로를 달랠 수도 있었다.

"......."

라희는 피곤한 발끝을 살짝 들어 올려 둥글게 빙 돌렸다. 이제 곧 폐장시간. 일을 마치고 에이전시에서 임금을 받고 나면, 기숙사 저녁 식사 시간을 훌쩍 넘기기에 저녁으로 먹을 것을 따로 구입해 귀가해야 했다. 대충 김밥이나 떡볶이 같은 분식으로 때울까, 아니면 햄버거를 먹을까 고민하고 있던 그때였다.

"저기.."

옆에서 들려오는 남자 목소리. 라희는 고개를 들었다. 한국인. 나이는 30대 정도. 중간 정도의 키. 평범한 얼굴. 고급스러운 검은 정장을 빼입고 손목에는 번쩍이는 금색 시계를 둘렀다. 전시회장에서 통역 도우미 일을 하다 보면 여러 번 겪게 되는 불쾌한 일.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제 익숙하기까지 하다.

라희는 무표정한 시선으로 남자를 보며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네. 용건 말씀하세요."

남자는 입가에 사교적인 웃음을 머금고는 정장 상의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 김재명 팀장 DIAMEDI CO. LTD.

"이상한 사람 아니고요, 다이아메디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저쪽이요."

남자는 전시회장 부스가 늘어서 있는 가운데 지점을 가리켰다. 부스에는 다이아메디라는 상호가 크게 적혀 있었다.

"전시회 첫날부터 관심 있게 지켜봤습니다. 저녁에 시간 괜찮으세요?"

또 시작이다. 통역 도우미를 시작하고 나서 심심찮게 듣는 말. 시간 괜찮으냐, 저녁 함께하지 않겠느냐, 연락처를 줄 수 없느냐는 물음.

취업 준비하는 학생이라 시간 없다고 답하면 대부분 물러나곤 했는데, 끈질기게 들러붙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다른 회사 소속들은 깨끗이 무시하기 쉬웠다. 정작 가장 큰 문제는 에이전시와 계약한 담당 부스 매니저나 팀장이 집요하게 연락처를 물어올 때였다. 라희 선에서 적당히 에둘러 말하면 에이전시를 통해 연락처를 알아내 문자나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물론, 가차 없이 차단했다. 그러니 오늘은 다행이었다. 각기 다른 회사라서. 점심 무렵에도 저쪽 끝의 과장인지가 명함을 건네고 갔다.

"아, 저 학생이라서요."

라희가 단호한 기색으로 거절의 뜻을 비췄음에도 남자는 계속해서 물었다.

"혹시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굉장한 미인이시고 제 이상형이라서요. 마음에 들어서 편한 오빠 동생으로 연락하고 지내고 싶네요."

편하긴, 누가 편해. 라희는 미간의 깊어지는 주름을 지우려 노력하면서 입매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사귀는 사람이 있어서요."

"아, 네...."

딱 잘라 거절하는 말을 듣고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머뭇거리던 남자는 다시 덧붙였다.

"혹시, 생각 있으시면 나중에 명함에 적힌 번호로 연락해주세요."

라희가 한동안 대꾸없이 무표정하게 가만 서 있자, 남자가 마침내 떠났다.

"휴우.."

지긋지긋한 일. 처음에는 계약 회사 소속 과장이라 멋모르고 적당히 대꾸해주다가 호되게 당했다. 관심 있으니 말 받아준 거 아니냐면서 꼬투리를 잡고 에이전시에 컴플레인을 걸었다. 불친절한 응대로 회사 이미지를 실추시켰다는 말도 안 되는 불만으로 집요하게 사과를 요구해서 사적인 만남을 유도했다. 계속되는 사과요구에 시달리던 라희는 지영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지영과 동반해서 과장을 만나러 가서 사과하자, 과장은 적잖이 당황했는지 얼버무리며 흐지부지 일을 넘겼다.

"저런 찌질이들."

자리에서 빠져나온 지영은 재수 없다는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다.

"밖에서 여자 만날 능력도 안 되니 갑질이야. 진짜."

회사 건물을 보며 한참을 투덜거리던 지영은 어두운 표정의 라희를 향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 일 하다 보면 매일 겪게 되는 일이야. 마음에 두지 말고. 그냥 무시해. 우리야 어차피 아르바이트잖아. 아휴. 기분 잡쳤네. 맥주나 마시러 가자."

"좋아."

그렇게 둘이 향한 학교 근처 호프집에서 기숙사 통금 시간인 1시가 다 되어가도록 맥주를 마셨다. 지영은 이런 일 하면 정말 별꼴 다 보게 된다며 튼튼한 멘탈을 가지라고 조언했고 그녀가 말해주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던 라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경험으로 학과 공부와 자격증 대비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 후 꼭 정규직에 취업하리라 결심했다.

평일에는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빡빡이 수업을 채워 듣고 오후에는 도서관이나 기숙사에서 공부했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삼일은 아르바이트하느라 피곤했기에 매 일주일은 하루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다. 뉴욕에서 귀국한 이후 그렇게 하루하루 정신없이 계절이 지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72회에 지영이 했던 일에 대해 간략히 언급되어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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